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토리와 로키타에게 필요한 단 하나 [영화]

All you need is love, 다르덴 형제의 노래
글 입력 2023.05.2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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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훨씬 넘어 밀려드는 난민에 유럽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누군가는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비문명화된, 혹은 종교·문화적으로 위협이 되는 외지인들이 슬럼을 형성해 치안을 위협하고 범죄율을 극도로 치솟게 했다고, 언론의 이른바 객관적 보도는 현상의 책임을 가장 만만한 이들에게 떠밀 수 있는 틀을 짜냈다.

 

난민은 정말 국가체계를 전복시킬 무시무시한 이교도 무리인가? 다르덴 형제는 고개를 젓는다. 가장 낮은 곳에서의 생존은 그들에게 손을 뻗어주는 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손을 내미는 이들이 꼭 좋은 사람들은 아니다. <토리와 로키타>는 바로 이 지점에 우리 사회의 혼란에 대한 꺼림칙한 진실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기사 속 숫자로 표현되는 낯선 존재들은 혼란을 야기할지 몰라도, 그것을 가중하는 이들의 숫자는 쉬이 기사로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자꾸만 나쁜 방향으로 흐르는 데에 나는 정말 책임이 없는가? 소시민은 결백하기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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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와 로키타는 친남매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낯선 외국 땅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가족보다도 가까운 사이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가 이 외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증을 얻어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어린 청소년들이 합법적으로 벨기에에 체류할 수 있으려면 종이가 한 장 필요하다. 이것을 얻기 위해선 정말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인권 유린을 경험해 보호가 필요한 존재인지 심층 인터뷰를 거쳐야 한다. 기억에 오류가 있거나 적합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힐 앞날이 놓이게 된다.


토리는 체류 사유가 명확하다. 주술사 아이로 아동학대를 받았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키타는 사유가 불분명하다. 정말 토리와 친남매인지 알 수 없는 데다 학대받았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로키타를 두고 토리가 심사관에게 달려간다. 왜 누나는 체류증을 얻을 수 없나요? 토리가 묻자, 심사관은 그녀의 진술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누나가 없으면 아직 어린애인 나는 혼자 살아갈 수가 없는데요, 하는 막막한 물음에도 등을 돌리고 사라진다.


끽해야 초등학생인 꼬맹이가 머나먼 타지에서 홀로 어떤 위험과 고난을 겪게 될지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심사관들은 냉정하다 못해 잔인하다. 아마 너무 많은 이들을 상대해 왔기 때문이라. 자신들이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해도 누군가의 생명과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대단치 않다. 무뎌지는 죄책감은 이들 난민을 동등한 인격적 존재가 아닌 스트레스를 주는 일거리로 치부하게 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손쉬운 회피 방법이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자주 쓰는 표현이다. 대단한 권력이랄게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권한 밖의 일을 이렇게 일축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마음은 조금 무거울지라도 권한이 없으니 나는 그 어떤 책임도 잘못도 없다. 그래서 어쩌겠는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직접 가서 해결하라는 우회적인 이 한마디는, 그러나 가장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될 수도 있다. 기계적 중립, 무관심, 침묵, 냉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민공동체와 교류를 하며 살아가는 주민들에 관한 연구를 읽은 적이 있다. 난민과 관련한 정책에 대해, 한 번도 난민공동체와 교류를 하지 않은 그룹에 비해 훨씬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유럽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난민 문제가 자꾸만 부정적으로 이슈화되는 것을 보면, 그쪽에서도 여러 가지 선입견 혹은 문제를 겪으며 그다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는 이들도 많지 않을 테다.

 

그렇다면 권력이 있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 중 가장 '할 수 있는 게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시민들은 아니다. 난민의 다양한 사연과 모습을 알고, 눈과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한 적 있는 이들 쪽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따뜻한 마음, 관심의 눈길이다.


한 명이 문제를 제기하면 그것은 그냥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그러나 그게 열 명, 백 명, 또 천 명이 되면 담론이 되고 중요한 안건이 된다. 그렇게 국민신문고가 큰 힘을 발휘하던 것을 우리는 여러 차례 보았지 않았던가? 물론, 이미 정해진 절차에 대해, 그것도 자국민이 불안을 느낄 수 있는 이슈에 대해 선뜻 입을 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가장 낮은 곳에서의 생존은 그들에게 손을 뻗어주는 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비행 청소년 등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법의 철퇴가 아니듯, 난민의 유입으로 발생하는 문제 역시 더 근원적인 부분에서의 해소가 필요하다. "학대받았으니 너는 패스, 저 애는 아웃" 과 같은 방식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더해, 그런 식으로 법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이들에게 닿는 마수는 간접적으로 소시민인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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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토리와 로키타에게 공연을 시키는 요리사 벨팀은 언뜻 보기에 좋은 어른 같지만, 손님 없는 주방으로 들어오면 본모습을 드러낸다. 청소년 난민의 신분으론 합법적으로 생활비를 벌 수 없으니, 아이들을 마약 유통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데도 토리와 로키타가 받는 액수는 크지 않다. 벨팀은 마약 공급책 일을 그들에게 베푸는 선심이라는 듯 구는 데다, 로키타에게 성적 학대를 가하며 그것이 합법적인 거래였다는 듯 돈을 쥐여준다.

 

유럽권에서 마약은 흔한 문화가 된 지 오래다. 이웃집의 평범한 학생이나 직장인마저도 작은 유흥거리로 소비하고 있다는 걸 수많은 미디어에서 증언해 왔다. 소수의 중독자만 마약을 한다면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연락 수단마저 빼앗긴 채 밤거리를 걸어 다니며 어른들과 은밀히 거래하진 않을 것이다. 마약의 일상화, 더 넓게 보자면 평범한 이들의 작은 일탈 혹은 재미 아래에는 법의 보호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공허한 비극이 깔려있다.

 

이들의 비극을 가중하는데 우리 같은 이들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직접적으로 그들을 떠민 이들은 가시화조차 되지 않는다.

 

홀로 남게 된 토리의 앞날은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밝지 못할 것이다. 이미 한 번 범죄에 발을 들인 데다, 마약으로 신고라도 당하는 날엔 평생 범죄 기록을 안고 살거나 강제로 추방당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보호소에 또래 친구나 선생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평생 토리를 보호해 줄 수도 신경 써줄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그러므로 최악의 방관이다. 어른들의 탐욕이 만들어 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또 다시 어른들의 사정으로 방기한 아이들이 왜 나라를 위협하는 잠재적 범죄자로 불리어야 하는가? 책임을 질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토리와 로키타는 그저 자연 발생한 존재들이란 것일까.

 

우리는 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은 따뜻한 관심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이다.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가 있다. All you need is love, 필요한 건 사랑이라는 달콤한 가사는 반주만 들어도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렇다. 사랑이 필요하다. 관심이 필요하다. 조금만 서로 양보하고, 조금만 더 나와 남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는다면 우리는 아주 큰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비단 난민이라는 주로 국제정세에서 비롯된 문제뿐 아니라, 환경 등 더 다양한 이슈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정정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구에 몇십억 명이 살고 있는데 모두가 이타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저 멀리 비명보다도 눈앞의 이득에 눈이 가는 게 사람 아니던가. 하지만 이타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시간여행보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빽 투 더 퓨쳐>를 바라느니,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토리와 로키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훨씬 빠르고 경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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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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