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진심은 신 포도 - 지나친 고백 [도서]

완결되지 않은 고백
글 입력 2023.03.1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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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 정말 얼마나 많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모른다.

 

가뜩이나 어떤 글을 쓸 때마다 표현, 문법, 단어, 조사 하나하나까지 검열하다 게슈탈트 붕괴의 호된 맛을 보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과민한 에디터에게, 이 책의 리뷰를 쓰는 일이란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결과부터 말해 보자면, 솔직히, 나는 이 책의 괴짜 상담가 ‘로젠 박사’와 그의 상담 그룹의 논리에 거의 설득당해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채로 글을 쓰고 있다. 이걸 무장 해제가 되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동안 자아의 구색이라도 맞춰 보려던 의지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꺾여 있다고 해야 할지. 과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가 쓰고 있는 건 또 당최 무슨 말인지 이제는 분간이 잘 가지도 않는다.

 

 

불안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어떤 단어들을 사용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건 말로는 할 수 없는 갈망을 느꼈고 그걸 충족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 나는 일기장에 모호한 단어들을 써서 불쾌감과 고통을 표현했다. 나 자신이 두렵고 걱정된다. 내가 괜찮지 않고, 앞으로도 절대 괜찮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운이 다했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 사실이 내게는 몹시 불편하게 느껴진다. 난 뭐가 잘못된 걸까? 그때 나는 내 병을 완벽하게 정의하는 한 단어가 있다는 걸 몰랐다. ‘외로움’.

 

(pp.19~20)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이렇다.

 

이 책에는 저자인 크리스티 테이트가 심리 치료사 로젠 박사를 만나 그룹 상담에서 겪은 8년여의 경험과 그 이후의 삶이 담겨 있다. 저자가 직면했던 문제와 내가 직면한 문제는 경로는 달라도 꽤 엇비슷한 지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외로움’. 

 

내가 보기에 나는 부적응자였고, 하필 치통처럼 별것도 아닌 불안에서 도망치려 애쓰는 데에 인생의 대부분을 썼으며 어떠한 계획도 없이 죽음이 찾아오기를 수동적으로 바랐다. 그래도 나름 삶을 돌아봤을 때 낙천적일 이유라면 충분했지만, 내 몸의 세포 구석구석에는 꽉 막힌 내 상태에 대한 자기혐오가 박혀 있었다. 마치 책 첫머리의 26살 크리스티처럼 말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나대로 꾸준히 상담을 받아 오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래됐다. 우선 내가 받는 상담은 개인 상담이었고, 내게 내려진 처방은 주로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만 말하면 된다.”라던가, “남에게 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저자에게 내려진 처방이 내가 여태 받아왔던 것과는 너무나도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필 이 책을 읽은 기간이 내 쪽 상담자 측의 3월 맞이 휴가와 겹치는 바람에, 나는 별안간 내 인생에 송두리째 흘러들어온 크리스티 테이트의 8년 치 상담 과정과 그 이후의 인생에 대한 정보값을 나 혼자서 꼼짝 없이 감당해야 했다. 한동안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니, 이 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뭔가가 꽉 막힌 듯한 익숙한 느낌.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에 경험해온 그 느낌이 다른 모든 생각을, 감각을 차단해버렸다. 그 느낌은 내가 숨 쉬고, 내 몸에 피가 흐르고, 욕망이 생겨나는 걸 가로막으면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막히고, 막히고, 또 막힌 느낌. 상담을 받으면 변화가 일어나고 막힌 데 없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p.95)



《지나친 고백》. 제목을 읽고서 대충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었다. 

 

이 책을 통해 크리스티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매우 많다. 우선 그는 페미니스트 교육을 받고 여성들을 위해 법률 자문을 줄 수 있는 변호사이며, 학창 시절부터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소위 말하는 엘리트였다. 하지만 성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애인을 마지막까지 옹호했으며, 상담 그룹 안의 유부남과 밀회를 즐기기도 했다. 크리스티가 했던 자위나 섹스의 상세한 내용까지도 아주 적나라하고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알게 되었다.

 

또 어린 시절에 그는 방학 때 친구의 가족과 함께 놀러 간 바다에서 친구의 아버지가 눈앞에서 목숨을 잃어 자책한 일이 있었고, 항문에 기생충이 생겨 수치스러움에 몸서리친 적도 있었다. 식당에서 자신과 음식을 공유하지 않는 남자친구에게 분노해 한밤중에 접시를 던져 부순 적도 있다. 기타 등등. 과격한 표출과 때로는 무례한 행동까지, 이를 읽는 과정에서 가끔씩 불쾌함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도 조금 있었다.

 

크리스티가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지나친 사람은 아니었다. 로젠 박사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그룹 구성원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상담 그룹은 자신들의 상담자인 로젠 박사라는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알 수 있었다. 외부 발설에 대한 비밀 유지 원칙도 없다. 물론 집단 상담에 덜컥 참여하는 것도 모자라 처음부터 거기에 5년이라는 파격적인 시간을 베팅하는 용기라니 크리스티도 여간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긴 했지만, 로젠 박사와 그의 그룹 구성원들은 그 많은 고백들을 단계에 맞게 이끌어 내에 도가 튼 괴짜였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무언가를 깨달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마법 같은 처방 과정을 거쳐 500여 쪽에 달하는 양으로 번듯하게 정리된 크리스티의 인생을 다 읽자마자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왠지 모를 허무함이었다. 아무리 현실이 더하다 해도 그렇지, 인생이 이렇게 소설 같을 수가 있나.

 

 

“비밀 유지는 안 하나요?” 내가 말했다.

“여기서는 그런 거 없어요.” 로리가 말했다. 패트리스와 카를로스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승인해주었다. 고등학교 때 나를 혼내던 엄마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는 12단계 모임에서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들여놓겠다는 맹세에 따랐지만, 그들은 익명성이라는 신성한 원칙에 묶여 있었고, 그 원칙은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명시돼 있었다.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을 묶어놓는 원칙은 뭐지?

“그럼 어떻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죠?”

“비밀을 지키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죠?” 로젠 박사는 나를 가르칠 준비가 된 듯 기운차 보였다.

 

(p.59)

 

 

고백은 흔적이 남기 때문에 두렵다.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부디 내가 단단하고 소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왔지만, 지금의 나는 고작 어제와 오늘의 고백과 감정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바뀌곤 하는 소신도 융통성도 없는 사람이다.

 

책의 핵심은 ‘비밀은 유독하다’는 것이었다. 비밀의 작동 원리는 내 안에 수치심을 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지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내 문제를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해롭다. 비밀을 지키는 건 자기 몫이 아닌 수치심을 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크리스티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와는 애초에 접근 방식 자체부터가 달랐던 것이었다.

 

크리스티 테이트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살아온 환경도, 배경도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저 로젠 박사가 있는 크리스티가 부러웠고, 그녀를 사랑하는 그룹이 있는 크리스티가 부러웠다. 자신에게 필요한 사회적 위험 요소들을, 무엇이든 말해도 되는 가장 안전한 곳을 통해 단계적으로 감내하며 마침내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로젠 박사’를 대신해 ‘나 자신’에 대고 비밀들을 주절댔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나는 책에서 제안하는 상담 과정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고, 여전히 내 몫이었던 수치심을 계속해서 떠올릴 뿐이었다. 엉망이었다.


 

“그럼 크리스티가 원하는 건 뭔데요?” 그가 물었다.

‘원하는 건’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원하는 건, 원하는 건, 원하는 건. 나는 고독사하고 싶지 않다고 그냥 불쑥 말하는 대신 내 갈망을 긍정형 문장에 담아 표현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

하지만 나는 이 욕망 중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너무 시시콜콜하게 느껴져서였다. 감상적이기도 했고. 심리상담은 글쓰기와 같아서 세부 사항과 구체성이 중요하다는 걸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pp.39~40)

  

 

그래서, 어떤 감정이 들었는가.

 

책장을 넘기는 매 순간마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는 자극적인 광고를 본 것마냥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기분이었다.

 

로젠 박사는 감정이 ‘두 음절(영어를 기준으로)’로 된 단어라던데. 

 

그렇다면 처음에는, 부러움과 질투. 호기심에 로젠 박사의 처방을 그대로 따르다 보니 처음에는 글이 투정투성이가 되었다. 게다가 쓰다 보면 얼마나 질척거리는 글이 되는지, 감추려고 해도 이미 봇물 터지듯 불어나 버린 감정은 수습도 잘되지 않았다. 괴로웠고, 글을 몇번이고 썼다 고쳤다. 도대체 나는 뭘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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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 마음이 내가 진정으로 이 책에 몰입했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정말로 짜증 났던 점은 나의 이런 모습이, 크리스티도 똑같이 지났던, 멋대로 선택해놓고 괴로워하는 과정과 똑 닮았다는 점이었다.


크리스티가 무력함을 겪을 때마다 나도 그랬다. 내가 무력할 때마다 크리스티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내가 지금, 내일 읽었을 때는 또 어떨지 모를 이 두서없는 글을 작성하기 위해 무력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저자는 나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정도로만 대충 마무리 지으면 될 터였다. 읽다가도 금방 다시 온갖 방어 기제로 무장하려고 할 때마다, 귀신같이 어떻게 알고는 크리스티의 솔직함이 그다음 문장, 그다음 장에서 바로 나를 무장 해제시켜 버렸다.


결국에는 나도 인정해 버린 것이다. 상담은 인지와 설득을 통한 인정으로의 과정이다. 감정은 반례를 따지며 논리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내게도 내게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와,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기를. 또 분노를 발산할 용기와, 외로움을 극복하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관계의 터가 생기기를. 

 

그러면 언젠가는 나도 크리스티처럼 매끄러웠던 심장의 표면에 생긴 여러 흠집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아예 심장을 꺼내 그 속을 갈라서 보여줄 수도 있을 테니.


여전히 깨닫지 못한 무수한 감정들이 한가득이다. 진심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그에 대한 갈망을 뒤로한 채, 완결되지 않은 고백을 마친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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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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