[Opinion] 임승유 시집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반복이 낳는 차이는 모두의 삶을 지속하게 한다.
글 입력 2023.06.17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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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가늠하는 척도로 계절을 좋아한다. 시간을 일이나 달로 나누기에는 너무 촘촘하고 햇수는 너무 느슨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계절 탄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감정과 계절은 밀접한 관계니까. 게다가, 계절은 과거를 추억하기에 좋은 책갈피다. 비슷한 온도와 습도는 과거를 반추하는 편리한 요소로 작용한다. 비슷한 결의 계절을 지나다보면,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도 못한 채로 일상을 보내곤 한다.

 

임승유 시인의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는 계절과 관련 있는 제목이어서 구매한 시집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계절의 특색에 맞는 책을 읽는 것 역시 즐겁기 때문이다.

 

시집은 전체적으로 재밌게 읽었다. 시어가 어렵지 않아 부드럽게 읽을 수 있었다. 종종 등장하는 계절의 시어는 계절을 열심히 타고 있는 나에게 반갑게 느껴졌다. 또한, 시구의 배치를 통해 위아래 행을 동시에 수식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해석의 영역을 더욱 두텁게 만들어주었다. 중점적으로 감상했던 요소는 이어서 쓰겠다.


 

- 언어의 한계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 강독 입문>을 통해 ‘언어는 사물을 살해한다’라는 테제를 도출한다. 실재하는 것이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분명히 마멸된다는 의미다. ‘체험이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증발한다’는 프롬의 말 역시 비슷한 뜻일 것이다.


입체적이고 동적인 실재를 언어로 묘사하는 순간, 실재는 정적이며 단편적으로 재단된다. 또한, 언어는 개체의 특색을 거칠게 정리하기도 한다. “예쁘다고 말하면 뭐가 더 있을 것처럼 예뻤다”(「문법」)에서 알 수 있듯이, “예쁘다”라는 언어가 담을 수 없는-혹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는 존재한다.

 

생각은 이어진다. “말하지 않으면 몰랐겠지”(「상자」). 과연 말했으면 알았을까.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맥락과 진심은 분명히 존재할 텐데. 정리하자면, 언어는 실재를 살해하며 ‘무언가’를 온전히 담기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다면, 언어를 상대하는 시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우선, 시인은 언어로 사물을 살해한다는 것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면적」에서 임승유 시인은 ‘~(사물)을 죽였다.’의 구조를 반복해서 사용하여 언어의 살해성을 인정하는 듯하다.

 

언어가 실재를 거칠게 정리하더라도, 시인은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시에 언어의 공백을 만들어 조금 더 포괄적으로 의미를 담으려고 한다. 또한, 언어 자체에 힘을 부여하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언어를 재현의 차원에서 벗어나게 하여 언어 자체에 생명력을 주는 것이다. 정적 언어에 동적 움직임의 자리를 만드는 것은 시인이 실재에 다가가는 조심스런 시도이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은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다. 언어는 순간적이고 고정적이기 때문에, 상처 주기 쉬우며 험하게 사용될 여지도 다분하다. 언어로 표현하는 실재를 죽이는 것 외에도, 언어로 누군가를 죽이는 일 역시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언어의 공백과 그 힘에 대해 면밀히 살필 의무가 있다.


 

- 반복이 만드는 차이(개인적 측면)

 

“한 그루의 나무를 지나면 또 한 그루의 나무가 막아서는 복도”(「주인」)의 표현처럼, 우리 대부분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간다. ‘쳇바퀴 같은 일상’이 삶의 지루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반복은 권태와 무기력을 낳는다.


「새」에서는 자작나무가 연속적 언급되고, 「모텔」에서는 모텔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는 글 처음에 인용했던 「주인」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점. 나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되었지만, 나무 안에서의 차이는 무궁무진하다. 나무의 종류 역시 다양하며, 같은 나무라도 생김새와 높이는 모두 다르다. 이렇듯, 개체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차이성은 우리 삶과 닮아있다. 반복과 함께 생성되는 차이는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겠지만, 하루를 유심히 살피면 완전히 같은 하루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미묘한-혹은 거대한-차이는 엄존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행복은 반복과 함께하는 미묘한 차이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태선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복과 함께 생성되는 차이는 지속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소확행’, ‘행복은 빈도’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말이 아닐까.


 

- 반복이 만드는 차이(사회적 측면)

 

한편, 반복과 함께 생성되는 차이는 지속적인 삶뿐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모두는 같은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의 차이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여름에 있었다”(「지역감정」), 휴가를 앞둔 가족들이 다른 시간대에 있음을 보여주는 「차례」는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에 있지만, 개인이 느끼는 상대적인 시차가 존재함을 나타낸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을 읽고 느낀 점과 비슷하다.)

 

“여기서 여기를 놓친다”(「여기」), 「경찰서」 등의 시는 시간과 더불어, 같은 공간에도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공간의 차이는 개인적 차원과 더불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각각이 느끼는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술했던 개인적 차원처럼, 반복이 생성한 차이, 같음 속의 다름은 지속적인 공동체가 유지되게 하는 동력일 것이다.


 

- 차이의 인정

 

개인과 공동체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차이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모두에게 “높이가 다른 생활”(「주인」)이 있음을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틀의 높이를 생각하며//사람이 되는 것이다”(「산책」)라는 표현처럼, 무한한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성숙한 사람으로의 첫걸음이다. 동시에, “다양한 표정과 억양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길고 긴 낮과 밤」)과 같이 모두와 차이에 대해서 소통해야 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하는 것은 모두를 지속하게 해주는 차이의 가치를 포용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차이를 생산한다. 생산된 차이는 다시 처음의 과정을 돌아가고, 이는 선순환으로 기능한다.

 

처음의 언어적 차원과 결부시키자면, 언어의 공백을 통해 차이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놔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어 자체에 힘을 부여하여 ‘차이’에서 오는 움직임을 수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언어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시의적절한 시집이었다. 더 나아가, 차이에 대해 시적으로 생각하는 시간 역시 즐거웠다. 시집에 필기하며 시를 읽었는데, 나쁘지 않은 습관인 것 같아 당분간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 글의 처음에도 말했듯이, 계절과 예술을 함께 즐기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두 계절의 시어가 들어있는 점이 재밌었던 시다. 지금과 같은 여름에도, 멀게만 느껴지는 겨울에도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는 늘 벅찬 시집으로 기억될 것이다.

 

 

[김민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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