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국형 SF의 최전선, 미래과거시제

일상에서 세계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의 세상
글 입력 2023.04.0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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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SF의 입지는 서구의 그것만큼 탄탄하지 못하다. 외계행성이니 미지의 존재니 하는 소재들은 대개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이 큰 흥행을 끌지 못하는 것이 그런 이유였다. 반면 <인터스텔라>나 <테넷> 등의 성공은 그럴싸한 '과학'적 근거가 실재감을 불어넣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데 있다.

 

배명훈 작가의 <미래과거시제>에는 SF의 흥행과 부진의 두 속성(공상 & 과학) 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엮어낸 단편들이 수록되어있다. 따라서 마니아가 읽어도, 혹은 장르 문외한이 읽어도 전혀 문제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나는 둘 다 아닌 적당한 향유자에 속하는 편으로, 국내 작가의 SF소설은 처음 접해보았다. 이전에 읽었던 SF는 모두 서구의 유명작가들이 펴낸 것들로, 그것들을 읽으면서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공허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치관이 달랐고, 문화가 달랐고, 성장환경이 달랐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주제를 나는 똑같은 양질의 감정을 이입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래과거시제>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첫 국내 SF소설이다.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상상력을 그 자신이 직접 정제한 글로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은, 타인에 의해 번역된 글을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탈리아 피자나 중국의 마라탕이 국내로 들어와 한국인 입맛에 맞게 새롭게 변형되었듯이, 로컬함이 더해진 SF는 원전과는 다르고도 특별한 성질을 갖춰 국내 독자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

 

특히나 로컬함이 돋보이는 단편 3편을 위주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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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공기매개 감염의 위험성을 깨닫게 된 2020년의 한국, 시간이 지나 가장 침이 많이 튀는 파열음이 사라진다면? COVID-19의 유행이 어떻게 미래 세상을 바꾸게 될지 언어적 측면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개인은 세계와 분리될 수 없고, 세계는 개인에게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의 세상에서 진실이 격리되던 것을 우리는 많이 봤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던 어느 날, 나는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모임을 갖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감상했다. 그런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나도 그게 익숙했다.

 

그래서 그런가, 작금의 화제를 작품에 끌고 와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인지 유쾌하게 그려내는 이 작품이 반가웠다. 없는 척하기엔 너무나도 중대한 사건이자 시간이었지 않은가? 지금도 세상의 방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난 미래에 이 글이 더욱 반가울 것이다. 특히 실제로 있었던 일(컬링 경기 중단, 야구 룰 도입 등)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다 보니 기록으로서의 가치까지 더해지는 듯 하다.

 

제목의 뜻을 파악하기 전 나는 오타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인쇄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곧이어 내 책만 잘못 뽑힌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조금 지나서 "차카타파의 열망"의 뜻을 깨달았다. 부드러운 발음으로는 도저히 전할 수 없는 강렬한 마음, 공기를 타고 당신의 살결에 닿는 그 온기. COVID-19의 여파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 세계관이라는 것을 느꼈다.

 

주인공은 이 2020년의 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순히 ㅊ,ㅋ,ㅌ,ㅍ의 파열음이 지저분하게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에 닿는 일련의 마음들이 낯설어서일까? 파열음 없는 세상에서 파열음을 연습하고 내뱉는 이는 마음속에 어떤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단순히 물리적, 가시적 변화만 상상하던 중 언어 체계의 변화로 사람 사이의 끈 혹은 감정이 느슨해질 수도 있다는 예측은 꽤 설득력 있었다. 사랑은 물론이요, 분노도 지금처럼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시원치 않을까!

 

 

 

<인류의 대변자>


 

어떤 의미로, 한국이 아니면 절대 나올 수 없는 SF다.

 

서울 롯데타워 위로 외계인이 정박했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외계인에게 인류를 대표해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이들이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비록 힘 있는 자들이 위험을 피하고자 말단들에게 떠넘긴 일이라고 하여도, 인류 대부분은 중간의 사람들이다. 부처와 범죄자 사이의 어딘가, 부자와 거지 사이의 어딘가, 천재와 바보 사이의 어딘가.

 

가장 많은 이들에서 선출된 평범한 이들이 묻는다. 비행선 좀 옮겨줄래요? 그런데 이날은 수능이어서 한발짝도 움직이면 안 되겠어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명령도,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간청도 아닌 단순한 요구.

 

'만남'의 기본형식은 동등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은 조금 민망한 구석이 있다. 눈을 어떻게 봐야 할 지 모르겠고, 발이나 바라봐야 하나 싶고. 대체 어딜 봐야 하나? 어떻게 보면 외계인과의 첫 조우에 국한할 이야기가 아니라, 모르는 이와의 일대일 대면에서의 불안과 민망함을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다.

  

뉴욕이나 런던의 것이 위험천만하다면, 한국의(혹은 배명훈 작가의) 외계인 불시착은 유쾌하다.

 

 


<임시 조종사>


 

책을 읽으면서 이만큼 웃은 적이 있나 싶다. 모르는 단어를 핸드폰으로 톡톡 검색해가며 느릿느릿 글을 읽는데도 그런 번거로움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극소수 존재하는 로봇 조종사가 사기 취업을 당해 영웅이 되는 이야기, 라고 요약하면 될까? 화제가 되는 아마추어소설만큼 유머 가득하면서도, 글의 흐름과 형식은 프로의 것이다. 내가 책에서 이 작품을 단연 으뜸으로 꼽는 이유가 되겠다.


사실 가장 크게 주목했던 점은 글의 형식이다. 판소리 형식의 SF라니! 과거와 미래의 만남, 전통과 과학의 기묘한 조화, 옛것의 틀에 담긴 새로운 내용물. 익숙한 판소리가 공상과학과 만나자 미래지향적인 발걸음이 되었다. 형식도 SF가 될 수 있구나, 이 글을 읽으면서, 혹은 머릿속으로 들으면서 깨달았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를 발전시켜 한국형 SF를 닦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형식과 내용의 조화뿐이 아니다. 보빈 레이스를 날개처럼 두른 로봇, 한자로 말하며 양식을 먹는 한국인, 외국인(?) 감독하에 과거 응시하듯 치르는 면허... 감히 스토리가 진행되는 배경이 어느 권역의 나라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무국적(無國籍)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한때 유행한 신조어 '병맛'을 연상시키는 듯하면서도, 철저히 계획적이고 세밀하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쓰는 데 8개월이 걸렸다는 작가의 말이 놀랍지 않다. 마냥 재미있다가도 전설의 조종사 공손지의 이야기나, 전쟁 막바지 들풀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권선징악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간다.

      

은연중 이 장르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임시 조종사>를 먼저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당신이 아는 것은 수많은 갈래 중 하나일 뿐이며 당신이 거부할 수 없는 재미가 분명히 있다.

 

*

 

SF의 묘미는 여러 가지 세상을 모두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먼 과거부터 아주 먼 미래까지, 새로운 책을 펼칠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떤 것이 눈앞에 펼쳐질지 기대하게 된다. 이집트일 수도 있고, 조선일 수도 있고, 3000년의 목성일 수도 있다. <미래과거시제>, 딱 적절한 제목이 아닌가?


 

"당신도 잘 살아, 어떤 세상에서 깨어나든. 그리고 잘 자, 부디." 

 

- 알람이 울리면 中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엔 이런 대사가 있다. 당신이 어떤 SF 작품을 만나게 되든, 그 세상을 잘 살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좋은 꿈을 꾸길. 어떤 삶과 꿈은 당신을 아주 먼 세상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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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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