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튤립처럼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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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짧게라도 일기, 라고 부를 기록을 하고 있다. 그 시작이 궁금해서 첫 페이지를 찾아 열어봤다.
초반의 일기들은 대강 이런 식이다. ‘「여고 추리반 2」 완결!’, ‘아빠와 산책’, ‘「Mood Indigo」를 흥얼흥얼’, ‘앞머리를 왜 잘랐을까’. 아마도 나 혼자만 웃게 될 것 같은 농담을 적고, 길에서 재밌는 광경을 보게 되면 다음에 만날 친구에게 들려줄 생각으로 돌아오는 동안 이야기로 써 공책에 먹여두었다.
일기장의 나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또 우중충해졌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그걸 생각나는 단어로 써봤다. 기꺼이 틀린 말도 하려고 했다. 모아보니 다양했다. 수치심, 짜증, 초조함, 배신감, 분노, 불안, 고립감, 의심. 결과적으로는 이름들을 불러보면 정말로 괜찮아졌다. 또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 세계에서 역설적이게도 덜 외로웠다. 아마도 스스로를 속일 만큼 부풀려지고 왜곡되는 감정들을 뱉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나는 패배감을 먹었구나, 요새 나는 타인의 말을 멋대로 넘겨짚으면서 슬퍼하는 일에 중독되어 있었구나, 하는 것들. 그런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내일을 아주 조금씩 다르게 살 수 있었다.
일기를 읽다가 한동안의 내가 정확히 표현된 문장을 발견했다. 5월의 일기였다. 몸이 아프다고 적었고, 어떤 불만족스러움이 아주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건 나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나로 사는 게 싫다’고 썼다.
내가 제대로 엉킨 끈 같다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 몰라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끈을 노려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고, 그날의 나는 말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런 저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는 나를 짐짝처럼 데리고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밍기뉴,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일기 덕분에 내일로 갈 수 있었다고 말한 건, 정말로 ‘내일은’으로 시작하는 다짐을 자주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억하는 바와는 다르게 작년의 내가 꽤 많은 글을 긍정하는 언어로 마무리했다는 걸 올해의 내가 확인했다. 7월은 유독 힘이 든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어떤 일기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흘러갔고, 끝으로는 다시 7월로 돌아와 이런 시기를 통해 어떤 목표를 갖게 됐다고 썼다.
‘방구뽕’이라는 인물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어린이 해방에 대해 말한 9화였다. 해당 화에는 학원가의 저녁 편의점 풍경이 재현된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내가 3년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던 것과 꼭 닮아있었다.
내가 일하던 편의점은 학생 손님이 많은 편의점이었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학원으로 올라가기 전이나 쉬는 시간 즈음이면 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부딪히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라면과 젤리와 에너지 드링크와 삼각김밥 진열대 앞의 좁은 통로는 전쟁터였고, 엘리베이터를 한 번 더 기다리기도 빠듯한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계산 순서를 기다리는 그들을 보며 같이 마음이 급해졌다.
일을 몇 달간 쉬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을 때, 눈에 익은 몇몇 학생들의 키가 그새 한 뼘이 큰 것 같았고 여전히 어떤 라면과 탄산음료를 먹고 마시는 비슷한 모습들을 보면서 어른의 시간과는 또 다른 밀도로 흐를 청소년의 성장기가 매일 인스턴트들로 채워져도 괜찮은지 생각했다.
또 나이가 어린 손님을 새치기하는 사람, 그들에게 미묘하게 가벼워지려는 게으른 아르바이트생(나다), 때때로 아주 작은 실수에도 혼이 날까 봐 거듭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습관 같은 것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두 배로 친절‘해져’도 모자랄 거라고 생각했다.
가을에 다녀온 음악 페스티벌을 기록하면서는 돌아갈 곳이 있었기에 더 좋았던 거라고 썼다. 나는 내 일상을 비관하면서도 어떤 날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적었다. 그런 일기들에서 아직 내게 더 좋은 그리고 멋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조금은 순진한 열망과 낙천성 같은 것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또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나 쉽게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음악을 듣고 차오르는 사랑을 재단할 이유가 없게 된 사람(이것도 나다)은 ‘환상 같고 이상한 우리 관계에서, 나를 위한 일이 너를 위한 일이 되기도 하는 정말 신기한 경험을 한다’면서 ‘이런 마음은 귀하니까, 잃지 않고 싶다’는 낭만을 미루지 않았고, 어떤 불편한 사랑을 털어낸 글자들은 종이 몇 장을 넘겨서야 50m 달리기를 막 끝낸 사람처럼 휘갈긴 모양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런 걸 한참 바라보다가 공책의 가장 뒷장에 그럴 일이 없어야겠지만 혹시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걸 갖게 또는 줍게 된다면 우리 비밀로 부치기로 하자고, 진심으로 적었다.
이 일기들은 단 한 편도 글이 되지 못했지만, 지금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근육 이곳저곳에 붙어있을 것이다.
요즘은 죽음이 궁금하다. 아침에는 안예은의 「죽음에 관한 4분 15초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은, 일생 동안 노력을 기울이고 또 실현하고 싶은 운명 같은 메시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줄의 문장이 될 수도 있고, 가치관이나 꿈 또는 결핍이나 욕심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정말로 전생과 사후세계가 있다면, 나를 괴롭게 하기도 욕망하게 하기도 하는 그것이 다른 세계의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또 그렇다면 단 하나의 문장을 재생(再生)하기 위해 있을 고단하고도 긴 모든 현생은 그 자체만으로 마땅히 ‘갓생’일 것이다.
몇 년 전엔 ‘운명이겠지’라는 말에 의탁하는 위안이 조금은 무책임해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휴대폰 뒤에 네잎클로버 스티커를 붙이고 또 쓰다듬기까지 하는 나야.
오후엔 이예린의 「싸구려 위로」를 듣고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목소리에 코끝이 살짝 젖고, 저녁엔 만약 유언을 남긴다면 ‘모든 것엔 다음이 있다고 믿고 있어’라고 말할 거라고 결심했다. 다음이 있다는 믿음은 내가 믿는 또 다른 것들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몇 번이 잘못되더라도 어디서부터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그래서 쉽게 접히지 않는 빳빳한 종이 같은 마음, 간주로 넘어가지 못하고 1절만 되풀이하는 지루한 노래 같은 생각들. 하지만 역시나 다음이 있기 때문에, 그 성실한 믿음이 나를 매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할 거라는 과정 중심적인 사고까지.
다만 나의 경우엔 이제는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이라는 문장으로 하루를 사는 사람이고 싶다. 나중이 더 좋을 거라고 여기면서 나중과 다음에만 있는 것들이 있다. 내일 도화지를 사야지, 얇은 스케치를 덮고 누워서, 내일 온도를 높여야지,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자고, 내일은 꼭 너를 초대해야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눈을 뜬다.
오래 앉아있기만 하는 일상이 반복되면 다리의 뒤쪽 근육이 힘을 못쓰게 된다고 한다. 그 영향을 무릎과 허리도 받는다. 나는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곧 죽어도 직선으로 된 길만 가겠다는 편협한 사고와 정글 같은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거라는 실체 없는 불신이 나를 지배하도록 가만두었다.
그런 게 내 영혼을 좀먹는 걸 보면서도 내가 틀렸다는 말을 더 믿었다.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예전엔 이 말이 나를 닮은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쉽게 꺾일 수 있는 풀 같은 마음이 되고 싶다. 꺾인 다음은, 아무래도 다시 살아나야 할까. 꼭 그래야만 할까. 아픈 이야기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패하는 이야기, 슬픔의 바닥까지 꺾여본 사람의 경험담. 그리고 그런 걸 밖으로 꺼내는 일은 누구보다 아픈 사람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내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세계의 가장 끝에서 붙잡은 책과 음악과 자연과 사람과 일기가 그런 걸 알려줬고, 그 깨달음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고 느꼈다. ‘바보’라는 단어를 조금 찾아보다 보니 이 단어를 쓰고 싶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글을 여기까지 써오는 데 마음에 두었던 말이므로 남겨본다. ‘바보 같은 글을 써야지’라고 말하면 다음 문단을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올해엔 선물 받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볼 생각이다.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오면, 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 추운 곳에서 떠오르는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 차가운 손에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생긴 작은 카메라를 쥐고 밤 풍경을 찍는다. 야간 촬영은 고려할 게 많다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상상한 만큼, 아름답게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도 셔터를 누를 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순간에 집중해 철컥, 하고 셔터를 누르면 이게 꼭 슬레이트 소리 같아서 풍경을 지나치기 아쉬운 마음을 담아 날리는 기분이 든다. 덕분에 다른 곳으로 발을 뗄 수 있다. 인화 전까지는 서른여섯 장의 사진을 확인할 수 없는 것도 좋다. 새로운 사람을 카메라에 담고, 늘어나는 숫자를 보면서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상상해본다. 어떤 사진을 보게 될까. 필름 카메라를 찍으면 상상력이 좋아진다.
이 글도 사진 한 장처럼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지하철역 하나를 지나는 3분은, 특히 오랜 지하철 여행에서 목적지 역으로 가는 마지막 3분은, 더 늘어지게 흐른다. 노선도를 보면서 몇 개의 역을 지나쳐왔는지 세어보게 되는 아주 지루한 시간. 그런 3분을 지나칠 수 있는 글이면 좋겠다. 사소하지 않을 그런 바람을 담아 쓴다. 무엇보다 나는 글쓰기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쓴다.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글이 같은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걸, 쓰면서 알게 된다.
오늘은 2023년 3월 7일. 어제는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남을 알린다는 경칩(驚蟄)이었다. 날이 조금 따뜻해졌다. 1월 초, 일주일 정도였을까. 1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푹한 공기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 엄마는 친구들에게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가 “얘, 지금 한겨울이야”라는 장난 섞인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재밌어서 일기에 적어두었다. 서서히 기온이 오르는 걸 느낄 때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난다.
이제는 정말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윤희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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