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일기장 [1편] 솔직해지는 연습

일기장 훔쳐보기
글 입력 2023.05.03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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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솔직해지자

 

솔직해지자.jpg

 

 

어릴 때 온갖 물건에 이름을 붙여주는 친구가 있었다. 가방과 필통, 지우개와 연필같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물건은 물론이고, 그 날 잡은 방아깨비나 아끼는 물건에는 더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를테면 ‘엘리자베스’ 같은 어린 나이에 생각하기에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던 이름으로 말이다. 길쭉한 머리를 하고 폴짝거리던 어린 시절의 방아깨비 엘리자베스를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그 친구를 떠올리며 소중하거나 중요한 것이 생기면 나도 좋은 이름을 주고싶어 고민했다. 고민하다 일기를 쓰는 공간에는 ‘솔직해지는 연습’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 그간 동의할 수 없는 말에 웃음을 보이거나 침묵을 지키는 형태로 나는 종종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도 항상 조심스러웠다. 나는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하고싶은 말은 마음 속에서만 소란스럽게 사라져간다.



단어와 문장들을 삼켰다가

메모장에만 조심히 풀어놓았다

그러고나면 그것들은 맴돌다가 미래로 갔다

 

2023.4.9

 

 

그렇게 하지 못한 말들을 모아 메모장에 적어두면 그것들은 모여 내 성격이 되고 삶이 되었다. 운이 좋은 날엔 어떤 문장들이 나를 미래로 데려다주기도 했다. 일기에 적기 위해서라도 좋았던 일, 즐거웠던 일을 하나씩 찾으려 하다보면 내가 쓴 글이 나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었다. 모호한 감정들에 이름 붙이고 소화 안 되는 일들을 꺼내어 잘게 나누고 되새김질 하다보면 또 하루가 살아졌고, 어느 날은 좋았던 순간을 잘 박제해 전시할 수도 있었다.


일기라는 공간에서 나는 혼란스럽고 안전하다. 위험한 마음을 손에 쥐고도 빈 화면과 빈 종이 위에서는 충분히 뛰어놀게 할 수 있다. 그 위에서만큼은 좀 더 솔직해져도 좋을 것이다. 좋았던 것들은 내 주변에 내내 맴돌도록, 나빴던 것들은 쉽게 내 마음에 들어와 내가 되지 못하도록 자음과 모음을 엮어 그물을 만들다보면 또 다른 내일이 찾아왔다. 오늘은 그간 썼던 조각들을 돌아보며 좋았던 시간을 추억하고 잘 견뎌왔던 시간을 기억하려고, 조금 더 솔직해져보려고 글을 쓴다.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려고 일기를 쓴다

당시에는 나도 잘 모르는 마음을 풀어놓으려 쓴다

 

지나고나서야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들을 새긴다

지나고 다시 보면 오늘은 뭐라고 부를까

 

2023.1.7

 


오늘은 비행운을 봤다.

무언가가 지나가버린 흔적이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바람이 불어 그마저도 금세 흩어져갔지만

내 마음속에 담아뒀으니 괜찮다.


유난히 맑고 차가운 하늘 아래에서 공놀이를 했다. 

다같이 머리 비우고 해맑게 웃은게 얼마만인지

분명 좋았던 하루의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


일기를 쓰기로 한 건 좋은 일이다. 

그간 다시 써야지 생각만 했었는데 

쓸만한 기회와 마음이 찾아와서 좋다. 

여기서는 조금 더 솔직해져도 좋겠지. 

 

2022.12.16.


 

 

2. 누군가의 문장을 빌려


 

창문.jpg

 

 

적어둔 일기를 보면 좋은 날과 좋지 않은 날을 자꾸만 오간다. 어느 날은 세상에 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외로워하다가 어느 날은 누군가와의 만남에 들떠 신이 난 감정이 티가 나고, 어떤 날엔 희망과 다짐을 적고, 어떤 날엔 끝도 없는 우울에 빠져든다.


내 일기의 전반적인 톤은 항상 새벽에 스탠드를 켜 놓은 방처럼 차분하고, 로우파이 음악처럼 잡음이 잔뜩 끼어있다. 좋은 일에도 좀처럼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작은 좋은 일로 크고 작은 슬픔을 겨우 덮으며 하루하루를 애써 살아가는 모양이다. 슬픔과 어둠을 딛고서야 희망을 적을 수 있는 건 안 좋은 습관일까? 화나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펭귄이라고 생각해야 겨우 귀엽게 봐줄만해지고 남의 문장을 빌려서야 겨우 행복해질 궁리를 하곤 한다.

 


하루종일 자꾸만 사람들이 펭귄으로 보였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고민해야지 

불평하지 말고

 

2023.1.16



무슨 문장을 써야할지 잘 모르겠을 땐 빌려오면 된다

오늘은 무슨 문장으로 하지?


잘 모르겠는데 누가 행복해질 수 있는 문장 추천해주라

 

2023.2.19



그럴싸한 해석을 보면 작품이 아주 그럴싸해진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나도 조금은 그럴싸해진다

 

좋은 작품과 타인의 사유를 빌려 조금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글에 담긴 인식들은 더 넓고 깊게 사고하게 만들고 

삶에서 겪는 현상들에서 내가 또 다른 인식을 찾아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2023.4.3.

 

 

그래도 여러 작품을 읽고 나만의 공간에 옮겨 적고 다른 이들의 인식을 내 삶에 적용해가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 같다. 최근에 빌려온 문장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윤동주 시인의 것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낯선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 쓸데없는 걱정을 날려주기도 한다. 주말 밤에 만났던 어린아이의 순수한 인사가 그랬다. 얼굴도 잘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빚지며 산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자꾸만 생각 속에 갇히지 않고 생각 밖으로 나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빈 공간에 풀어놓은 생각들이 어떤 문장과 사람을 만나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일기로 되돌아가 읽다보면 스스로에게 조금 더 기대를 걸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꽃이 폈다 바깥에 좋은 것 많다 나가 놀아가 생각 밖으로 나가 놀아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주변의 모두를 조금은 더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건너편 지하철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기차 옆자리 작은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은 그렇게 한 줌씩 나아진다

 

2023.4.2.

 

 

아직도 사랑같은걸 믿어?

 

이런 이야기 정말 많이 듣는다. 

다들 이 나이 먹기까지 꽤나 상처받으면서 살았던거겠지. 

 

그래도 고민하면서도 긍정하는 사람들이 좋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강한 사람들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용기가 없는 것뿐이라고, 믿고싶다

 

2023.2.1


 

자주 남의 글을 빌려 적었다. 글을 쓰고 싶은데 내 글은 부끄럽고 모난 것 같아서 작품을 앞에 두고 작품에 대한 생각만 늘어놓기도 많이 했다. 한동안은 그게 내 약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콜라주도 하나의 멋진 작품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대단한 사람들의 작품에도 여기저기서 누군가로부터 받은 영향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으니까.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다행이다. 나는 아직 여기저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최근에 유튜브를 보는데 유독 자막에 잘못된 단어 표현을 많이 쓰는 영상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 보통 잘못과 실수를 누가 쉽게 지적해주지 않으니까 실수를 교정할 기회를 자꾸만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를 했다. 일하는 데에서는 30대에 접어든 사람들이 ‘내가 이 나이 먹고 아직도 혼나야 돼?’라고 말하기도 하던데, 아직 배울게 많은 20대 사회초년생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배우고 더 나아질 기회를 박탈당하는게 더 두렵다. 닮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3. 그리움의 조각들을 재료삼아


 

카페 입구 복사본.jpg


 

똑같은 하루, 똑같은 하늘, 똑같은 바람

돌고돌아 다시 찾아오는 계절


지겨웠던 풍경도 추억을 맞아 그리워지고

제자리를 걷는 듯해도 자꾸만 흘러간다


힘들어하면서 보냈던 좋은 나날

저때로 조금 돌아가고싶다

 

2023.3.2.

 


짧게 스쳐간 순간들을 그리워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삶이 조금 더 늘어났다고 느낀다

2023.4.13.

 


지난 밤 꿈에서 왜 그렇게 울었더라?


잠에서 깨어나니 대충 뜯은 택배를 

다시 욱여넣고 포장해버린 느낌

 

2023.4.14.

 


내 삶을 차지하는 지배적인 정서는 그리움이다. 그 대상과 범위가 항상 모호해서 정확히 어떤걸 그리워하는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스쳐 지나갔던 삶의 단상들을 자주 떠올리고, 지나간 사람들을 오래 생각하고, 어느 날은 지나온 적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지나온 삶을 복기하고, 몰랐던 감정의 결을 구분하고, 누군가의 뒷모습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삶이 자꾸만 흘러간다. 그러니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솔직한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를 대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들이 다음 삶을 위한 충분한 재료가 되어서, 지나온 날들보다 다가올 날들이 더 좋은 그런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기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분명 그런 날들이 찾아오기를 함께 기대해본다.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 태그.jpg

 

 

[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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