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그냥 스키를 타다가

글 입력 2023.02.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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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도저히 못 가겠어.”


“그럼, 앞에서 끌어줄게.”


남자친구가 내 손을 잡고 끌어주려고 하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내 목소리가 스키장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냥 걸어갈래. 먼저 내려가. 괜찮아.”


완만해 보였던 초급코스의 경사가 그 순간에는 매우 가파르게 느껴졌다. 결국 스키 플레이트를 벗고 부츠만 신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내려가 있으라는 내 말에도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내 속도에 맞춰 내려갔다. 그러다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언제 내려가려고 그래. 그게 더 힘들어. 내가 끌어줄게.”


남자친구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시 부츠를 플레이트에 결합하여 신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는데, 내가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다리는 내려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탓에 꿈쩍도 안 했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되는데, 그 한 발짝이 너무 어려웠다. 막막해 보이는 앞과 눈 위에서 버티고 있는 내 다리를 바라봤다. 이대로는 무리였다. 나는 이미 두려움을 넘어서서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다시 스키 플레이트를 벗었다. 부츠만 신고 걸어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편이 더 낫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꿋꿋이 느릿느릿 걸어 내려갔다.


그날 스키를 처음 탄 건 아니었다. 겨울 스포츠가 처음도 아니었다. 보드는 3번 타봤고, 스키는 2번째였다. 스키는 2주 전쯤에 2시간 동안 강습 받았는데, 그때는 무서워하면서도 잘 내려가고 잘 멈췄다. 운동신경도 없고, 겁이 많은 나한테는 그건 좋은 신호였다. 그래서 스키장을 다시 찾았다.


가장 걱정했던 리프트에서 내릴 때 넘어지지 않고, 정지하기도 성공했었다. 그 흐름을 타고 출발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강습 받을 때처럼 해도, 아무리 있는 힘껏 발뒤꿈치를 밀어 크게 A자를 만들어도 멈추지 않았다. 속도만 더욱 빨라졌다. 그러다 결국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앞에서 남자친구가 잡아줘서 크게 다치지 않았다. 


정지가 안 되는 내 상태를 알고 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멈출 줄 안 다는 건, 하나밖에 없는 믿을 구석이었으며,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믿을 구석이 없으면 아무리 좋아해도 즐기지 못한다. 예를 들면, 패러글라이딩이나 높은 층에 올라가는 건 즐기지만 안전장치가 있더라도 혼자서 내 의지로 뛰어내려야 하는 번지점프는 무서워한다.


그러니까 믿을 구석은 나를 제외한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즉,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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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밑에서부터 해볼래.”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안정시킨 후, 무엇이 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일단 2주 전에 비해 날씨가 따뜻해져서 눈이 좀 녹아있었다. 스키를 타기 전에 남자친구가 눈이 플레이트에 달라붙어서 타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말했었다. 그 말이 이해가 잘 안됐는데 겪어보니 단번에 이해가 됐다. 다른 사람들은 눈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잘 타지도 못하고 겁이 무척 많은 나한테는 영향이 컸다. 


눈 상태가 배웠던 곳과 다르고, 이미 공포감을 느꼈으므로 초급도 무리였다. 우선 그곳의 눈과 친해지고 공포감을 잠재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와 남자친구는 맨 위까지 올라가지 않고, 평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만 올라갔다. 거기서 안 내려가게 올바른 자세로 버티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처음에는 남자친구의 손에 의지했다. 사실 그 손을 믿기도 어려웠다. 그는 나를 믿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사람을 못 믿는다기보다 나 때문에 같이 넘어져서 다칠까 봐 두려웠다.


더구나 스키는 보드처럼 안전하게 잘 넘어지는 법을 모르고, 혼자서 일어나기도 어렵다는 걸 알기에 몸의 긴장은 풀어지지 않았다. 문득 ‘포기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시즌권 끊어서 같이 다니자고 말했던 그의 들뜬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믿어보자. 다시 해보자.’


‘나 때문에’ 라는 생각은 버리고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의 손에 의지하며 안 내려가게 서 있는 법을 연습했다. 그다음 다리에 적당한 힘을 주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멈추기도 연습하면서 감각을 조금씩 익혔다.


“내가 손 놓으라고 하면 손 놔.”


“응”


“..... 지금이야.”


그가 내 손을 놓을 때, 속으로 외쳤다. ‘난 할 수 있어. 괜찮아.’


결과는 성공이었다. 연습한 곳보다 더 위로 올라가서 내려가기도 성공했다. 그렇게 조금씩 위로 올라간 다음 혼자 내려가면서 공포감을 잊고, 눈과 스키에 적응했다.


“이번에는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내려올까?”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겁은 있었지만, 믿을 구석이 생겼다. 멈출 줄 안다는 것.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 믿을 구석에 의지한 채 무빙워크를 타고 맨 위까지 올라갔다. 다시 올라와 보니 걱정이 조금 됐지만 괜찮았다. 


‘난 이제 멈출 줄도 알고, 감 잡았어. 잘 내려갈 자신 있어.’


다시 다짐하고 출발했다. 갑자기 빨라지면 놀랄 수 있으니 눈을 살살 긁으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그렇게 처음으로 초급코스를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잘 내려갔다. 뿌듯했다. 또 타고 싶었다. 


자신감이 좀 붙은 것 같다며 이번에는 속력을 좀 내보라는 그의 조언을 듣고 좀 빠르게도 타봤다. 그다음에는 내려가면서 조금씩 무게중심을 옮겨봤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그의 얼굴에도, 내 마음에도 뿌듯함이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나의 페이스에 맞춰 타다 보니 5시가 되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스키장에서 나왔다. 


비록 턴은 실패했지만, 기뻤다. 돌처럼 그 자리에 굳어있었던 내가 혼자서 몇 번을 탔다. 두려움과 무서움도 반으로 줄었다. 무엇보다 눈을 온전히 느끼면서 스키 타는 순간을 즐겼다는 게 가장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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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보드를 탈 때는 즐기지 못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타야지.’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잘 넘어지고 일어날 수 있는 것만 믿고 악바리 근성으로 탔다. 여전히 겁을 잔뜩 먹은 채 말이다. 즐기러 온 곳에서 숙제를 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기까지 왔는데 타야지.’라는 마인드는 ‘난 할 수 있다.’는 마인드로 바뀌었다. 휴식이 필요할 땐 쉬고, 좀 늦더라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넘어지더라도 어떻게든 타보려는 자세와 조급해하며 나를 몰아세우기보다는 현재 내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나만의 페이스로 타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을 믿었고, 나에게 의지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부분을 칭찬할 줄 알게 됐으며, 완벽하지 않더라도 성취감을 느꼈다. 그 덕에 자신감도 생겼다.


물론 아직 변화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무서워하며 타는 순간에도 사람들이랑 부딪히면 어떡하지, 브레이크가 안 되면 어떡하지 등등 그 짧은 순간에 여러가지를 염려했다. 물론 사람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주변을 살피고, 조심하는 것은 스포츠의 기본이며 매너다. 하지만 나는 너무 과했다. 그래서 스키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개선하면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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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공포감에 휩싸인 순간은 터닝포인트였다. 그 순간이 없었으면 나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스키를 탔을 거다. 두려움 게이지는 가득한 채로 즐기지 못했을 테다. 그리고 변화한 나와 아직 그대로인 나를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놀러 간 스키장에서 또 한 번의 성장을 겪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겨울이 오면 또 함께 스키를 타기로 약속했다. 난 그 약속을 하면서 그때는 스키로도 나로서도 어떤 성장을 할지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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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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