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굴뚝에 속고 또 속으며. ‘굴뚝을 기다리며’ [공연]

글 입력 2023.06.0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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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을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부조리극이다. 각색과 연출을 맡았던 이해성은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진심이 극에 녹아들어 있다. 


이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씬과 대사가 반복되면서도 미세한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거다. 이러한 점은 고만고만한 하루가 계속되지만, 그 안에서도 조금씩 다른 순간이 있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극 중 인물들까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과 닮아서 무대에 올라간 게 희곡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밀착 취재한 다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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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사람들의 삶을 비춘 거울.



‘굴뚝을 기다리며’의 주인공 누누와 나나는 상공 75m의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누누와 나나는 파인텍 해고 노동자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로 그들을 통해 고공에서 농성하는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굴뚝 아래의 현실과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밥줄인 밧줄을 통해 끼니를 해결하고, 잡담을 나누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 씻고, 먹고, 자는 등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좁디좁은 곳에서 고통스러운 더위와 추위를 견뎌냈다. 시간 때우기용처럼 보이는 그들의 잡담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현실의 문제들이 숨어 있었다. 먹고, 자고, 수다나 떠는 사람들로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밌었던 점은 누누와 나나의 서로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누누는 감성적이고, 나나는 이성적인 성향이었다. 누누와 나나는 한 공간에서 같은 생활패턴으로 지내면서도 느끼는 게 달랐다. “여긴 높아”, “아니야, 여긴 낮아”, “넓지?”, “아니 좁은데.”라고 말하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 대목은 복선처럼 결말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누누는 결국 굴뚝은 오지 않는다며 기다림을 포기하지만 나나는 계속 굴뚝을 기다렸다.


누누의 “굴뚝은 확실히 오는 거야?”, “내일도 굴뚝은 오지 않을 거야”와 나나의 “지금 이 순간 물러나면 나아질 수 있어?”는 두 인물의 차이점이 가장 잘 드러난 대사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매우 다름에도 동고동락하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굴뚝을 기다리는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그 하나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알아가고, 맞춰나가며 가까워졌다. 누누와 나나는 사회 조직이나 가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맞춰 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 거울이었다.


청소는 굴뚝을 청소하는 노동자다. 청소는 자신을 성자이기 때문에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성자니까 화를 내지 않는다는 말이 자기최면을 거는 것처럼 들려서 그렇게 말하는 청소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청소는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고, 합당한 대가도 하지 않는 조직에 있지만, 그런 현실에 순응하며 열심히 일했다. 매력적이었던 건 청소가 갖고 있는 양면성이었다. 순응하며 안주하는 인물임에도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놓치는 것들을 세심하고, 정확하게 캐치했다. 그가 꼬집은 사회 문제점에서 남다른 통찰력이 보였다. 


청소는 굴뚝 청소 일을 한다고 무시당하면서도 자기 일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이런 인재를 알아봐 준 사람은 나나와 누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해고까지 당했다. 청소는 사회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현실에 순응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는 해고라는 게 매우 안타까웠다. 


청소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현실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담아낸 캐릭터였다. 그래서 가장 많이 안아주고 싶었다.


미소는 굴뚝 청소를 해주는 AI이다. 인간이 입력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미소를 보면서 AI는 기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애매한 지점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기계와 주관적인 인간의 특징이 섞인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미소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누누와 나나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청소에게는 어땠을까. 인간이 하기 힘들고 위험한 일을 대신 해주기 위해 탄생한 존재인데, 정말 청소를 위한 존재가 맞을까? 청소를 다시 무대로 불러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었다. 


청소가 누누와 나나와 대립한 씬에서는 울컥했다. 청소는 인간의 말을 잘 듣는 AI였다. 그러나 누누의 목을 조르고 있는 미소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는 나나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다. 나도 인간인데, 왜 내 말은 듣지 않냐며 울부짖는 나나의 모습 위로 힘이 없는 사람이나 소수의 말은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오버랩 됐다. 


이소는 MZ세대 중 하나로 갓생을 살고 있는 ‘갓소’라는 부캐가 있다. 몸은 하나지만, 본캐와 부캐를 오가며 두 개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하나의 몸으로 소화하기 힘들어 보이는 일정을 이소는 척척 해낸다. 누누의 말처럼 내 시선에서는 작은 틈조차 없는 나날을 보내는 이소가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MZ세대가 그런 이소를 손민수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그들의 시선에는 멋있어 보이나 보다. (나도 MZ세대에 속해있는데 이소가 힘들어 보였다) 이소도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보였다. 이소는 걱정하는 누누에게 하고 싶은 게 많은 이소라서 힘들지 않다며 당차고, 씩씩하게 웃었다.


이소의 본심이 후에 나오는데, 반전이었다. ‘갓소’의 갓생은 진짜 갓생이 아니었다는 거다.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는 현실에 지치고, 도망치고 싶은 본심이 있었다. 갓소로 살 때보다 이소로 살 때가 더 행복해 보였다. 소녀는 이소일 때는 갓소로 불리는 걸 싫어했다.


이소는 MZ세대들의 현실과 그들의 심리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 캐릭터였다. 나도 윗세대의 잘못된 관습으로 인해 아프고,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힘든지 제대로 모르면서 ‘요즘 애들은’이라며 혀를 차는 태도가 싫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10대, 20대들도 그런 입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 덕분에 요즘 세대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가 달라진 부분에 관해서만 말할 게 아니라 ‘왜’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는 태도가 필요했다. 요즘 세대도 비판받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세대의 격차를 완전히 줄여서 살 수는 없겠지만, 더불어 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각 세대가 지켜야 할 것과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실천한다면, 가능성을 만들고 그 가능성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소라는 캐릭터는 21년 초연 때와 다르다고 한다. 초연에서는 플랫폼 노동자의 모습을 담았지만, 23년의 재공연에서는 MZ세대의 현실을 비춘 캐릭터로 수정됐다. 시대 흐름에 맞춰 수정 보완한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마무리까지 현실 거울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연극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극에서 청소와 이소는 누누와 나나처럼 같은 노동자이며 을의 입장인데도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행동이나 말로 드러냈다. 그 모습이 매우 낯이 익었다. 알고 보니 그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노조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 같은 노동자이며, 같은 편이다. 그런데도 노조 시위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장 자기 일이 아니기에 안일하게 여긴다. 딴 세상 사람들처럼 본다. 청소와 이소의 누누와 나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노조 시위에 대한 안일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의 큰 불편이나 피해를 초래하는 시위까지 응원할 수 없겠지만, 안일한 태도보다는 작은 관심이라도 가져보려는 태도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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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굴뚝에 속고 또 속으면서 산다.



 
어떤 사람은 꽃처럼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나무처럼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차갑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뜨겁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갓반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양아치라고 하고 다 달라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도 해요. - ‘굴뚝을 기다리며’ 중 이소의 대사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격, 나이, 직업, 상황 모두 다르지만 ‘굴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누군가는 굴뚝을 기다리기도 하고, 직접 자신이 굴뚝이 되기도 하고, 굴뚝을 향해 전력 질주하기도 한다. 또는 굴뚝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소의 말처럼 굴뚝은 사람, 나무, 괴물 등 인물에 따라 달랐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도 ‘굴뚝을 기다리며’의 인물들처럼 굴뚝이 있다. 각자의 삶이 모두 다르지만, 각기 다른 굴뚝이 하나쯤은 있다. 잊어버렸지만 다시 찾기도 하고, 버렸지만 다시 주워 오기도 하면서 말이다. 처음의 굴뚝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사람, 굴뚝이 여러 번 바뀌었던 사람, 여러 굴뚝을 만났지만 하나로 정착한 사람, 굴뚝을 찾는 중인 사람, 자신에게도 굴뚝이 있는지도 모른 채로 사는 사람 등 모든 사람은 굴뚝과 함께한다. 그러니 우리는 반복되는 무료함이나 힘듦에도 굴뚝에 속고 또 속으며 살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이 인간의 삶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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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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