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

전 월간 [디자인] 편집장 전은경의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
글 입력 2023.05.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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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은 전 월간 『디자인』의 편집장 전은경 작가가 지난 18년간 200여 권이 넘는 잡지를 마감하며 취재, 여행과 출장, 사람과 문화적 체험 속 책갈피처럼 끼워둔 음악과 음반에 대한 초대장 같은 책이다.

 

원고를 쓰거나 잡지를 마감할 때엔 음악을 잘 듣지 않는 편이라고, 이 책의 가장 첫 장에서 작가는 고백하지만 마감 후 교정지를 기다리는 형광등 아래나 마감을 막 끝낸 뒤의 휴식 시간을 채워준 음악은 마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앞서 소개한 첫 대목(‘마감과 음악’)에서 ‘심지어 세상일이란 마감이 있어서 제대로 돌아간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거나 ‘그래서 조금 부족해도 완벽보다는 완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갈등과 고민의 흔적, ‘하지만 겨우겨우 마감을 맞추면서, 나 자신에게 주먹질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마감노동자로서의 현실적인 감정들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나니 글에 온 초점을 둔 글쓰기 외의 시간들이야말로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에 가장 어울리는 대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피곤한 기분이 들면 음악이고 뭐고 모든 소리가 다 귀찮아질 때가 있다.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감정을 써야 하는데, 그게 힘에 부친다고 할까. 감정이 거의 바닥난 상태가 되었는데 그걸 자꾸 건드리는 게 싫을 때가 있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에이싱크』는 내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안전거리를 유지해줘서 좋다.

 

감정의 안전거리 - 사카모토 류이치

 

 

한동안 글을 쓸 땐 가사가 없는 음악 플레이리스트나 ASMR 콘텐츠를 잘 활용하곤 했다. 유튜브나 사용자 기반의 알고리즘이 잘 형성되어 있는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을 사용하면서부터 폭넓은 음악과 오디오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환경 덕이다.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1시간 안에 신나는 스윙장르부터 차분한 쿨재즈 장르까지 여러 느낌의 재즈를 들어볼 수 있었고, 3시간 분량의 빗소리 ASMR 영상이 30분도 채 안 돼 질려도 간단한 검색과 스크롤을 통해 금세 장작 앞으로,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도서관으로 배경을 쉽게 전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글 작업과 디지털 세계는 가까울수록 유해하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됐다. 글쓰기는 언어화되지 않고 흩어져있는 생각과 감정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전개하면서 또 세공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끈기와 집중력 그리고 정밀성을 요하는 일이었다.

 

숙련도와 작업 방식에 따라서도 다르겠지만 아이디어 도출부터 퇴고까지 여유롭게는 일주일이, 오로지 퇴고만을 위해서도 적어도 반나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내겐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의 사용이나 쇼츠 영상의 휘발되는 자극은 잠깐일지라도 글쓰기의 몰입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또 이후 길고도 고독한 글쓰기에 다시 잠기기 위해서는 집중도를 처음부터 쌓아야 하는 효율의 저하에도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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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 안(못) 듣지만, 각성제를 먹는 것처럼 집중과 긴장을 하고 싶어서 스티브 라이히의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을 듣기도 한다. 필립 글래스와 함께 미니멀리즘 음악의 개척자로 이름난 스티브 라이히의 대표작인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은 거의 1시간 분량이다. 반복적으로 들리는 음계를 따라가다 보면 적당한 긴장감이 생기는데 마감을 독촉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곡이 끝나기 전에 편집자의 글을 다 쓴다,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편집자의 글, 최고의 각성제는 시간 없음 - 스티브 라이히

 

 

그런 의미에서 아날로그식 플레이리스트를 만난 듯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의 존재가 반갑게 느껴졌다.

 

우선 잡지의 기자와 편집장과 디렉터로서 작가의 오랜 경험과 감각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잡지 내 콘텐츠 특유의 분절성과 그럼에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통일성을 주는 세련된 편집,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레이아웃과 디자인 등이 그러했다.

 

또 무엇보다 한 사람의 꾸밈없는 체험과 순수히 좋아하는 마음으로 차곡히 쌓아 올려진 플레이리스트라는 점에서, 그가 소개하고 추천한 음악과 음반 몇몇을 책을 덮은 뒤에도 나 개인의 기억 속에 보존할 수 있었다.

 

전은경 작가를 따라 8시간 24분짜리 음악 『수면』을 들으며 잠에 든 밤이 있었고,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라는 모토로 인내심을 요하는 ECM 음악을 들으면서는 무척 잠이 오는 음악이지만 잦은 번아웃으로 재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에 끼얹어지는 냉수 같은 매력이 있는 음악임을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앞으로는 원고의 마지막 퇴고 1시간의 결연하고도 어지러운 심정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기보다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이라는 음악을 한 번 들어보면 알 수 있어”라는 말하기를 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복합예술공간 ‘피크닉’의 대표 김범상은 이 책의 추천사에 ‘한 편의 뮤직 다큐멘터리’라는 구절을 남겼다.

 

 

그래도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인생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 차있냐는 벅찬 감정들이 올라온다. 살면서 아름다웠거나 신기하거나 슬펐던 순간에 음악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인생 배경 음악 하나 없는 것은 엔니오 모리코네 없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시네마 천국」 같은 거 아닐까.

 

인생 배경 음악 - 엔니오 모리코네

 

 

이처럼 음악을 경유하는 작가의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서사와 감정을 전달받으며 일상에서의 음악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지겨울 정도로 자주 또 많이 들은 음악은 숙성 기간을 거치면 어떤 기억보다도 선명하고 생생한 감각으로써 몸 어딘가에 남고, 찰나일지라도 음악을 통해 비로소 완벽해지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음악을 오래도록 잊지못하게 되기도 한다. 또 타인의 노랫말 위로 내 마음을 겹쳐보고 누이며 위로받고, 트럼펫과 피아노 또는 자연의 소음으로 방 안의 공백을 채우며 휴식하는, 그런 부담 없는 순간들이야말로 인간이 음악을 필요로 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를 ‘인생 배경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말과 이 책처럼, 종종 사랑해마지않은 음악들을 스크랩하거나 종이에 가볍게 적어보는 건 어떨까. 마감을 위한 성실하고도 외로운 마음에도, 나만의 인생 그래프를 따라 걸어보는 산책 같은 글쓰기에도 의미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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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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