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꽃씨를 하나씩 심었어 - 보이체크 인 더 다크 [연극]

글 입력 2023.03.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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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또 혜화다. 시간이 넉넉해 일부러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천천히 걸었다. 시청 근처로부터 사람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왔더니, 한산함이 참 좋았다. 오늘의 연극이 기다리는 링크아트센터로 걸었다. 여전히 넉넉하게 도착한 링크아트센터는 어딘가 익숙한 곳이다. 연극 관람 후기를 모조리 아트인사이트에 올리곤 하기에, 한참 뒤져보았지만 찾아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구 동양예술극장에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연극 '새들의 무덤'을 보러 왔었구나.

 

보이체크 인 더 다크, 어둠 속의 보이체크라. 제목에서 비극의 냄새가 난다. 전쟁 시대, 사회로부터 한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그리는 비극 작품. 본 극은 게오르그 비휘너의 희곡 '보이체크'를 각색한 작품이라고 한다. 시간이 없어 원작의 개요를 훑었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하여 쓰였다고 하는데, 개요가 전하는 분위기만으로 등줄기가 송연해진다.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

 

원작 희곡이 쓰인 시점이 1800년대이니, 극의 시간대를 그쯤이라고 해두자. 전운이 감도는 시대, 주인공 보이체크는 징집된 군인이다. 태생이 선하고 유약한 보이체크는 불안하고 어렵기만 한 자신의 일상을 마리의 노래로 달래곤 한다. 마리는 캬바레의 밤가수이다. 보이체크도 마리도, 스스로 원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마리는 돈이 궁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상 위에 공허한 눈빛과 어스름이 묻은 목소리로 노래하지만, 관객들, 더 정확히는 군인들은 그녀의 노래를 뒷전 배경음악으로 깔아두곤 떠들어 젖힌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면, 사내들은 마리에게 꽃을 던진다. 꽃을 바치는 그들의 눈은 웃고 있지만, 그것이 마리의 노래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단 한 사람, 보이체크를 제외하고서는, 그녀에 대한 추앙은 그저 추파에 지나지 않은 것만 같다. 그러나 보이체크는 그런 꽃 한 송이 마련할 돈마저 없어, 대신하여 강가에 꽃을 심는다. 꽃씨를 하나씩 심고, 이듬해 봄이 되어 피어나면 자신도 마리에게 한 아름 바치리라 설렌다.

 

마리는 그런 그가 궁금하다. 노래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딘가 슬프게 느껴졌다는 보이체크에게 마리는 마음을 열었다. 보이체크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노라 망설이지만, 마리는 영원히 변치 않고, 어떤 순간에도 꾸준히 사랑하는 그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시간과 전개는 빠르게 흐르고 두 사람은 결혼해 아이를 가진다. 아직 강가에 뿌려둔 씨앗이 꽃으로 맺었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 한젤이 태어난다. 순수한 사랑, 변치 않는 마음만으로 살아보리라 다짐한 두 영혼에게 아이는 꽃처럼 피어나 매달렸다.

 

꽃 하나 살 돈도 없던 청년과 돈이 궁해 밤가수를 하던 여인, 두 사람이 곧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넉넉함이 어디 있을까. 아이는 아프다. 보이체크의 월급으로는 살림도 겨우내기에 두 사람은 내몰리기 시작한다. 보이체크는 군의 인체실험에 가담하고 마리는 걱정하는 보이체크 몰래 밤가수 일을 다시 시작한다. 인체실험을 겪으며 군의관이 건네주는 완두콩을 복용할수록 보이체크는 점차 환각과 광기에 시달린다. 마리에게는 보이체크의 상관인 대위가 자꾸만 유혹의 손길을 뻗는다. 자기 손을 붙잡기만 하면, 아이도 치료할 수 있고 자신도 보다 훤칠한 삶을 살 수 있노라고 유혹한다.

 

두 사람은 꿋꿋이, 각자 양심과 신념대로 살겠노라 발버둥치며, 아이의 병원비로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악전고투했으나 아이는 죽어버렸다. 마침내 보이체크는 미쳐버리고, 희망을 잃은 마리도 그를 떠나버린다. 거듭된 실험 동안 피폐해져 버린 보이체크는 실험 약과 시대의 광기와 처절한 삶의 시련에 두들겨 맞다간 실성해버렸고, 실험실의 군인들을 살해하고 도주한다. 마리는 그 소식을 듣고 그와 처음 만난 강가, 그가 씨앗을 뿌려놓은 강가에 있을 보이체크를 찾는다.

 

칼을 쥔 채 완전히 미쳐버린 보이체크를 마리는 붙잡는다. 아직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또 어서 꽃을 피워 마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현실부정과 강박에 휩싸인 보이체크를 껴안고, 그와 마지막 춤을 추었다. 마리는 왈츠를 추며, 이제 당신과 이상 살아갈 수 없노라고, 일전에 말한 약속, 변치 않는 마음만으로 살아보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흐느낀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보이체크는 현실을 부정하며, 꽃을 피워내기만 하면 된다고, 조금만 더 돈을 벌면 모두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서두르려 한다. 극은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춤이 끝나는 순간, 마리가 쓰러진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군용대검이 꽂혀 있다.

 

*

 

지금에서야 익숙한 플롯, 익숙한 전개라지만, 극은 생각 하나 슬며시 건넨다. 늘 생각하는 것. 순수한 마음, 그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인가, 그 마음이나 겨우 지켜낼 수 있는 세상인가 하는. 그러고 보면, 사람은 언제부터 경계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어느샌가 타인과 시대를 경계하는 가시가 돋아나는 것 같다. 불신, 무턱대고 틀렸노라 말하고 쏘아대는 적극성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불길하고 불안하게 여기며 거리를 두고자 하는 그런. 우리는 언젠가부터 무턱대고 다가오는 호의와 대가성이 없는 친절을 경계하라는 말을 들으며, 당연하지, 나를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순둥이로 아느냐는 듯이 여기곤 했다. 그건 우리가, 보이체크의 비극과 마리의 비극을 보면서 자라나는 탓이겠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시대로부터 내 가진 씨앗마저 앗기고, 군중 속에 숨어 기회를 노려보는 적대자로부터 나의 영혼이 짓밟히리라, 우리는 은연중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그 무엇도 나를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 이 불안과 불신의 감각, 나 또한 그러한 감각을 하나의 사실처럼 간직하고 있다. 앗아 갈 것이 내겐 없어, 가진 건 피기나 할지도 다 알지 못할 꽃씨뿐, 그러나 무정한 세상은 그런 사정 따위에 손속 없다는 듯이. 공평하게 앗아간다.

 

꽃씨를 하나씩 심었어. 보이체크는 강가에 꽃씨를 하나 심었다. 그건 꽃이자 꿈이었고, 꽃처럼 소박한 꿈이다. 아무래도 그 꽃은 피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 강가에서 계속 모래무덤을 더 얹어가며 서두르는 걸 보아하니 그렇다. 그 자리에 꽃이 피어있었더라면, 미쳐버린 보이체크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알 수 없는 것, 그는 계속 꽃을 심으려고만 한다. 나도 그렇다. 보이체크와는 달리, 세상 물정 모르는 순둥이가 아니야 하고 우쭐대는 나는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곳에, 꽃씨를 심고 있다. 너무 깊이 밀어 넣어, 또 지나치게 조심하느라 다 피어날지 어떨지도 모르겠지만, 불신자이자 염세자로서 심는다. 그래도 지켜내지 않으면 스러지겠지. 목말라 죽거나, 물에 잠겨 죽거나, 혹은 그늘이 짙거나, 햇볕이 너무 지나치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원작은 개요로 밖에 읽지 못했지만, 본 극은 그만큼 지독한 것 같지는 않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특색도 한 몫 한다. 음악이 잘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은 어두운 것들보단 밝은 것, 악취같이 지독한 것들 보다는 환희일 테니까. 딱딱하게 설명해 본 이 리뷰보다, 극은 훨씬 소화해 볼 만한 것으로 순화해두었다. 보이체크와 마리의 순수한 영혼이 음악을 통해 잘 형성되고, 관객을 충분히 몰입시킨다.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노래하는 모습들로써 잘 표현되어 있다.

 

보기에 편했다. 주제는 비극이지만, 자칫 지나치게 음울하지 않도록 극은 톤을 조절해두었다. 비극이 어렵거나 내키지 않는 관객분들께도 수월히 닿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생각해본다. 강가에 심은 보이체크의 꽃씨와 언젠가 심어본 그대들의 꽃씨를, 어느샌가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가버린 지 어떤지 모를 그대들의 꽃씨를. 극은 아무런 답을 내려주지 않았지만, 여운으로써 그대들을 생각 많은 밤으로 밀어 넣어 줄 것이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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