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흔한 이별의 유일성 - 이름 없음

글 입력 2023.04.3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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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한 이별 


이별은 흔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낼 일이 너무 많다.

 

사람의 마음은 불완전해서 외로움에 거리를 해메고, 사랑하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들고 서성거린다. 관계에는 알게 모르게 파열음이 그어지고 함께를 꿈꾸던 약속들은 흩어진다.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 몸은 약해서 쉽게 노화되어 낡아버리고 종종 질병과 고통에 시달린다. 세상에는 슬퍼할 일이 왜이리 많은지.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희망과 우울을 오간다. 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인데 언제나 어렵다.


나는 왜이리 이별에 취약할까. 정이 많아서인가. 너무 쉽게 사랑을 믿고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탓일까. 얼마 전에 헬스장에서 녹초가 되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건 내 몸뚱아리 하나밖에는 없다고. 운동을 가서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지점, 그런 무게까지 이끌고 가서 마음껏 악을 지르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지곤 했다. 이별 앞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아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애써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하는 일이 현실에는 빈번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상처받을 용기를 낼 수 있어 마음에 든다. 겁먹으면서도 다시 마음을 주고 세상의 다정함을 믿고 선의를 믿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득이 없이도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리라 믿고, 다정함으로 주고받는 사랑의 마음이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리라 믿는다. 하지만 소중한 것을 만들고 나면 댓가가 따르는 법이다.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이리 마음은 뒤숭숭한 걸까. 시간을 잘 견디기 위해 오늘도 책을 뒤적거려 본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이런 관점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인생의 역사, 신형철, 2022.10, p.131


 

이 해석에 따르면 나의 마음에도 각주를 달 수 있을까. 누군가를 떠나보내면 결국 이별하는 것은 그 사람 하나가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하던 시간 속 나의 일부도 함께 죽는다. 그러니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게다가 그 순간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도 분명 그랬다. 그 사람 앞에서만 보여주는 나의 모습은 나에게도 낯선 것이여서 종종 놀랐다. 겁 많고 생각 많은 내가 그 사람 앞에서는 나의 마음에 솔직하고 후회없이 표현하고 아낌없이 믿음을 줬으니까. 누구한테도 찾을 수 없었던, 어쩌면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에 가까운 모습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찾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이별은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 관계 맺던 내가 동시에 죽는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고, 그래서 그 흔한 이별이, 진부한 사랑이야기가 각자에게는 유일한 사건이다.

 

 


2. 그래도 괜찮아



대학교에 다닐 때 수업시간에 프로이드와 데리다의 애도/리비도 개념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다. 국어사전에 ‘애도’의 사적전 의미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고 나와있는데,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애정했던 사람에게 부여했던 일종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리비도’라고 부르고, 그에게 쏟았던 리비도를 거둬들이고 새롭게 리비도를 쏟을 대상을 찾아가는 과정을 ‘애도’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사건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회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으로써의 애도를 주장한 것은 그가 정신분석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데리다는 ‘애도’라는 이름하에 누군가의 죽음(혹은 관계의 끝)을 완전히 정리하고 멀쩡해지는 것을 오히려 이상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애도의 ‘성공은 실패한 것’이고 ‘실패는 성공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애도에 성공해서 떠나간 사람을 잊고 극복하는 것은 일상 회복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일지라도 비정한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 관점에서의 애도를 실패하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몸무림치면서 그 대상이 내 안에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라고 보았다.


수업에서는 프로이트의 개념을 치유로써의 애도, 데리다의 개념을 윤리로써의 애도라고 각각 이름 붙이고 다양한 국가폭력사태와 재난 앞에 우리가 가져야하는 것은 그들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윤리로써의 애도라고 토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필요한 것은 다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가야 하니까.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성공적으로 리비도를 회수하고 또 다른 것에 마음을 주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데리다의 이론이 시사하는 바는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빠른 리비도의 회수가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멍하니 추억을 곱씹고 있어도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것. 하긴, 나에게 소중했던 존재와 나의 가장 마음에 드는 모습까지 한 순간에 죽어버리는 사건을 겪고도 단숨에 멀쩡해지는게 더 이상하니까. 그러니까 그래도 괜찮다. 어쩌면 당신의 그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바람직할수도 있다.


슬픔에 빠져있을 때는 데리다의 이름을 되뇌여 본다. 지금도 괜찮다고. 좀 더 힘들어하는게 당연한거라고 말이다. 당분간은 리비도를 회수하지 못하고 끙끙대도 괜찮다. 애써 잊지 않으려 노력해도 된다. 그렇게 나를 달래본다. 언젠가 또 좋은 날이 오겠지.




3. 이름없음



내가 가끔 시를 쓰는 마음은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으면서도 결국은 발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보물찾기 하듯이 꺼내고 싶은 마음들을 꽁꽁 싸매고 위장해 단어 사이사이 문단 사이사이 간격에 배치해둔다. 들키기를 바라면서도 내 멋대로인 해석으로 이루어진, 가끔은 나도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를 문장을 뱉는다. 무책임하게 던져놓고 서운해 하는 모순된 마음을 가지고.


몇 해 전 지금과 비슷한 마음일 때 시를 썼다. 책에서, 이야기에서, 역사에서, 그리고 내 주변에서 수많은 이별을 보던 시절이었다. 나의 이별을 극복하고(치유로써의 애도), 또 다른 이별과 아픔들을 잊지않고 기억하기 위해(윤리로써의 애도) 적었다. 시를 통해 충분히 슬퍼하고 기억하려고, 지겹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을 바라는 마음으로 적었다.


(신형철님은 위에 언급한 책 p.211에서 이렇게 썼다.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진행되는 방향의 맞은편에 마주 놓는 불이 맞불이고, 두 불이 만나 더는 탈것이 없어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맞불 작전이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다른 절망을 만들어낸다.“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흔하지만 각각이 너무나 유일한 슬픔을, 그리고 너와 나의 슬픔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슬퍼해야하고 아파해야 할 일이 많은 세상을 떠올리면서 ‘이름없음’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저 비어있는 이름에는 누구의 이름이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름 없음 1>


듣고싶은 마음이 쓰고싶은 마음에게 말했다. 

너는 문장 뒤를 껴안는 사람이라고


단어가 나무로 만들어진 종이 위에 잉크로 읽히는 날엔 

너무 배가 고파 달을 꺼내 야금야금 먹었다


내 삶에서 먼 이야기가 듣고싶어

닮은 표정을 한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구멍난 물풍선처럼 물이 줄줄 새는


긴 꿈을 꾸고나면 하릴없이 내가 미웠다

계절의 시작과 끝은 닮아있다

 


<이름 없음 2>


거리에 기억이 새겨지는게 두려웠다

사람은 종종 마음과 다른 소리를 한다 


사랑에 빠지면 자주 그 사람과 싸우고 싶었다

그럴때면 하릴없이 무참한 기분이 되곤 했다


혼자가 좋았지만 언제나 보고싶은 얼굴은 있었다

들어간 적 없는 세계에서 추방당한 느낌이었다


그날 작은 풀밭에서 우리는 오래 눈을 맞췄다

그리움이 피어나는 지점은 어디일까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죽어버리는 인간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보였다 


삶은 한 순간에 변하기도 한다 



이름 없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들에 우리는 어떤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까. 누구에게나 찾아오기에 흔하지만 각각이 유일한 아픔들에는 달리 줄 이름이 없다. 그 모든 순간들이 간단히 요약되고 정의되기를 바라지는 않아서이다. 나의 슬픔이, 당신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 각각이 유일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니 우리는 왜 그리 유난이냐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다고, 이제 좀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유일한 슬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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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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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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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별에 취약한 한 사람으로서 한줄한줄 공감과 위로가 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결국 이별은 각자의 유일한 슬픔이므로 타인과의 대화나 사랑에 대한 어떤 보편적인 이야기 같은것들로는 위로받을수 없어서 자주 외로워지고 다시 슬퍼지는것 같아요. 최근에 신형철작가님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작가님의 책이 너무 좋아서 검색하다가 인용한 부분을 타고 들어와 에디터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스스로 이제 좀 그만할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더욱 힘든 요즘이었는데 마지막 문단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싶었던거구나 싶었어요. 앞으로의 글들도 기대할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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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누군가와의 이별로 인해 마음이 뒤숭숭하기도 그런 마음이었었는데 그게 당연한 감정이라는 것, 그때의 내가 사라져버리는것같은 느낌.그래도 살아가야하는것.
      자연스럽게 그 과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지금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에디터님도 항상 행복하시고 앞으로도 글 계속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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