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쾌대, 민족의 미술을 외치다.

그의 바람은 과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글 입력 2023.02.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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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화가 이쾌대


 

이쾌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한국전쟁과 월북이라는 복잡하고 특수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한국의 해방기 화가이다. 국내에서는 '월북화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광복 70주년 기념 회고전 포스터를 차지하기도 했던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나 《군상》 연작 등이 바로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특히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통해 보는 이쾌대의 모습은 생전 이쾌대가 가진 작가로서의 자긍심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단순히 화가로서의 자긍심이 넘쳤던 인물로 이쾌대를 기억하기에는 이쾌대의 활발한 활동과 조선만의 예술을 건설하고자 했던 열망은 보다 진지한 것이었다. 특히 전통에 기반한 조선만의 미술 건설에 대한 그의 고심은 그의 길지 않은 작업 기간 내내 이어진다.


이쾌대(1913-?)는 1913년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는 미술보다 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전해지며, 중학교 시절에는 야구선수와 체조선수로도 활동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이후 경성휘문보통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당시 담임 교사이자 서양화가였던 장발은 “이쾌대는 이미 중학교 때 대학 3, 4년생의 데셍 실력을 충분히 갖추었다”며, “자신이 가르친 사람 중 이렇게 뛰어난 사람은 처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발의 전언을 입증하듯, 실제로 이쾌대는 휘문보고 5학년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로 입선하고, 이후 1938년 《이과전》에 연이어 입선하면서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쾌대의 작품세계


 

이쾌대의 초기작은 대부분 정물화 혹은 인물화가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이는 이쾌대가 가진 인물화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눈에 띄는 소재는 부인을 대상으로 한 인물화로, 이 시기 이쾌대의 부인도에서 보이는 여성 인물은 대부분 그의 부인 유갑봉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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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빨간 외투 입은 여인〉,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91x61cm, 개인소장.

 

 

193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빨간 외투를 입은 여인〉이 부인 유갑봉을 모델로 하여 그려진 초기 부인도 중 하나이다. 여성 인물의 모습이 꽤 자연스럽게 묘사된 것으로 보아 이미 기량을 충분히 쌓았던 1930년대 중반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 한 편에는 ‘K.P.R. 나의 할 일은 이것. 어떤 장애물이 와도 오직 그 길뿐’이라는 메모를 남겨 부인에 대한 사람과 애정을 내비쳤다. 사선으로 앉은 여성 인물 좌상은 그 당시 선전을 중심으로 선호되던 주제 중 하나였지만 인물의 매끈한 피부 표현, 생각에 잠긴 듯 어딘가를 응시하는 표정 등 인체의 묘사와 인물이 가진 미묘한 감정의 표현 면에서 이쾌대 인물화의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1945년 해방 후 미술가들의 공통된 과제는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난 우리나라만의 미술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제국미술학교 시절에서부터 꾸준히 확인되는 이쾌대의 ‘우리 것에 대한 관심’ 또한 꾸준히 심화되어 가는데, 이 시기 이쾌대는 조선 시대의 중국풍 산수화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일제의 영향에서도 벗어난, 그렇다고 해서 서구미술의 아류도 아닌 새로운 우리만의 미술을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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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72x60cm, 개인소장.

 

 

그중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해방기를 대표하는 이쾌대의 작품 세계에서 조명하지 않을 수 없는 대표작이다. 그 제작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그림 속 이쾌대의 얼굴과 후기로 갈수록 매끈한 표면처리를 보이는 화풍적 특징으로 미루어보아 1948년에서 1949년 사이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가로운 농촌을 배경으로 하늘과 땅 사이를 굳게 버티고 선 화가의 모습은 도전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당당하고 진지한 화가의 표정과 자세 또한 해방 직후 국가와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준다는 다수의 해석에 충분한 근거로써 자리하고 있다.


해당 그림 속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이쾌대의 복식이다. 그림 속 그는 푸른색의 전통 두루마기를 갖춘 반면 서양식 중절모를 쓰고 있으며, 들고 있는 미술 도구 역시 유화물감의 팔레트와 동양의 모필이다. 이는 자신이 실제 모필과 유화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서양화를 그리는 동양 출신 화가로서의 자신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자화상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세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한 소재라는 점에서, 해당 자화상 속 의미심장한 이쾌대의 복식과 미술 도구는 서양화를 그리는 농촌 출신 한국 화가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분명히 한 상징적 의미로 읽어볼 수 있다.


이쾌대가 가진 화가로서의 결의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비롯한 해방 후 이쾌대의 행적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이쾌대는 1947년 ‘진정한 민족미술 건설’을 목적으로 이전 신미술가협회를 함께했던 일군의 화가들과 함께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돈암동에 마련한 자신의 화실 ‘성북동 회화 연구소’의 연구생 모집 공고를 올려 교육 활동에도 힘쓰기 시작하는데, 이 당시 완성된 작품들이 바로 《군상》 연작, 〈걸인〉 등의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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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군상Ⅰ- 해방고지〉, 1948년, 캔버스에 유채, 181x222.5cm, 개인소장.

 

 

《군상》 연작은 네 점 모두 정확한 제목이 알려지지 않아 《군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군상Ⅰ〉의 경우, 좌측 하단에 새겨진 ‘1948 이쾌대작’이라는 서명과 화가와 그림이 함께 찍힌 사진이 전하고 있어, 조선미술문화협회 전람회에 출품했던 〈해방고지〉로 추측된다. 구도와 배치 면에서 볼 때 인물들은 모두 짜여진 연극 무대처럼 근경, 중경, 원경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철저히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지키고 있다. 나뒹구는 시체와 널부러진 남성들, 몸싸움을 벌이는 인물들, 오열하는 여성과 정신없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부인 등 화면은 어딘가 혼란스럽고 급박한 상황을 묘사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다중의 인물 군상들과 마주한 두 명의 젊은 여인이다. 좌측에서부터 달려오는 여인들의 동세는 해방을 알린다는 작품의 제목처럼 중요한 소식을 전하러 오는 듯 역동적이다. 하지만 긍정의 제목과 다중 인물들의 태도는 상당히 상반된다. 두 여인이 전하는 기쁜 소식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인물은 이들과 마주 본 두어 명뿐, 화면 속 대다수는 여전히 혼란과 절규에 빠져있다. 결국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혼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해방 직후의 좌우충돌과 미술계의 혼란에서 비롯된 표현이 아닐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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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군상Ⅳ〉, 1948년 추정, 캔버스에 유채, 171x216cm, 개인소장.

 

 

〈군상Ⅳ〉는 《군상》 연작 중에서도 비교적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으로, 전반적으로 이전의 〈군상Ⅰ- 해방고지〉에서보다 진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쾌대는 〈해방고지〉를 출품했던 조선미술문화협회 전람회에 〈창공〉, 〈조난〉을 함께 발표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난〉은 미군이 독도를 폭격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문제작’이었다고 한다. 〈군상Ⅳ〉 그 〈조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어두운 배경의 중앙에 무엇인가 폭발하는 듯 섬광이 이는 표현으로 미루어 〈군상Ⅳ〉가 〈조난〉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나신에 가까운 인물 군상들은 총 35명 남짓이며 우측 하단에서부터 좌측 상단으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구성을 띤다. 화면을 직선 세로로 나누어보면 우측 하단의 인물들은 아비규환의 상황에 놓여있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 물고, 머리채를 잡고 나뒹구는 인물들은 좌측 상단으로 올수록 두 다리를 땅에 단단히 짚고 선 결의에 찬 인물들로 이어진다. 이러한 서사적 구성은 전통적 두루마리 회화의 전개 방향과 같다는 점에서 해방기 이쾌대가 여전히 전통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회화을 건설하고자 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남성에게 들려진 흰 천을 두른 여성이나, 대화를 나누는 듯한 남성들, 인물들의 서사적 구성과 비현실적인 배경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해방기와 한국전쟁 직전의 고조된 좌우 갈등 상황을 고려해볼 때,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이쾌대 미술 다시 읽기


 

조선만의 민족미술을 건설하고자 했던 이쾌대의 목적과 바람은 과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남아있는 작품들을 통해 이쾌대가 진정으로 일본도 중국도 서양의 아류도 아닌 새로운 우리만의 미술을 건설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군상》 연작의 경우 이쾌대가 초기부터 가졌던 인물화에 대한 관심과 그동안 연마해온 서양화풍이 빛을 발한 대작인 것은 확실하나, 작업 시기인 1948년이 혼란기임을 감안하더라도 나신에 가까운 인물들로 이루어진 아비규환과 절규의 장면을 당시 한반도에서 벌어진 실제의 장면으로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군상》 연작의 화풍, 제작 면에서 보이는 다양한 타국의 미술과의 연관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이쾌대가 자신의 미술에 있어서 그 목적을 ‘진정한 민족미술 건설’에 두었다는 점에서도 그 모순이 적지 않다.


강렬한 색채와 고조된 감정의 표현, 인물의 인체 묘사에서는 들라크루와나 제리코와 같은 19세기 낭만주의와의 연관성을 읽어볼 수 있으며, 이는 이미 많은 연구에서 논의된 바 있다. 또한 약 2m에 이르는 벽화 수준의 대형화 제작, 인체를 하나씩 정확하게 묘사하여 치밀한 구성을 통해 정해진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은 비슷한 시기 멕시코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유사하다. 실제로 이쾌대가 멕시코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시케이로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기타가와 다미지의 작품을 좋아했고, 자신도 그처럼 벽화를 그리는 게 소원”이라 말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께 논의되는 부분이 바로 멕시코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화가들의 인물 군상 벽화 혹은 전쟁화와의 연관성이다. 특히 전쟁화가로 활동했던 후지타 쓰구하루의 전쟁화와의 연관성은 일제강점기 말기 진행된 국가총동원령과 함께 많은 한국 화가들에게 요구되었던 전쟁화라는 시대적 아픔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쾌대의 미술이 ‘진정한 민족미술 건설’과 한국적 정체성 모색을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모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도쿄대 교수 서경식은 이에 대해 “전쟁화로부터 침투해 들어온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적 정서 (...) 혁명적 낭만주의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군국적 낭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무엇에 의해 담보될 수 있을까?”라며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과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조선만의 새로운 미술에 대해 고심했던 이쾌대가 보여준 화가로서의 노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제의 치하에서, 해방 이후로는 좌우로 갈린 정치 상황과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시대상 속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쾌대가 원했던 것은 늘 통합된 한민족과 그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이었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이쾌대의 대표작인 군상 연작에서 보이는 현실과 동떨어져 희망을 외치는 듯한 화면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이쾌대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윤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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