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끔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해 [문화 전반]

헤르만 헤세 <크눌프>와 TV 프로그램 [잠적]으로 본 삶
글 입력 2023.04.0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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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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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 속 크눌프는 방랑자다. 그에게는 목적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착지 또한 정해진 게 없다. 그저 발이 닿는 대로,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나오는 집과 자연과 풀잎이 모두 그의 생활이자 삶의 일부가 된다. 


말 그대로 바람과 같은 삶을 산다. 혼자서 다니는 길에는 조력자도 없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가 가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고 반긴다. 그래서인지 돈을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숙박 시설과 정성이 깃든 음식은 언제나 그를 따른다.

 

 

 

[잠적]과 <크눌프>에 나타난 ‘잠적’하는 삶



잠적의 사전적 의미는 종적을 숨기는 것이다. 그에 걸맞은 컨셉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인 [잠적] 역시 연예인의 삶에서 3일간 벗어나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프로그램의 취지와 걸맞게 매주 연예인이 한 명씩 등장해 혼자서 원하는 곳을 가고 원하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한적한 숙소에 자리 잡아 혼자 밥을 먹거나 숲길을 걸으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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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가 사는 삶 역시 ‘잠적’하는 삶과 비슷하다. 다만 그 시간의 ‘유한성’에 따라 연예인의 잠적과 크눌프의 잠적은 다른 의미가 있다. 이들의 삶은 떠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만, 크눌프의 경우 떠남에 대한 의미는 ‘무한함’이다. 거주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갈 곳도 없는 그에게 삶은 그 자체로 평생의 여행이다. 연예인에게 여행의 의미가 화려함과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3일간의 달콤한 휴식이라면 크눌프에게는 그저 일상인 것이다.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에도 차이가 있다. 떠난 곳에서 돌아가 다시 본업을 해야 하는 처지와는 달리, 어떠한 구속이나 속박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계획 없이 사는 삶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숙고와 직업윤리에 대한 의무감은 언제나 따르는 숙제라면, 크눌프에게는 흘려보내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소원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것



일상에서 벗어나 잠적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그 속에서의 삶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한다고 해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는 저마다의 고충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겪어나가야 할 생활이 있고 사람과의 복잡한 관계도 있다. 


사실 크눌프의 삶도 여러 사람의 일상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방랑자 생활 이전, 그는 타인에게 배반당한 아픔이 있었고 남의 집에 입양된 아들을 가까이서 대할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도 품고 있었다. 방랑자 생활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환대하며 좋아했다고 할지라도 사회의 시선에서 본다면 그는 돌아갈 일상과 거처가 없는 사회의 부적응자로 여겨지기 쉬울 것이다. 


 

“소원이란 건 재미있는 면이 있어. 내가 만일 지금 이 순간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멋지고 조그마한 소년이 될 수 있고, 자네는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걸로 섬세하고 온화한 노인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걸. 그러고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눌프는 자신이 선망하는 누군가로 변하는 삶을 원치 않는다. 멋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마음속에서 언제나 하는 상상이지만, 그것이 내가 아닌 타인이 되는 삶이라면 그 삶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스스로가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랐을 뿐 아예 다른 이의 삶 속에서 살기를 원한 적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처럼 크눌프의 삶 역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이다. 비록 그가 사는 삶이 남들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가 선택한 삶이기에 그리고 사람의 삶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 말이다.

 

 


크눌프의 삶: 대리만족의 형상화



크눌프의 종말은 폐결핵에 걸리면서부터이다. 의사가 치료를 받기를 권했지만, 그가 간 곳은 병원이 아닌 자신의 옛 고향이었다. 추운 겨울 끊임없이 길을 걷던 도중 그는 하나님을 만나 지금까지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신과의 대화를 통해 젊은 날에 겪었던 상처와 슬픔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의 삶과 화해한다. 신이 크눌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줘야만 했다.”

 

 

마침내 크눌프는 모든 삶을 뒤로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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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짊어져야 할 책임과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 혹은 그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사실 후자의 경우는 지금의 삶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직위, 가족 등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크눌프의 삶은 대리만족의 형상화다. 상상이나 꿈에서나 있을 법한 자유로운 삶을 보여준다. 실제로 헤세는 크눌프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바쁘고 여유가 없는 현대인 모두를 대신하여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사는 삶을 통해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편견이 아닌 다름의 인지는 따뜻한 시선에서부터



TV 프로그램 [잠적]의 경우 앞으로의 계획이나 어떤 배우 혹은 가수로 남고 싶은지에 대해 대답하며 마무리된다. 그 후 이들의 삶은 일상으로 복귀하여 또다시 시작된다.


반면 크눌프의 삶은 완전한 종말을 맞이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없었던 그에게 방랑은 그의 삶 자체였으며 여행이고 일상이었다.


결국 <크눌프>가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와 따뜻한 시선이다.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을 경험할 수는 없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겠지만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의 사정과 인생이 담겨있다. 따라서 그들의 삶에 대해 그 누구도 평가의 잣대를 세워서는 안 된다. 인생에는 하나의 방향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더욱 중요해졌다. 


보통 사람처럼 직업과 사람 간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상을 살아가며 하루를 완성해도 좋고, 어떠한 구속과 책임이 없는 곳에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도 좋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가 하는 순간의 선택과 경험으로 결정되는 것이므로 다수가 선택한 길만이 올바른 방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다수가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소수의 사람에게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에 이들에게 작은 응원과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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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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