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 위를 나는 순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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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안 되겠지만, 나는 비행기를 많이 타본 편이다. 예전에는 등만 붙이면 어디서든 잘 수 있었고, 교통수단을 탈 때 멀미를 심하게 하는 편이어서 비행기 이륙과 함께 잠들곤 했다.
비행기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라고는 하나 속도와 다치는 정도가 비례한다고 생각해서 비행기를 탈 때마다 무서워한다. 걸어 다니다 넘어지면 무릎이 까지지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면 어디가 부러질 수도 있고, 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면 더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비행기는 일정 높이에 올라가면 비교적 안전한데 이착륙 시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에 타면 일단 소지품을 정리하고 오래 앉아 있기 좋은 자세를 찾은 뒤 비상시 대피 요령을 정독한다. 호흡기와 구명조끼 착용 안내 영상도 주의 깊게 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어폰을 꽂고 잠에 든다. 겁이 많아서 만약 죽게 된다면 자다가 죽는 편이 덜 아플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이륙 준비를 마치고 잠에 들기까지의 시간은 내게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 유학길에 오르던 날, 가족과 친구들이 공항에 배웅을 나왔다. 그중 한 친구가 동영상을 만들어서 보내 주었는데 꼭 비행기 안에서 보라는 친구의 말에 휴대폰에 다운로드만 해 놓았다.
혼자서 비행기에 타고 출발하면서 영상을 보았다. 그동안 찍은 사진들과 내게 전하는 글귀들로 만든 재미와 감동을 겸한 영상이었다. 그렇게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몇 년이 될지 모를 타지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며 열한 시간을 보냈다.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없는 이륙은 그때가 유일했다.
몇 년 전 한참 우울했던 시기에 홀로 체코 여행을 떠났다. 다음은 여행에서 돌아오며 쓴 일기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보낸 프라하로 향하는 비행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보낸 파리로 향하는 비행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
어제보다 나은 내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
괜찮은 오늘과 내일의 두려움 사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이 순간
프라하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이대로 죽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난 아직 어리고 못 해본 게 많은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거의 미술관만 돌아다닌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여행이었나 보다.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여행이 즐거웠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돌아갈 일상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유학 생활을 끝내기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의 비행은 좀 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밤 풍경은 처음으로 슬펐다. 원하면 볼 수 있었던 풍경이 갑자기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풍경이 되었다. 이별에 섣불리 그리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재회를 앞두고 들뜨기도 했다.
여태껏 언제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했다면,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이륙의 순간을 맞이했다.
몇 주 전에는 홍콩에 다녀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피 요령 안내문을 정독하고 성찰의 시간을 갖는데 나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대로 죽기 억울해서가 아닌, 돌아갈 곳이 있어서였다. 나는 건강하게 여행을 마치고 사랑하는 이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생각보다 비관적인 일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다 보면 삶을 대하는 태도의 방향성이 잡힌다. 어쩌면 쫄보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주기적으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에 감사하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발을 디디면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반긴다. 환영받으며 시작하는 삶의 다음 장을 오늘도 기꺼이 살아내야지.
[김지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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