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녹스사회에서 큐리오 회복하기 - 연극 '태양'

글 입력 2023.02.1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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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연극 태양_포스터(2.3-26).jpg

 

 

1. 녹스 사회에서 큐리오 회복하기


 

연극 '태양'의 무대의 정중앙에는 대각선으로 빛이 비친다. 무대의 전면에는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고, 고물 더미 같은 장식이 상단에 장식되어 있다. 고물 더미는 작품의 전개에 따라 위로 아래로 움직이며, 때로는 그 사이에서 조명이 비친다. 국립극장에서 다시 오른 '태양'은 이전에 올렸던 내용과 주제의식을 대부분 그대로 가져왔지만, 무대장치뿐만 아니라 배우와 연출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몇몇 장면 연출, 두 번째로는 캐릭터 표현 방법이다.

 

연극 '태양'은 녹스와 큐리오의 대립과 상생을 다룬 작품이다. 녹스는 바이러스에 면역을 가진 존재로 신체적 노화로부터 자유로운 신인류다.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는 녹스는 인간보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인지적으로 뛰어나다. 최적상태를 유지하는 뇌는 녹스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이기보다 공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진화에도 단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태양에 노출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녹스는 이전 인류보다 더 막강한 존재가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녹스가 되는 것을 원했다. 30세 미만인 많은 사람이 녹스가 되길 선택했고, 이전 인류는 고물을 의미하는 '큐리오'라 불렸다. 녹스들은 큐리오를 위해 온정적 복지를 실천했지만, 그 기저엔 은근한 차별의식이 깔려있다. 사실 녹스는 큐리오를 향해 상생의 손을 내미는 것처럼 보이지만, 녹스 한 명이 살해당했다는 이유만으로 10년 봉쇄라는 잔혹한 처사를 취하는 점에서 이들간에는 명확한 권력차이가 존재한다.

 

녹스와 큐리오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러 상징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배우 중 누군가 한 말을 빌려 오자면, 관객들은 이곳을 나갔을 때 대부분 '녹스'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사회에서 지향하고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녹스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촘촘한 자격과 기준의 세계에서 권력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누구든 자유와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네트워크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네트워크에 편입할 수 있는 자격은 정확히 녹스와 일치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효율적인 태도만이 비로소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실제적 경험과 첨예한 인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험이 아니라 현상으로서 경험을 받아들이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감정의 꼭두각시가 된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원시적인 충동은 해가 지고, 다시 뜨는 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녹스는 태양을 등졌다. 그래서 그들은 고뇌하지 않지만, 태양 아래에서는 죽음을 맞이한다. 현대인도 마찬가지다. 명명백백한 명제 아래에 단일한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하나의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태양을 영원히 등진 자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은 녹스와 큐리오의 상생을 이야기한다. 현대사회는 녹스가 지배하고, 큐리오를 숨기는 데 급급하다. 하지만 녹스만이 존재하는 사회는 생존할 수 없다. 우리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다. 이미 사회와 우리는 녹스적 모습을 양성하고 키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는 죽어가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윤리, 경제, 문화, 온갖 녹스적 지식에 얽매인 사회는 출산율을 낮추고 기후를 파괴했으며. 감성을 허례허식이나 위선으로 바꾸어놓고 있다.그래서 연극 '태양'은 더 큰 의미가 있다.

 

 

 

2. 각 인물로 올려다보는 '태양'


 

앞서 기술했던 것처럼, 연극 '태양'은 녹스를 살해한 큐리오들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연극 '태양'에는 녹스와 큐리오의 갈등에서 독특한 포지션이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가 등장한다. 본 리뷰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녹스를 살해한 것은 카츠야다. 카츠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즉각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해소한다.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녹스에 대해 깊은 분노를 품고 있는 인물인데-앞서 말했듯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분을 참고하면, 그가 무엇에 분노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녹스만 보면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죽이려고 달려든다. 극 중 카츠야는 마치 무협만화의 주인공처럼 행동한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으나, 그 신체만큼이나 정신은 성장하지 못했다. 그는 마을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망갔으며, 돌아와서도 극단적인 행동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녹스들이 차별하는 큐리오의 요소-극단적이며 감정적이고, 유아적인-를 모두 갖춘 인물이자, 녹스와 큐리오의 불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카츠야의 누나 준코는 카츠야에게 자수를 종용하지만 도망가는 그를 차마 붙잡지 못했다. 카츠야의 죄로 마을이 봉쇄되고 나서 그녀의 아버지는 자살했다. 이에 대한 책임감과, 봉쇄가 풀리고 난 후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녹스 추첨권을 얻기 위해 마을에 남아있었다. 준코는 인간적인 애정에 얽매이지만 당차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처음 봉쇄를 풀고 세이지와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녀다. 들개같이 기대어오는 아들을 업고 큐리오의 마을을 돌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녀에게 녹스와 큐리오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그들과 함께하는 거 나은 삶이다. 그녀는 그래서 꿋꿋히 공동체를 지키는 인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옆에 준코에게 장난스럽게 장미꽃을 던지는 소이치가 있다. 소이치는 녹스가 된 아내와 이별하고 현재는 준코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거칠고 장난스럽지만, 준코의 옆에서 묵묵히 위로하고 딸에게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친구의 터무니없는 결정에도 끝까지 손을 잡아줄정도로 감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하나다. 소이치는 유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녹스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녹스가 되면 인간적인 고뇌를 잃어버리고 특유의 개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의 아내의 변화를 통해 느꼈다. 결과적으로 유가 레이코에게 입양되면서 녹스에게 딸와 아내를 빼앗겼다. 그는 두 인류의 비극을 목도한 인물이다. 하지만 카츠야와 같이 복수하지도, 데츠히코와 같이 녹스를 동경하지도 않는다. 중간점에 선 그는 삶의 비극을 관전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준코의 곁에 머무르며, 삶의 모순을 방관이라기보다 관조한다.

 

그리고 소이치와 엔딩을 장식하는 중요한 인물로 가네다가 있다. 그는 큐리오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녹스로, 항상 '정답'과 '시간의 효율'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큐리오에 대한 향수가 있는 인물인데, 그는 '시간이 쌓여있는' 소이치를 보고 큐리오의 존재 가치-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살아가고자하는 인간의 실존-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똑같이 큐리오였던 레이코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유의 녹스화를 막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처음으로 '정답'을 찾지 못한 그는 햇볕에 그 스스로를 내놓는다. 그래서 가네다는 큐리오적 면모를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이다. 연극에서는 반정도는 비극적으로 표현되었지만, 햇볕 속에서 '죽어가는'대신 '스스로 일어서는' 하는 그 모습에서 관객들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 모습에는 과연 준코와 소이치의 모습이 보인다.

 

레이코와 세이지는 같은 인물로 묶일 수 있다. 이들은 전형적인 녹스의 인간들이다. 가네다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가장 합리적인 정답을 찾는다. 하지만 연극은 레이코와 세이지를 완벽한 녹스로 표현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레이코와 유의 만남은 드라마틱하게 연출된다. 레이코와 유가 처음 만났을 때 노래가 멈추고 빛이 집중되며, 유가 녹스가 될 때 레이코는 스킨쉽을 하고 처음 장면과 마찬가지로 유를 꼬옥 안아준다. 세이지는 이전 연출보다 더 감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레이코의 남자들을 걱정하고 이러한 질투의 감정은 때로 큐리오에 대한 차별의식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레이코와 세이지는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레이코는 유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세이지는 아예 유를 입양하여 자신의 비합리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래서 레이코와 세이지는 녹스다운 인간이기 때문에, 녹스다운 비극을 되풀이하는 인간들이다.

 

데츠히코와 유는 큐리오의 아이들이다. 삶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맞선 그들의 부모, 준코와 소이치와 다르게 이들은 아직 삶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중이다. 흥미롭게도 아버지가 없는 데츠히코는 성장하고 싶은 열망을, 어머니가 없는 유는 어머니로 표상되는 안정적 관계에 대한 회복을 갈망한다. 데츠히코는 녹스가 됨으로써, 유는 큐리오들만의 사회에서 속하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해결은 직면이 아니라 우회를 통해 해결되고자 한다. 데츠히코에게는 선택지가 남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마지막, 후지타는 녹스의 아이들이다. 녹스 사회에서 자란 그는 반대로 큐리오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초소를 지키는 역할에 맞게 실제로 그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다. 녹스 사회에서 자란 그는 기만적으로까지 보일 정도로 큐리오의 삶을 동경한다. 그는 가네다와 마찬가지로 큐리오적 면모를 회복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결핍에 맞서기 위해 녹스가 된 자가 아니기에 큐리오의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비교적 순수하게 큐리오와 화합하고자 하는 이유기도 하다.

 

 

 

3. 나가며


 

이번 '태양' 에서는 좀 더 극적으로 표현된 큐리오와 녹스의 리듬감과 몸짓이 좀 더 동질적으로 변했다. 세이지 역시 좀 더 덜 '녹스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것도 포인트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연출적 변화가 녹스와 큐리오라는 두 대상을 완전히 별개의 인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존재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연출상의 변화가 있었는데, 첫번째로 후지타가 추첨표를 찢어버리는 코믹한 장면이 사라진 것, 두번째로 가네다의 죽음을 배경으로 레이스를 하는 장면이 사라진 것, 세번째로, 가네다가 소이치의 손을 놓고 무대의 정면으로 나온다는 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레이스를 하는 장면이 없어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가네다가 소이치의 손을 놓고 정면으로 나오는 장면은 좀 더 강렬한 임팩트를 줬던 것 같다. 가네다의 파멸적인 회복은 비극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데츠히코는 추첨에 따라 녹스화되는 시술을 받았을까? 아니면 후지타와 함께 여행을 떠났을까? 유의 변화를 보고 데츠히코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네다의 죽음에 대해 소이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관객들의 몫이다. 내가 김정 연출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도 이러한 질문들의 답을 온전히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둔다는 데 있다. 사실 빈칸으로 남겨두는 것이 이 작품의 더 적절한 완성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안에도 녹스와 큐리오가 끊임없이 서로 경계하고, 때로는 화합한다. 하지만 단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태양은 언제나 지고 뜬다는 것이다. 녹스화가 되어도 지워지지 않는 우리 안의 짐승 같은 충동은, 이 작품과 같이 우리의 삶을 예술로 만든다. 이왕 고를 수 있다면, 작품이 서막처럼 초반에 제시했던 것처럼, 태양과 달처럼 서로 화음을 맞춰가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는 언제나 삐걱거리는 조화에서 나오니까.

 


[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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