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일기장 [2편] 단순해지는 연습

옅은 빛을 따라가며
글 입력 2023.05.0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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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순해지자


 

단순한 삶에 대해서 종종 생각했다. 너무 복잡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자꾸만 속으로 되뇌었다. 단순해지자고. 그건 황정은 소설에 나오는 어느 한 남자가 중얼거리는 말이기도 한데 그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 단편소설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패턴이 있다. 생각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무의식적인 행동들. 그 행동들의 집합이 결국 각각의 사람이다. 그리고 소설 속 남자는 타고있던 버스가 교통사고 나던 날,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메고 있던 가방을 꽉 쥔다.

 

선택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찰나의 순간, 무의식적으로 항상 하던 대로, 나도 모르게 가방을 붙잡는다. 남자가 붙잡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붙잡은 가방 대신 버스 밖으로 튀어나가고, 죽게 된다. 그 뒤로 그는 강박적으로 삶을 단순화시키며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단순해지자고.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문학과사회』 2014년 가을호, p.124)

 

 

황정은의 「웃는 남자」는 오랫동안 ‘그 일’을 생각해온 남자이며, ‘단순해지기로’ 결심한 남자이다. 그 단순함을 위해 그는 “가구도 식기도 벽에 걸린 것도 없고 조명도 없”는 공간에 산다. 그는 생곡을 씹어 먹고 영양 부족으로 털이 빠지는 것을 감수한다. “건축된 지 36년 된 아파트 5층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 남자를 단순하게 살게 만든 ‘그 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를테면 한여름 버스정류장에서 곁에 서 있던 노인이 내 쪽으로 쓰러졌을 때 그를 피해 비켜 선 일, 혹은 함께 살던 디디와 함께 탄 버스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짧은 순간 디디가 아니라 가방을 붙들었던 일. 디디는 죽었고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다. 고통스럽게 그것을 곱씹는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의 죄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던 대로 했던” 것일 뿐이다. (이광호, 문학평론가)


 

그 중얼거림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나는 어떤 인간일까. 어떤 패턴을 가진 인간일까.


이 복잡한 하루하루에서는 도무지 내가 나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나도 자꾸만 중얼거렸던 것 같다. 단순해지자고. 물론 바쁜 눈앞에 주어진 일들에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겠지만 나는 정말로 더 단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 끝에 남는게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가 알고싶었다. 그 조각이 혹시 여기에 있을까? 지난 일기를 뒤적여본다.



다른 문장들을 전부 지우고 

그냥 누워도 괜찮을 것 같아


눕자 눈을 감자

복잡해진 문장들을 지워내고 

잠에 빠져들자


단순해지자

 

2023.3.8.



추상적인 단어에는 더 많은 마음을 담을 수 있다 

구태여 이름 붙이는 일은 조금은 포기하기로 했다 

 

하늘은 하늘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하늘이고 

나무는 나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나무이다

 

2023.1.4


 

 

단순해지는 연습 복사본.jpg


 

 

2. 해야 할 일을 하다보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붙잡고

운동해야하는데 자꾸만 잠이 와서 

잠이 깨는 부스터를 입에 털어넣고

내일의 할 일을 생각한다


그래도 결국엔 너무 늦기전에

며칠이 넘어가는 빨래를 돌려야하고

쓰레기를 분류해서 버려야하고

꺼내둔 음식들을 먹어야하고

방 한구석의 빨래를 개어야겠지


읽다 만 책의 마무리를 지을때도 되었고

나는 운동을 하고 밥을 챙겨먹을거야 

어떤 하루가 와도 

스스로를 해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찾아나간다

 

2023.3.28


 

방을 치우고 운동을 하고 책읽고 공부를 하면 

결국 삶은 바로잡힌다

 

처음 타기 시작해 흔들리는 자전거를 바로잡는건 

다시 멈추는 일이 아니라 페달을 밟는 일이다

방향이야 가면서 자꾸 수정하면 된다

 

2023.3.25


 

남들이 알아주는 일 아니어도 

내가 마음에 드는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나는 더 괜찮아지겠지

 

마음도 안정되고 내 중심도 찾고 

어쩌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지도 몰라 

 

2023.2.8



여러 고민과 우울과 불안 속에서도 

옅은 빛을 따라가는 삶이랄까

 

2023.2.15



단순하게 눈앞에 주어진 해야 할 일을 하다보면 삶은 앞으로 간다. 그 유명한 조던피터슨도 성공하고 싶다면 당장 가서 방부터 청소하라고 말했다. 자꾸 생각에만 빠져들어서 말아눕지 말고 밥을 먹고 빨래를 돌리고 운동을 하고 출근을 하고 공부를 한다.

 

올해 2월 15일에는 그런 삶을 두고 ‘옅은 빛을 따라가는 삶’이라고 적었다. 희미하더라도 거기엔 분명 빛이 있다. 그리고 빛은 종종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단순해지려 노력하는 삶이 흩뿌리는 것이 이런 조각들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단순해지는 삶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본다. 요즘은 머릿속에 화단 하나쯤 가꾸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각없이 사는 사람을 보고 나쁜말로 저 사람은 머릿속이 꽃밭이라고 하기도 하던데 그게 꼭 나쁜건 아닌 듯하다. 물론 그런 말 쓰는건 나쁘고 머릿속에 작은 화단은 좋다. 어떤 시간이 다가와도 거름으로 승화하고 어둠과 우울이 아니라 충분한 빛과 햇빛을 쏟는 공간. 그 낙관과 긍정을 부정하는 이들에겐 잘 키워낸 꽃 한 송이 선물해주면 될 일이다.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꽃밭을 거닐 듯이 경쾌한 걸음으로 하루를 살아야지.

 

 

좋아.jpg

 

 


3.  옅은 빛을 따라가며



일기는 마찰력에 저항하고 그런 삶을 밀고 나갈 수 있는 바퀴와 엔진이 된다. 그날 그날 해낸 일들을 기록하고 해내지 못한 마음들을 적어내려 시작한 일기였는데, 적다보니 일기에 쓰기 위해 용기를 내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기를 쓰고 To-Do 리스트를 체크하면 단순하게 ‘어쨌든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삶’이 주는 균형감을 느낄 수 있었고. 미미하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며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줄 수도 있었다.


지난 일기를 돌아보면 선순환이 도는 시기와 악순환이 도는 시기가 눈에 쉽게 보인다.

 

악순환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종종 우울해하고, 우울을 견디기 위해 의미없는 쇼츠를 계속 내리면서 핸드폰을 만지고, 해야 할 일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밤늦게까지 우울한 일기를 붙들다 겨우 적어내고, 다음 날 일찍 출근해 피곤함에 다시 우울에 빠져드는 패턴이 자주 발견되었다.


반대로는 충분한 잠과 카페인의 힘을 빌려 하루를 긍정하고, 빌려온 에너지로 우울과 불안과 노동을 견디며 충분한 하루를 살아내고, 그 동력을 이어받아 해야 할 운동과 공부를 해내고,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책과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남의 훌륭한 생각들을 빌려 일기에 그럴듯한 문장을 써내고, 적당한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선순환과 악순환은 일정한 패턴없이 불규칙하게 반복되다 끊어지고, 다시 다른 주기의 순환이 갑작스레 끼어들곤 하는 복잡한 힘겨루기를 하곤 하는데,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고리를 끊는 분명한 일들은 있었다. 선순환을 끊고 들어오는 것은 누군가의 말이라든지, 나의 실수라든지, 온통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뿐이었지만, 악순환을 끊어내는 것은 마음먹고 움직이기에 달린 것이었다.


어쨌든 책을 펼쳐 책장을 넘기고, 원래 정해둔 잘 시간이나 알람을 신경쓰지 않은 채 깊은 밤에 빠져들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멍이라도 때리며 그대로 가만히 둘 수 있으면 복잡하게 얽혀 덩어리진 감정을 숭덩 잘라낼 수도 있었다.



숙제들은 쉽게 풀리지 않고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끌고오지 않는 연습을 해야한다. 


좋았던 것은 좋았던 그대로 

나빴던 것은 안 좋은 그대로 

뒤섞지 않는 연습도 해야한다. 


반대로 회색을 흰색과 검은색으로 

나누려는 시도도 그만둬야 한다. 

 

2022.12.25


 

그리고 그런 날에는 정말 드문 다짐을 자신있게 적어내기도 했다.

 

 

 젊음을 마음껏 낭비하고 쓰라고 좀

 

유통기한 지난 쿠폰 들고 아쉬워하지 말고

원래 세상은 엉망진창으로 사는거야

 

2023.2.12



살다보니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픈 손가락이 있다

다른 생각으로부터 뜬금없이 이어지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그런 것들


난 자꾸만 생각하고 정리하고

꼭꼭 씹어서 소화해야 한다고만 느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을지도 몰라 


그냥 내버려두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것 같아

오늘은 좋은 생각만 하고 즐겁게 살아야지 

좋은 부분을 보다보면 좋은 일만 생기니까!

 

2023.2.20


 

나는 스스로를 너무 괴롭힌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을 들고선 어쩔줄 몰라하며 오래오래 생각하고 아파한다. 그럴땐 빈 메모장을 켜놓고 큰 숨을 내쉬며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단순해지자고. 손에 너무 오래 붙들고 있지 말고 힘을 좀 빼고 흐르도록 두자고. 흘려보내다보면 다시 내게 돌아올 일도 있을거고, 또 다른 무언가가 손에 들어오는 때도 있을거다. 이런 희망을 쉽게 적어낼 수 있던 어느 밤처럼.



잠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밤을 딛고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보면서 

집에 가는 기차에서 적는다

 

2023.3.17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 태그.jpg

 

 

[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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