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워더링 하이츠의 방출되고 가라앉은 상상력 - 도서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글 입력 2023.03.3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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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론테 자매의 현실을 산책하다


 

책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브론테 자매의 역사적 자료와 편지들을 묶은 책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브론테 가문의 '인간'들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권할만한 책이다.

 

책은 일러스트 레터 시리즈라는 기획 아래에 완성되었다. 책을 리뷰하기 위해선 이러한 기획의 특성과 구현 방법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같은 기획에서 완성된 <반고흐, 프로방스에서 보낸 편지>을 비교하는 것이 기획과 책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우선 '일러스트' 부분을 비교하자면, 브론테 자매의 '일러스트'는 반고흐의 '일러스트'와 다른 느낌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반고흐는 유명한 화가고, 브론테 가문의 사람들은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화가는 아니었다. 사용할 수 있는 '삽화'의 양 자체가 다르고, 브론테 자매는 편지에서 고흐처럼 자신의 작품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지도 않았다(사실 편지의 이런 사용 자체도 그들의 삶의 양식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반고흐의 일러스트 레터에서는 주고받았던 편지와 그와 관련된 그림들을 첨부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반면, 브론테 자매의 일러스트 레터에서는 당대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그림들을 첨부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브론테 자매의 일러스트 레터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삽화'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역시 '자료의 양'에서 기인한 것이다.

 

반대로 이 책이 '브론테 자매'의 일러스트 레터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책이 전체적으로 브론테 가문 사람들의 역사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특정 인물과 관련된 자료가 지분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특정 인물이란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다. 샬롯은 사후 그 아버지의 부탁으로 절친한 친구인 게스켈이 전기를 쓰기도 했고, 다른 자매들과 달리 부지런하게 기록을 남기고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그들이 없는 세상'을 탐색했었다. 이에따라 상대적으로 샬롯의 이야기가 중심에 서는 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자매들'의 책이 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강한 바람을 홀로 서서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처럼, 브론테 가문의 사건과 이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재능있는 작가들의 이야기는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샬롯만이 더 많은 기록을 남겼고, 책이 그녀에 대한 기록을 충실히 옮긴다는 것 자체가 이 가문의 어떤 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이 이 책을 좀 더 '브론테 가문'의 느낌을 잘 살렸다고 해야할까?

 

누군가 나에게 이 책에서 어떤 사람들을 보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사람들을 봤어요. 첫 번째로는 사회적인 시선이에요. 19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도입으로 경계마저 불분명해진 계급, 젠더, 도덕 속에서 전능감과 박탈감을 동시에 느끼는 인물들의 모습이 보여요. 두 번째로는 개인적인 시선이예요. 워더링 하이츠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것처럼 살아가야 했던 브론테 가문의 네 아이가 겪었던 비극과, 그로 인한 그들만의 인간성이 보여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짐작했겠지만, 나는 후자의 시선에 깊게 매료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개인의 취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샬롯의 제인 에어와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은 종종 비교선 상에 서는데, 나는 이런 비교가 자신을 돌아볼 흥미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후술하겠지만 브론테 가문의 샬롯은 '그들이 없는 세계'를 탐험한 사람이고, 에밀리는 '그들이 없는 세계'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어떤 인상을 남겼는가에 따라 그들의 삶은 다르게 읽힐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책을 좀 더 사회적 시선으로 읽었다 해서 반드시 제인 에어가 더 재밌을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이 사회적 시선과 개인적인 시선은 브론테 가문 전체를 휩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런 흥미로운 삶을 깔끔한 언어로 완성한 저자의 역량이 많은 부분 기여했다. 책의 저자는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쫓고, 첨부된 자료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만큼 적절한 양으로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순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역사의 생생한 근거처럼 사용되고 있다.

 

아무튼 책의 흡입력은 정말 대단하고, 나 역시 이 책을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갔다. 책을 받고서 늦게 이 글을 쓰게 된 변명을 좀 해보자면, 책을 읽고 나서 제인에어와 워더링 하이츠를 읽고 싶다는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진심으로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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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워더링 하이츠의 방출되고 가라앉은 상상력


 

이 흥미로운 책을 어떻게 리뷰할까 고민하다가, 역시 각 인물에게 받은 인상을 적는 것이 재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개인적으로 그것이 좀 더 '브론테'를 이해하는 방식답다고 생각한다. 브론테 가문은 시골에서 어렵게 자란 패트릭이 신학교를 다니면서 브론테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부터 시작된다. 문명에 가까운 가정환경에서 그를 신학의 길로 이끈 것은 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경 때문이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엄격한 성직자였고, 그와 비슷하게 신실한 신앙을 가진 마리아에게 반해 혼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새로 부임하게 된 교회는 아주 외진 곳, 황량한 곳이었다. 요크셔의 황야는 하수도가 없고 물이 오염되어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하워스의 평균 수명은 25세였고, 젖먹이의 41퍼센트가 첫 돌을 넘기기 어려웠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 마리아 브론테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24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패트릭은 이후로 아이들과 식사하는 대신 방에서 혼자 식사하는 등 정서적인 교류를 많이 하지 않게 된다. 1821년 어머니가 죽었을 때, 아이는 총 여섯이었고 이 중 첫째인 마리아 브론테가 나이에 맞지 않은 어른스러움으로 가정을 돌봤다고 묘사된다.

 

하지만 첫째인 마리아 브론테와 둘째 엘리자베스 브론테는 당시 열악한 학교생활에서 병들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10살 남짓한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1825년 마리아와 엘리자베스가 사망했을 때, 패트릭은 홈스쿨링을 선택한다. 이후 브론테 가문 특유의 내향성은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네 명의 아이들은 가정교사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성적 호기심을 물려받아 풍부한 교양 상식을 쌓지만, 외부인들에게 은근한 경멸을 느끼는 등 거의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된다.

 

브론테 가문의 아이들은 외부를 탐색하는 대신 자신들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을 선택한다. 샬럿, 브론웰, 에밀리, 앤은 외부세계에서 인상 깊은 것들을 가져와 자신들만의 가상의 왕국을 만든다. 이러한 이들의 상상놀이는 이후에 문학적 능력을 배양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하나의 왕국이나 성이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이들이 세상 밖을 나가게 되면서 이들의 상상세계는 위협에 처하게 된다. 브론웰은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지만, 결국 방탕한 생활로 돌아와 쭉 이들을 실망시킨다. 남은 자매들은 당시 교육받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지만 가난한 봉급과 은근한 차별에 시달린다. 이후 브론웰은 제대로 된 직장도 가지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방탕한 삶을 살면서 촉망받던 아들에서 집안의 짐이 된다. 후에 브론웰이 사망했을 때, 슬픔 사이에서 미묘한 기쁨이 서려 있는 것은 이들의 관계가 어린 시절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브론웰의 비극이 그가 34년 그린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과 누이들을 함께 그려놨다가, 자신의 모습이 그림의 균형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여 그 자신만 지워버렸다. 이 작품에 남아있는 슬픈 판단대로, 그의 삶은 브론테 가문에서 균형을 깨는 것으로 여겨졌고, 결국 그는 그의 누이들이 글을 쓰는지조차 몰랐고, 그들을 위한 삽화마저 그릴 수 없었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에서 '제인 에어'와 '워더링 하이츠'가 탄생했다. 이 글을 쓰는 내가 막내 앤의 작품과 자료를 읽지 못해 이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두 작품에서 엮이는 공통적인 주제는 '내버려진 아이들'과 '죽음'이다. 이러한 코드는 이들의 삶에서 분명히 반복되는 것이다. 우선 이들의 작품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는 -최소한 정서적인- 부모가 부재한다. 어머니를 아주 어린 나이에 잃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만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이들은 '상상 세계'속에서 만족을 찾고자 했다. 브론테 자매의 작품들이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고립된 이들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세계가 환상의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들의 작품을 다시 읽으면 새로운 면면들이 보인다. 이들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버려진 존재처럼 묘사된다. 그들은 끔찍한 환경에서 학대받고, 의지할 따뜻한 어른이 부재한 곳에서 생활한다. 제인 에어는 고아이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학대 속에서 서로 동일시한다. 이런 아이들을 중심으로 파괴와 죽음이 떠다니는데, 헬렌이 죽거나 버사와 로체스터의 비극,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죽음을 통해 다시 만난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두 소설의 전개와 끝은 매우 다르다. 제인 에어에는 기독교적 정신으로 무장한 초라하지만 당당한 제인이 주인공이다. 이는 상당히 현실의 샬럿과 비슷하다. 그녀는 자매 중 가장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였으며, 유일하게 결혼도 했다. 그녀의 애정사를 들여다보면 로체스터와 버사의 이야기는 묘하게 읽히는 면이 있다. 제인에어에는 당시 샬럿이 느낀 사회와 차별, 그에 맞선 반항심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워더링 하이츠는 캐릭터의 설정부터 시작해 전개 구조까지 굉장히 원시적이다. 에밀리는 조용하고 지적인 여성이었지만 여러 차례 주변인들은 그녀가 거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제인에어가 '바깥으로 나가는 이야기' 였다면, 워더링 하이츠는 '안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제인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만,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황야의 언덕에서 떠나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그곳을 떠돈다. 에밀리 역시 밖에서 안을 영원히 그리워하고, 샬롯과 다르게 그녀 스스로 침잠했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로맨스는 '그들이 없는 세계'를 떠나지 못한 그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했던 사랑은 어떤 이성적인 합일을 위한 사랑이라기보다 동일한 존재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차별과 규범, 도덕적 원리원칙을 떠올렸던 제인과 다르게, 어떤 도덕적 원리를 벗어나 -거의 근친상간으로 보이는 묘사로- 자신만의 둥지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위선적으로 보일 만큼 갑갑했던 당대 영국에 그녀의 글이 미친 사람의 글로 읽힌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에밀리는 결국 워더링 하이츠에서 죽었다. 샬롯과 다르게, 그녀는 많은 것을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3. 나가며


 

반고흐 때도 그렇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비슷한 나이에 '일러스트 레터' 시리즈를 읽고 있다. 브론테 자매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을 때 글을 썼고, 그러한 이유로 그들의 글을 읽는 것은 정말 독특한 경험이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것과 같다. 작품의 어떤 부분에 열광한다는 것은 수용자의 어떤 부분이 링크된 것과도 같다. 이 책의 경험은 그래서 모두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에게 샬럿은 외부로 나가는 이고, 에밀리는 안으로 돌아가는 이다. 샬럿의 세계는 분리적이었고, 에밀리의 세계는 자폐적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그들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면면들이 브론테 자매의 삶과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어느 부분을 콕 짚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두 모습 모두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들의 책이 명작으로 회자되는 것은 이런 진정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리뷰에 쓰지 않은 많은 연상이 있지만, 그런 부분들은 독자 개개인에게 맡긴다. 나에게 이들의 삶은 거친 황야에서 바람을 받아낸 버려진 아이들이 바깥의 연을 좇거나 집의 구석에서 웅크린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들의 삶은 비극에 가까웠지만, 그보다 더 빛나는 무언가가 작품 속속들이에 숨어있는 것 같다. 어느 면에서 보건, 그들에게는 강렬한 충동과 열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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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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