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놓은 이야기를 찾아서 - 성해나 「오즈」

글 입력 2023.06.17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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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의 단편소설 「오즈」(『빛을 걷으면 빛 』 수록)는 하우스 쉐어링 사업을 계기로 만난 두 여성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는 과정을 그린 사려 깊은 소설이다. 과거의 불행을 몸에 새기고 살아가는 두 사람이 자신의 상처에 천착하지도, 자신과 상대의 불행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 깊었지만, 특히 내가 눈여겨본 점은 청년 세대인 ‘하라’와 노년 세대인 ‘복례’가 세대의 차이를 허물며 관계를 가꾸는 방식이었다. 두 인물은 두 세대 정도 차이가 나고, 이런 관계의 경우 대개 젊은 사람에게는 ‘붙임성’이, 나이 든 사람에게는 ‘인자함’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런 관계의 편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하라’가 “빈손으로 가기 뭣해” 구입한 자두는 ‘복례’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침묵을 피하려고 무의미하게 던진 질문과 구청 직원의 말을 의식한 “도와드릴 건 없”냐는 물음 역시 “적적하고 사람 손이 필요해서 세입자를 들인 게 아니”라는 쌀쌀맞은 ‘복례’의 답변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는가. “호의도 관심도” 없는 동거인 사이였던 둘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척, 의식하며 꽤 긴 시간을 보내고, 그러던 중 ‘복례’가 ‘하라’의 타투를 발견하면서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건 ‘복례’에게 문신을 다시 새기고 싶다는 욕망이 평소에 있었고 우연히 ‘하라’에게 그 능력이 있음을 알아본 것일 테다. ‘하라’는 그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복례’의 끈질김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승낙한다. ‘하라’가 ‘복례’의 돈을 받지 않는 것은 어떤 호의보다는 “내가 저지를지 모를 실수”를 걱정하는 마음, 어쩌면 책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 가까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하라’의 이러한 선택이 그들 사이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경제적 이해관계를 의도치 않게 허물면서 두 사람의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느리고 신중한 커버업 과정 속에서 서로의 상태를 배려하고 둘만의 규칙을 만들고 각자의 몸을 보여주며 긴밀해진다. ‘복례’가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 ‘오즈’를 ‘하라’에게 알려주는 것 역시 그 이후다.

 

사적인 문답이 오고 가지 않아도 깊어지는 관계가 있다면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이들도 서로에게 자주 무언가를 묻는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의 물음은 상대의 마음을 기민하게 알아채 말할 기회를 주는 것에 가깝다. 이를테면 ‘하라’가 타투를 새기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묻는 괜찮냐는 물음이 그렇고, 뚱해 있는 ‘복례’에게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냐 묻는 것, 상처를 만져보겠느냐 묻는 것, ‘복례’에게 슬픔을 환기할 기회를 주고자 재미있는 얘기가 없냐고 묻는 것이 그것이다. ‘복례’ 역시 그렇다. 상처가 아프지 않았는지, 도감을 구경하고 싶은지, 압화 만들기가 재미없는지 세심히 묻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상대의 “침묵 뒤에 감추어놓은 이야기를 짐작”할 줄 안다. 나는 「오즈」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복례’의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들이 <오즈의 마법사> 책을 두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는 건 네 몫”이라는 ‘복례’의 말에 ‘하라’는 “의아해하며 책을 덮”어버리고, 줄곧 그런 적 없던 ‘하라’가 무리하여 시술을 이어가는 장면에서 관계의 어긋남이 발생하는 것이다.

 

작가는 머뭇거리면서도 끈질기게 관계를 이어나갈 줄 안다. 더듬더듬 길을 만들며 나아간 덕분에 나도 그 속도에 맞춰 이야기 속을 두리번거리며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어쩌면 뻔한 전개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뻔하다는 것이 사실은 모두가 조금은 기대하는 방향이라고도 생각한다. 게다가 그것이 어떤 희망을 발견하는 쪽이라면 그 끝을 알면서도 그쪽으로 함께 가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소설 속에 언급되는 <오즈의 마법사>의 ‘겁쟁이 사자’는 본인 안에 용기가 있는 줄 모르고 용기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모험을 마친 후 사자는 오즈에게 용기를 달라고 요구하는데,오즈는 사자 안에 이미 용기가 있음을 알려주고는 떠난다. 소설 속 ‘오즈(복례)’도  떠났다. ‘하라’는 홀로 남았고 이제는 자기 안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이야기는 '하라'만의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고.

 

 

[김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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