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헤아릴 수 없는, 헤아리고 싶은

사랑은 건전한 부채감
글 입력 2023.02.1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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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 인해 밤을 지새운다.’ ‘누군가로 인해 끙끙 앓다.’ 이 문장들은 지금까지의 나와 꽤 멀리 떨어진 마음을 품고 있다. 차가운 듯 보이나, 누군가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려 할 때 능숙하게 거리를 벌려왔다. 나는 이 기술을 ‘적절한 거리감’이라고 정의 내렸다.


기술이라고 할 만큼 이것은 유용하다. 천차만별의 크기와 깊이를 가진 친구들의 마음에 영향을 받지만 짓밟히지는 않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마치 피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를 향할 직격탄의 공이 상대의 손을 떠날 때까지 긴장을 느낀다.

 

손에서 튀어나온 공을 똑바로 보고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려 피한다. 내가 직접 느끼는 건 그 긴장, 공이 옆을 스칠 때 일으키는 바람 정도다.


그것이 보이는 것인지, 친구들도 오히려 부담을 덜고 크고 작은 마음을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난 그렇게 덜어지는 마음의 무게를, 그만큼 편안한 친구들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공감은 감정의 합일이 아니라는 누군가의 말이 나의 행동에 당당함을 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는 것. 이것이 나의 관계론이었다.


유용하다고 완벽한 것은 아니었을까. 언젠가부터 채워지지 않는 단조로움이 자리를 텄다. 감정의 진폭이 자꾸 줄어들어 느끼는 감정의 수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문제의 정도는 스스로에게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게 됐을 때 발견됐다.

 

나에게서 새로움을 느끼지 못해 지루해지는 빈도가 늘었고, 심지어 싫어졌을 때조차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아갈 동력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건조해져 있었던 것이다. ‘적절한 거리감’은 결국 내 안에 나라는 사람만을 남긴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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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게도, 나와 달리 적극적으로 ‘너와 나’의 거리를 좁히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 그걸 새삼 깨달은 술자리를 최근 가졌다.

 

이니는 10년이 다 되어가는 짝사랑을 품고 있다. 짝사랑은 그 세월 동안 설렘과 미움과 원망과 연민과 체념과 혼란 등의 이름으로 변모한 듯 보인다. 10년이라는 시간 가까이 누군가를 기꺼이 자기 시간에 허락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이후에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실망하고 화나고 기뻐하고 나름의 용서를 하고 관계의 해탈까지 이르렀다는 이니의 말을 들으며 벙쪄버렸다. 저 아득한 마음은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경지의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부끄럽고 초라한 느낌도 들었다. 내 것과 달리 이니의 입과 눈과 손은 이다지도 다채로웠으므로.


원래의 나라면 그것을 미련한 감정 소모라고 받아들였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이니가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인생엔 이런 감각도 있다고 인도하는 손처럼 보였다. 내 삶에 누군가를 들이지 않겠다는 선포를 내려놓아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거리를 좁힌다는 건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겠다는 것이고, 그이의 부담을 허락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친구의 광채를 보며 깨달았다. 어떤 부담은 아래로 짓누르는 힘을 가졌지만, 어떤 부담은 앞으로 미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은 건전한 부채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만 할 수 있는 만큼에서 그치지 않고, 조금씩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대출 받아 그 크기를 늘리는 것이다. 마음의 빚을 적절히 관리하며 서로의 물성을 교환하는 ‘물물교환’, 사랑의 확장이 이러한 것이 아닐까.


그를 위해 먼저 내가 갖고 나눌 수 있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거리감은 나를 지켜온 관성이라 이를 무너뜨리는 역행은 귀찮음과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그럼에도, 항상 성공할 순 없겠지만 천천히 확실히 마음속을 나 아닌 다른 것들로 어지럽히겠다고 다짐한다.

 

그게 나를 지속시키는 감각임을 잊지 않으려 애쓰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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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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