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머무르려면 머무르지 않을 것을 증명해야 하는 모순 속에서 [영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난민사,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 <트랜짓>
글 입력 2023.02.2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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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트랜짓’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한 통과의 절차. ‘트랜짓(Transit)’의 의미다.

 

영화 <트랜짓>은 원작 소설 <통과 비자>를 재해석했다. 이 소설은 1940년대, 독일의 여성 작가 안나 제거스가 나치 치하에서 위협당하며 망명 생활을 하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 및 그 밖의 정치적인 이유로 고통받는 난민 혹은 이주민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어딘가를 ‘경유’하며 떠도는 삶을 살게 된다. 


<트랜짓>은 남의 신분으로 발급된 통행 비자를 손에 넣은 인물 ‘게오르그’가 독일의 침략을 피해 멕시코로 탈출하려는 과정 속에서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을 그리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난민의 현실과 비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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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는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출국에 사용할 통행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프랑스 남부의 해안 도시인 마르세유로 향한다. 지인의 부탁으로 작가 ‘바이델’에게 전달할 편지 두 통을 품 속에 품은 채 마르세유행 기차에 오른다. 바이델이 머무르고 있다는 호텔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자살한 상태였다.


얼결에 바이델의 짐을 맡게 된 게오르그는 그의 가방에 든 원고지와 아내에게서 온 편지, 그리고 멕시코 대사관에서 발행한 통행 비자 발급 허가서를 수중에 넣게 된다.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인한 대사관 직원의 실수 덕분에 그는 작가로 신분을 위조한 채 멕시코행 승선권과 여행 자금을 받고 프랑스를 떠나려 한다.


멕시코로 떠나기 전, 게오르그는 함께 마르세유로 오는 과정에서 다리를 다쳐 죽게 된 이민자 ‘하인츠’의 아내 ‘멜리사’와 아들 ‘드리스’를 찾아가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한다.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드리스를 자주 방문하다가 그가 천식을 극심히 앓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게오르그는 수소문해 의사 ‘리차드’를 찾게 된다. 


게오르그는 리차드의 옆에 있는 신비한 여인 ‘마리’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그가 마르세유에 머무를 때 계속해서 우연히 마주쳐 온 마리를 또 한 번 운명처럼 만나게 되면서 점차 사랑에 빠진다.

 

이후 게오르그는 마리가 죽은 바이델의 아내이고 그녀가 계속해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녀를 사랑하기에 바이델의 죽음을 숨긴 채 함께 멕시코로 떠나려 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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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배경이 되는 곳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프랑스이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길거리 및 인물들의 차림새는 현재 프랑스 도시의 그것들이 띠고 있는 모습과 별반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무장한 특공대의 불심검문과 끊임없이 울리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현대식 건물에 마련된 수용소, 그리고 세련된 옷차림 등의 풍경은 194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을 잠시 망각하도록 만든다.


특이한 연출법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함으로써, 시대적 배경을 지운 채 과거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난민 문제의 실태와 그 심각성을 짚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현재 마르세유의 모습을 겹쳐 그리며, ‘실화를 기반으로 전쟁 난민을 다룬 역사 영화’로서의 정체성에 멈추지 않고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전쟁, 파시즘 및 정치적 억압으로 영화의 사유를 확장시킨다.


시대를 초월해서 배경을 설정함과 동시에, 작중 상황을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전달하기도 한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과 동떨어진 외부의 목소리를 통해, 현재 시점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의 입장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유럽 난민사를 회상하고 살피는 듯한 느낌을 부여하며 동시대의 난민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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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대의 폭력과 억압, 밤마다 울리는 사이렌 소리, 그리고 ‘대청소’라는 명목으로 이주민들을 수시로 강제 추방하는 국가 앞에서 난민들은 단 하루도 편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됐다.

 

가족 혹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마르세유에 홀로 남겨진 난민들은 매일 영사관 앞에서 기다리며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길 원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탈출을 위해 바이델을 배신했지만 죄책감과 그를 향한 믿음을 이유로 여전히 죽은 남편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마리, 전쟁으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난 하인츠와 가난과 함께 남겨진 멜리사와 드리스, 의사로서의 의무와 사명감을 지키려 리옹을 향해 떠나려고 했지만 승선을 저지당한 리차드, 그리고 정체성을 잃고 타인의 삶을 살다가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마리를 기다리게 된 게오르그까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경유할 예정임을 증명해야만 체류 허가증과 통행 비자를 받고 머무를 수 있는 모순 덩어리 같은 세상 속, 어디에도 온전히 머무르거나 정착하지 못하고 그저 사랑 혹은 구원을 기다리며 삶의 목적지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현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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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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