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레드와 청바지

글 입력 2023.03.2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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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은 제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할 다짐에서 시작되었어요. (웃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이 공연은 모두 그 애와의 추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드레스코드인 레드와 청바지도, 그 언젠가 그 애와 제가 전시회를 보러 갈 때 맞춰 입었던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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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글을 썼어요. 저는 노래를 불렀죠. 허구한 날 사랑 노래만 부르는 제 옆에서, 그 애는 되게 다양한 글을 썼어요. 법의 그늘에 가려져 혼인 신고를 못 하는 미혼부의 이야기, 몸 구석구석이 고장 나서 완전히 부서질 때를 홀로 기다리는 로봇의 이야기, 아파트에 살지 못해 학교에서 차별받는 어린아이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했던 건, 죽은 애인을 살리기 위해 복제로봇을 만들었지만, 결국 로봇은 로봇일 뿐, 자신이 사랑한 그 애인이 아닌 걸 받아들이며 그 로봇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이야기였어요. 그 주인공은 더 이상 이 세상 어디에도 애인이 없다는 걸 받아들여요. 이 세상에 설령, 평행우주가 있어서, 다른 세계에 그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한 사람이 아닌 걸 깨달았으니까요.

 

참 심오하죠? (웃음) 근데 저는 이 글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요. 마음이 아프고. 근데 이 글을 읽으면서, 죽음을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간직하면, 평생 그 애는 내 속에서 살아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래서 전 그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는 어차피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시작하고, 그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다면, 남은 사람이 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게 해피엔딩 아닐까?’ 허구한 날 사랑 노래만 불렀다는 사람이, 오만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고 그랬어요. 사랑을 향유하는 나 자신에 취해서.

 

흠흠. 이런 제 감상에, 친구는 가타부타 별말 얹지 않았어요. 원래 작품이란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그래서 아마 그 애는 근 몇 년간 제 모습을 지켜보며 웃지 않았을까요. 너 그렇게 말한 거, 다 허세일 줄 알았다, 마음껏 놀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들을 수 없었지만. 맞아요, 그건 다 허세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해피엔딩일 수 있겠어요. 저는 그 슬픔을 헤아리기에 너무 얕은 사람이었던 거죠. 몇 년간 저는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잠에 빠져 지냈습니다. 잠에서 깨면 멍했고, 가끔 울고, 또 가끔 웃었는데. 웃을 때는 그 애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쿡쿡 쑤셨어요. 기쁜 건 다 걔랑 같이했는데, 나 혼자만 기뻐도 될까? 나 혼자만 행복해도 될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제대로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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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딱, 어느 순간, 아까 이야기한 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저도 제 마음속에 이제 그 애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 애를 내 품에 넣고 다녀야겠다, 이제 내 품에서 영생의 존재로 남겨야지, 이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발매한 앨범이 이번 3집입니다. 매일 사랑 타령만 하던 애가 갑자기 심오한 얘기를 한다 싶었죠? 왜냐면 제 안에는 이제 제 친구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짐했어요, 행복하기로. 혼자 행복해지는 것 같아서 완전한 배신인가 싶은데, 또 제 안에 제 친구가 있으니까 완전한 충성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제 손으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기로 다짐했습니다. 바로 우리 함께하는 이 공연!

 

언젠가 레드와 청바지를 우리에게 비유하자면, 사랑 노래하는 제가 레드고, 바다같이 드넓은 청색이 그 애 일 거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애가 쓴 모든 글이 드넓은 사랑이란 걸 알아요. 제가 언제나 그 애를 간직하며 머물러 있는 청색 바다이고, 그 애는 바다의 심해 깊은 곳으로부터 널리 유영할 레드인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곡 들려 드릴게요. ‘죽음도 사랑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인생에 쉼표가 찍히게 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겪어 본 모든 사람에게 글을 바칩니다.

트리트먼트라고 하기에는 글이고, 단편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비유와 상상력을 빌려 하는 조금 긴 위로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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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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