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그만둬도 돼 - 영화 <와일드>

글 입력 2023.06.17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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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 <와일드>(2015)를 봤다. 러닝타임 내내 고행스럽게 걷기만 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질 리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강릉 해파랑길 코스를 걸었던 여운이 남아 있기도 했고,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방방곡곡에 걷는 자를 위한 길들이 여럿 존재하다는 것도 내가 오랫동안 눈여겨보던 것 중 하나였으니까. 홀로 걷는 자가 겪게 되는 고충들과 걷는 족족 알 수 없이 몰려드는 감정에 공감하며 이 인물의 여정을 함께했다.

 

영화는 주인공 ‘셰릴'이 엄마를 병으로 잃은 후 불륜을 저지르고 마약에까지 손을 댄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녀 곁엔 그녀를 챙기는 남편과 친구, 심리상담사가 있지만 그들이 셰릴의 흐트러진 마음까지 되돌릴 수는 없다. 결국 벼랑 끝에 선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4285km 짜리 트레킹 코스를 완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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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이 여행 내내 되새긴 것은 ‘완주’를 향한 다짐이 아닌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중도 포기의 가능성이었다. 그럴수록 셰릴은 점점 담대하고 꿋꿋해진다. 여행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맞지 않는 사이즈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는 것과 지나치게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수정해가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나간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과 자비 없는 기후, 험난한 자연의 길을 걷는 것이야 모든 여행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난이겠지만, 길에서 만난 남성들의 저의를 살피는 데 자라나는 불안과 두려움을 담아냄으로써 홀로 여행하는 여성이 겪는 특수한 어려움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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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불쑥 끼어드는 과거의 장면들은 어떤가. 걷는 것에 몰두하면서도 머릿속은 온갖 상념에 빠지니 셰릴은 그것들이 지겹도록 자신을 맴도는 이유를 추적한다. 이번에는 부적절한 성관계나 마약으로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는 대신 걷기 행위처럼 정직하게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죽은 엄마의 삶을 부정하듯 경솔하게 내뱉었던 말, 생전 엄마가 매일같이 불렀던 노래의 가사나 멜로디 같은 것들을. 지나고 나서야 그 속에 담긴 마음의 정체를 알아챈 셰릴은 이미 절벽으로 굴러떨어진 신발의 나머지 한쪽마저 내던지며 울부짖고, 하얀 설원 위 동물에게 떠나가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하면서 뒤늦은 애도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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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반환점을 거칠 때마다 그녀는 필요했던 물품과 전 남편의 응원이 담긴 편지를 받고, 반가운 동행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이는 삶의 변곡점과 다름없어 보인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지점들을 거쳐 한파와 폭염까지 전부 버텨낸 셰릴은 마침내 세 달간의 트레킹 완주에 성공한다. 그녀를 기다리는 대단한 보상 따위는 없다. 되려 여행 이후 아무런 대책이 세워져 있지 않은 삶이 셰릴을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와일드’ 그 자체인 태평양 종주 길을 완주한 그녀의 앞날은 그럼에도 퍽 믿음직하다. 삶은 <오징어 게임>이나 <미션임파서블>처럼 생겨먹지 않았고, 조용한 시작과 끝이 반복될 뿐이니까. 언제든 그만둘 수 있으니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또 한 걸음 한 걸음 셰릴은 내딛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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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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