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안 한가운데서, 강화길 '복도' [도서/문학]

강화길의 '복도' 다시 읽기
글 입력 2023.03.3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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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거울의 각도를 달리해 우리의 눈이 닿지 않는 뒷모습도 볼 수 있다. 나에게 소설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사회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혹은 이미 알고 있지만 자각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를 통해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돕는다.

 

내게 그런 거울 같은 작품이 있다. 바로 강화길 작가의 「복도」다. 처음에 계간지를 통해 작품을 접했을 때 흡입력과 시의성에 놀랐다. 2021년도에 발표되었지만 현재에도 문제가 계속되고 있어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자기 인식


 

우리가 나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를 봄으로써, 우리는 시선을 던지는 주체인 나를 자각한다. 모든 주체는 자기 정의를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주체는 불편한 것들을 만들어내 타자와 연결하고 그들을 타자화시켜 밀어낸다.


 

물론 네가 이런 것까지 다 이해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강화길의 「복도」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너’에게 말을 거는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은 1단지에 속해있지만, 주인공이 사는 100동은 임대아파트이기 때문에 1단지에도 2단지에 속하지 않는 위치에, 판자촌 근처에 놓여있다.

 

주인공의 남편은 분리수거장에서 이방인 취급당한다. 타자화된 존재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진다. 마치 소설 속 100동만이 아파트단지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나’는 2단지 101동 119호에 명확히 속해있는 ‘너’를 인식함으로써 타자화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진 자기 자신을 명확히 인식한다. 즉 타자화시키는 자를 ‘타자화’한다.

 

 

 

공간



  

사실 나는 모든 것에 신경을 썼다. 예민했다. 다만 그 공간이 유독, 내 마음을 증폭시켜줬을 뿐이다. 그래 증폭. 작년 겨울, 이 집에 이사 온 직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불길하게 흔들리던 마음. 금방이라도 터질 듯, 잔뜩 부풀어오른 나.

 

 

임대 아파트인 집과 집을 엿보는 낯선 존재에게 주인공은 남편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인물 간의 성격 차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젠더적인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집은 1단지 밖에 있고 판자촌에 더 붙어있을 뿐 아니라, 밖에서 안을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고 지도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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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과 우리 집 사이의 길도 너무 좁았다. 차와 사람이 오가는 도로라기보다는 그냥 어떤 건물의 길고 좁은…… 그래, 복도 같았다.

 

 

복도라는 공간은 다수와 마주칠 수 있는 곳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혹은 건물 안에 있는 통로로, 복도는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폐쇄적이다. 누군가와 충분히 마주치거나 부딪칠 수 있는 그런 공간에 주인공의 집은 놓여있다. 그런 공간적 특징은 크나큰 불안감을 몰고 온다. 


주인공은 매번 배달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네. 여기에 살고 있어요. 저희는 여기에 있답니다.” 라고 전화를 걸야야 한다. 2단지 입주가 시작된 후로 택배기사들은 주인공의 집이 아니라 2단지에 물건을 배달한다. 주인공은 택배를 찾아오기 위해 2단지로 향하고, 101호 주민은 주인공에게 “뭔가를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지도에 등록되지 않아 생기는 불편이 주인공에게 더 날카롭고 예민하게 와닿는 이유는, 보이지 않게 치움으로써 존재를 지우는 방식이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작용하던 타자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실존을 위협당하고, 비가시화되며, 이러한 배타적인 구조 때문에 발생한 문제는 주인공 개인에게 책임지워진다. 

 

 

 

불안은 사람을 어디로 내모는가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기대 층위를 만들고, 기대 층위의 해결을 지연시키거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해결함으로써 긴장감을 형성한다. 이는 작품 전체에 감도는 불안감을 증폭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주인공의 입장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누군가 작정하고 안을 들여다보기로 한다면 집안 거실까지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두꺼운 블라인드를 설치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면 바깥의 누구도 우리를 절대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고, 안쪽의 우리 역시 안전할 것이다.

 


 

“……밖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그가 베란다의 블라인드를 확 걷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건너편에서 뭔가가 일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화단 건너편, 우리 집 블라인드가 확 걷혀 있었다.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누군가 있었다. 배회하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정말로, 정말로 진짜였다.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던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있는 쪽으로 말이다. 아니, 너와 내가 있는 곳으로.



누군가의 정체는 끝까지 해결되지 않으며 모호하게 남는다. 일종의 맥거핀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집을 쳐다보는 누군가의 정체나, 누군가가 정말 집을 쳐다보고 있는지가 아니다. 사회나 구조로부터 위협받는 주인공이 겪는 불안감이 더 중요하다. 작품은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상의 불편과 불안을 서스펜스를 활용하여 전달하여 세상이 누구를 혐오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몰고 있는지, 그 배제가 얼마나 섬뜩한 것인지, 그렇게 형성된 불안과 공포가 사람을 어떻게 내모는지를 보여준다.


불안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택배를 찾으러 가다가 아이의 뒤를 쫓는 척한다. 아이는 크게 불안해하며 누가 따라온다고 소리친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저 내 물건을 찾으러 왔을 뿐인데, 어느새 이곳의 침입자가 되어 있었다.” 주인공은 아파트라는 공간에 속하지 못한다. 그는 상황을 ‘극복’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오해를 이용해 뚜렷하게 속할 자리가 있는 아이를 압박함으로써 구조에 순응하지 않고 타자화된 자신과 상대의 위치를 전복시킨다. 이러한 전복을 통해 임대아파트에 살지 않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 집에 사는 아이에게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을 전달한다. 주인공의 전복을 꾀하려는 복수와 같은 시도는 섬뜩하게도 약자에게 향한다. 그가 배제되었던 방식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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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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