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정녕 이게 당연한 일인지 묻는 반항의 문학 -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글 입력 2023.06.1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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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 국가 이념인 상상 속의 조선. 삶의 고단함과 역경을 시조 속에 담아 훌훌 털어버렸던 백성들은 역모 사건으로 시조 활동이 금지되면서 자유도 행복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러던 중 15년 만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조선시조자랑이 열리게 되고, 탈 속에 정체를 감추고 양반들의 악행을 파헤쳐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조직된 비밀 시조단 골빈당은 이것을 기회 삼아 조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한편, 왕의 비선실세이자 시조대판서인 홍국은 자신에 대한 악덕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이유를 들어 골빈당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친숙하면서도 독창적인 매력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하 <스웨그에이지>)의 내용에 주를 이루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분노는 세계 역사에서 항상 있었다. 더는 계급사회가 아닌 현대에도 눈에 띄는 신분만 없을 뿐, 우리는 ‘자본’이라는 존재에 의해 상류층과 하류층이 나뉜 사회를 살고 있다.

 

<스웨그에이지>가 묘사하는 조선은 상상 속의 국가이지만, 시조를 통해 사회에 분노하고, 고통을 잊는 그들의 모습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는 이미 판소리를 통해 풍자와 해학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섰던 선조들을 알고 있다. <스웨그에이지>가 묘사하는 ‘조선’은 창작의 자유를 위해 가상으로 설정되었을 뿐, 이미 역사 속에 존재하는, 아니, 지금도 어디에선가 진행되는 우리의 예술을 다루고 있다.

 

 

스웨그에이지_공연사진 2.jpg

 

 

<스웨그에이지>는 누구든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고유의 독창성도 놓지 않았다. 이 극만의 매력은 바로 ‘스웨그(Swag)’라는 단어에서 나온다. 본래 ‘swag’라는 단어는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처음 등장한 말이다. 네 연인의 엇갈린 사랑과 갈등을 다룬 이 극에서 ‘swag’라는 단어는 ‘건들거리다’, ‘잘난 척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허세를 부리듯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라는 의미의 힙합 용어로 쓰였다가 이제는 분야에 상관없이 ‘여유’, ‘멋’ 등의 뜻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swag’가 영어 단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영어 단어 ‘swag’가 핵심 키워드로 등장하다니 기본 줄거리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뮤지컬에서의 조선은 우리가 아는 조선이 아니다. 시조가 국가 이념인 가상의 국가다. <스웨그에이지> 이러한 설정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참신한 매력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수단으로써 영리하게 활용한다.

 

시대극이 꼭 지켜야 하는 미덕은 ‘고증’이다. 잘못된 고증과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된 작품이 한두 개가 아니다. <스웨그에이지>의 영리한 출발점은 고증과 개연성에 대한 관객의 기준을 한층 관대하게 만듦으로써 친숙함과 신선함,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매력을 이질감 없이 한 번에 거머쥐었다. 이 뮤지컬만의 특별한 ‘스웨그’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부조리한 세상에 반항하는 방법, 문학


 

앞서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양반의 횡포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다. 이 극에서 시조는 단순히 오락거리에 그치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 속 울분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한 권력자의 음모로 인해 시조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시조를 빼앗긴 백성들은 15년 동안 현실에 순응하며 무력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15년 만에 돌아온 ‘조선시조자랑’ 대회는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다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트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교롭게도 이 공연을 관람했을 무렵 나는 변광배 교수의 <사르트르 vs 카뮈>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20세기의 전설적인 철학자인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상을 비교하고 분석한 책이었는데, 두 철학자 중 특히 알베르 카뮈의 문학관에 <스웨그에이지> 속 시조가 들어맞는 부분이 많았다.

 

 

문학은 당연히 ‘반항’의 한 방법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조리의 극복 수단으로서의 반항이 겨냥하는 지점이 바로 카뮈가 문학을 통해 겨냥하는 인간과 세계의 합일, 조화, 화해, 즉 통일성이기 때문이다.

 

p.215

 

 

카뮈의 사상에서 ‘반항’은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부조리는 명확한 의미가 없는 혼란스러운 세계와 명확한 의미를 갈구하는 ‘나’ 사이에서 빚어지는 마찰이다. 그의 저작 <시지프 신화>에서 반항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로, 반항하는 인간은 대립하는 관계인 ‘세계’와 ‘나’ 중 어느 것 하나도 저버리지 않고 모두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반항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카뮈는 그중 하나로 문학을 제시한다. 문학으로써 시대에 저항했던 예술가는 많았다. 그 수많은 예술가 중에서 카뮈의 문학관이 고유의 영역을 구축한 이유는 그가 지향하는 문학이 한 가지 확실한 입장에서 강력한 주장을 펼치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 문학은 현실을 부정하며 미화하는 수단도 아니고, 지나치게 현실을 비난하는 것에 집중해 특정 방향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수단도 아니다.

 

 

문학은 현실 사회와의 관계에서 ‘동의’와 ‘거부’ 사이에, 즉 ‘애매성’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카뮈의 진단이다.

 

p.220

 

 

카뮈의 문학에서 제시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인정하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냄으로써 이에 반항하는 인간이다. <스웨그에이지>에서 골빈당은 시조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조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 백성들을 선동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의 시조에는 그저 부조리한 시대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을 뿐이다.

 

 

 

정녕 당연한 일인가


 

스웨그에이지_공연사진 3_양희준.jpg

 

 

<스웨그에이지>는 자신의 출신성분을 모르고 방황하던 ‘홍단’이 골빈당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공동체에 녹아든다는 점에서도 카뮈의 사상과 궤를 같이한다. 카뮈에게 인간은 ‘나’이기 전에 ‘우리’로서 먼저 존재한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으로서의 ‘나’는 고독한 개인이 아니다. 반항하는 ‘우리’의 한 일원이다.

 

반항은 부조리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데, 그 인식은 반항하는 주체로 이뤄진 공동체에서 나올 수 있다. 반항은 부조리의 늪에 빠진 나 자신은 물론 내가 속한 공동체까지 구원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페스트>에서 주인공 ‘리유’가 오랑의 시민들을 위해 의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말이다.

 

골빈당과 처음 만났을 때의 홍단은 주먹으로 머리를 콱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밉고 이기적이다. 상대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골빈당이 하는 시조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그는 올곧은 신념을 가진 채 목숨을 바쳐 활동하는 골빈당에 마음의 문을 열고, 대망의 ‘조선시조자랑’ 대회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시조를 노래한다.

 

 

당연하게 우린 살아가네

당연하게 그래도 살아가네

 

정녕 이게 당연한 일인가

정녕 이게 당연한 일인가

 

당연하게 이렇게 살아야 하나

당연하게 그래도 살아야 하나

 

정녕 이게 왜 당연한 일인가

정녕 이게 왜 당연한 일인가

 

- '정녕 당연한 일인가' 中

 

 

예술의 수많은 역할 중 하나에는 우리가 살면서 놓쳐버린 중요한 질문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 있다. ‘정녕 당연한 일인가’의 가사는 백성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정녕 당연한 일인가 물으며 자유와 행복을 빼앗긴 그들의 마음에 반항하는 태도를 심어준다. 그것이 골빈당이 시조로 세상을 바꾸는 방법, 공동체와 함께하는 방법이었다.

 

 

   

누구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양반놀음


 

그동안 시놉시스와 일부 영상만 접했었던 <스웨그에이지>를 직접 보니, 역시 내 예상대로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극이었다. 가끔 주제와 상관없이 순전히 관객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플롯을 복잡하게 쌓은 작품을 접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꼼꼼히 본 노력이 무색하게 다 보고 난 후에도 아무것도 남지 않아 허무해지곤 한다. 의미가 없어서 허무한 게 아니다. 의미 있는 ‘척’을 위해 희생된 것들이 아까워서다.

 

그런 점에서 <스웨그에이지>는 흔치 않게 깔끔하고 담백한 뮤지컬이었다. 전개에 중요한 진실들이 군데군데 있지만, 반전이라는 허물을 덧씌워 전개 속도를 늦추는 대신 필요한 때에 곧바로 그 진실을 알리며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군더더기 없이 확실하게 주제를 전달하면서 재미 요소도 빠지지 않고 챙겨 다 보고 난 후 개운하게 감상을 마무리할 수 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최근 어둡고 복잡한 극을 자주 관람했다. 그럴 때면 다른 관객의 분위기에 영향받아 같이 긴장하고 보게 되는데, 물론 몰입하는 순간은 아주 즐겁지만, 2시간 내내 그렇게 보면 온몸이 여간 피로한 게 아니다. <스웨그에이지>는 인터미션을 포함해 150분 동안이나 극이 진행되는데도 그런 피로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무거워지려고 하면 적재적소의 유머로(이런 유머가 실패하지 않는 경우도 오랜만에 봤다) 분위기를 환기해 긴장을 풀어준다. 뮤지컬을 보며 모두가 웃고 떠들 수 있다니,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카뮈는 “작가의 최대 사명은 최대 다수의 사람들을 융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시조를 창작하는 골빈당은 물론 뮤지컬 <스웨그에이지>의 제작진들 역시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그들의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내외적으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유쾌한 시조로 세상에 분노하는 <스웨그에이지>만의 에너지가 큰 힘을 줄 것이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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