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결국 우리들 사는 이야기라서 -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글 입력 2023.02.0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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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판소리여야 하는가?



본 리뷰는 1월 27일 초연된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 篇>을 감상한 뒤 작성되었다. 해당 공연은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중 첫 번째 작업으로,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단편소설인 <보석>, <콧수염>, <비곗덩어리>를 판소리로 독특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모파상 소설의 내용 자체를 다루지는 않을 예정이며, 대신 각색된 형태로서의 판소리 공연에 대한 리뷰만을 진행하고자 한다.


공연 포스터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머릿속을 맴돌았던 질문은, '왜 판소리여야 하는가?'였다. 사실 나에게 판소리는 역사 또는 고전 문학 수업을 제외하면 접할 일이 없는 낯선 장르에 속했다. 그래서였을까, 공연이 있기 전날까지 내 마음속은 무지에서 비롯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서관에 들러 모파상 단편집을 대출해 허겁지겁 읽었던 것도, 여유로운 예습이라기보다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돌아올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그러나 실제로 공연을 감상하고 난 뒤, 판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친절한 장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께서 나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신 이야기처럼, 친구들끼리 기숙사 방에 모여서는 엄청나게 웃긴 애가 풀어 놓던 '썰'처럼, 이야기꾼 박인혜를 통해 해학적이고도 또 가끔은 날카로운 모파상의 세 소설은 그렇게 흘러들어 왔다.


미리 소설을 읽었던 점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는데, 소설과 판소리 공연을 비교하면서 판소리로만 전달하고 강조할 수 있던 측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연 내내 소리 가사가 화면에 띄워져 있었고, 몇몇 가사는 소설 원문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다른 몇몇은 아예 새롭게 직접 작사한 부분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설에서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던 장면을 판소리에서 더 강조하기도 하고, 소설과 조금 다르게 각색하여 새로운 감상 포인트를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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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부한 감정 이입


판소리 각색의 가장 큰 효과는, 인물의 감정선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관중이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모파상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감정을 절제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문체다. 이러한 서술 방식으로,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등장인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평가하고 관망하는 제삼자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예컨대 소설 <보석>에서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랑탱은 충격에 빠져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서는 내내 울면서 밤을 지새운다. 그러나, 그 모든 장면은 상당히 건조하고 객관적이며 길이로 따지면 약 한 문단 정도의 분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판소리 <보석>은 "알다가도 모를 사랑"이라는 소리를 별도로 마련하여 랑탱의 처절한 슬픔을 서정적인 음악으로 표현한다. 이 소리를 들을 때, 먼 나라 프랑스에서 쓰인 소설인데도 '한'의 정서가 느껴지는 듯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소설 <콧수염>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이 소설은 세 단편 중 가장 분량이 짧은데다, 한 여성이 친구 뤼시에게 남성의 콧수염을 예찬하는 내용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구성되어, 과연 이것을 어떻게 판소리로 풀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소설을 읽을 때, 사실은, '이게 뭐야'라면서 콧수염에 대한 과도한 열정이 그저 웃긴다고만 생각했다. 그때 나에게 하나의 블랙 코미디 같았던 이 소설이, 판소리로 각색되니 아름다운 유년기를 파괴한 전쟁의 슬픔을 나누는 노래로 바뀌었다. 처음으로 <콧수염>이 슬픈 내용이라는 해석을 접하게 되었고, 한껏 몰입한 배우의 연기와 잔잔하게 깔린 음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흘렀다. 이처럼, 판소리에서 감정 이입이 가능했던 데에는 음악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만약 음악 없이 편지만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분명히 2%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텐데, 악기 연주와 창 그리고 연기라는 삼박자가 모두 갖추어진 덕에 몰입도가 극대화되었다. 개인적으로 악사들이 연주하는 생전 처음 보는 악기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인공적인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연주를 들으며 국악에 큰 자부심도 생겼던 것 같다.


<비곗덩어리>는 세 작품 중 가장 긴 분량을 자랑하여, 시간상의 문제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각색된 부분이 가장 많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소설을 읽으면서 공화주의자 '코르뉘데'가 다른 인물들과 뭉뚱그려 유형화하기 어려운 꽤 특색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판소리 공연에서는 언급된 장면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비곗덩어리가 큰 소리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장면은, 사실 소설 원작에서는 코르뉘데가 휘파람을 부는 장면이었다. 이 같은 세부적인 수정이 거둔 효과는, 다른 인물에게 비치는 스포트라이트를 온전히 '비곗덩어리'로 향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그의 처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2) 가벼운 접근의 용이성


판소리는 굳이 이분법으로 분류하자면 'show'와 'tell' 중에 후자에 해당한다. 배우가 창과 아니리를 통해 인물의 심리나 행동을 직접 전달해 주는 식으로 공연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판소리가 전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배우의 연기와 연출을 통해 'show'의 측면을 보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웃음을 유발하는 다양한 연출이 기억에 남는데, <콧수염>에서 콧수염이 남자의 외모를 결정한다고 말하자마자 콧수염을 길게 기른 고수에게 조명이 쏟아진다거나,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며 반응을 이끄는 식이었다.


고전 문학은 한 번 읽어냈을 때 성취감은 크지만, 왠지 엄숙하고 경직되어 보이는 탓에 쉽사리 도전하기 어렵다. 그런 고전을 전달하는 방식으로서, 자유로운 '웃음'이 허용되는 판소리는 상당히 유리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소개한 판소리의 해학성을 통해 사람들이 고전에 대해 가진 심리적 허들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각각의 이야기들이 '어젯밤 스친 꿈같은 그저 짧은 이야기'이며 한 단편이 끝나면 '훌훌 털어 버리고' 다가올 이야기는 '몸을 바짝 당겨' 들으라고 강조하는 것도, 판소리 특유의 해학 덕분에 가능했다. 고전을 꼭 진지하게만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처럼 가벼운 방식으로 접한다면 바쁜 현대인들이 높아지는 인문학적 소양에 대한 요구에 반응하기 더 용이하겠다고 생각했다.




왜 모파상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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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왜 판소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사실 그런 질문은 상대적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왜 굳이 모파상이어야 했느냐는 질문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동양적인 판소리와 너무나도 서양인인 모파상의 조화는, 생각보다도 훨씬 조화로웠다. 판소리 창법으로 '그레이톤'이라는 외래어 가사를 노래하거나, 서양식 정장 느낌이 나는 한복을 입는 등, 사소한 부분에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공연 자체는 동양이나 서양, 혹은 동서양의 조화와 같은 낡은 이분법적 수사로 표현하기에는 아쉬울 것이다. 애초 모파상의 작품은 서양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공통적인 인간 군상을 날카롭게 포착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삶의 보편을 담아내며, 우리가 아직까지도 수많은 소설을 읽어 내는 이유다.


이러한 보편성은 음악이나 연기에도 해당한다. 흔히들 바디 랭귀지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고들 말하는데, 그만큼이나 배우의 연기가 언어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나는 공연을 보러 갈 때 종종 주변 관객들을 둘러보곤 하는데, 그날은 객석 유일한 외국인 관객이 눈에 띄었다. 그 이후로, 어쩐지 자꾸만 그의 시선을 상상하며 공연을 관람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할 가능성을 제외하면 몇몇 외국어를 빼고는 거의 모든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 텐데, 과연 그에게 이 공연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왠지, 언어가 달라도 그가 충분히 이 공연을 즐기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처럼 판소리와 모파상이라는, 어색할 것만 같았던 두 요소의 완벽한 화합은 덜 서양적이거나 더 동양적이어서가 아니라, 소설의 보편성이라는 본질을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음악과 연기에 부드럽게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군상을 분석하고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작업은, 동서양은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중요한 우리들의 과제임이 틀림없다.

 

 

 

추워도 밖으로



나가며, 그날은 칼바람이 매섭게 불던 유난히 추운 밤이었다. 겨우 0을 웃도는 나쁜 시력 탓에 쓴 안경이 화근이 되어, 공연장에 들어서기까지 내내 김 서림으로 고충을 겪었다. 김을 닦아 내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입장 대기 줄을 서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온 감정은 일종의 놀라움이었는데, 내가 방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동안 이토록 많은 이들이 추위를 뚫고 문화생활을 향유해 왔다는 점에 묘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영화라면 몰라도 공연 예술 장르를 혼자 관람하러 온 적은, 이제는 오래전인 학교에서의 단체 관람을 제외하면 아주 오랜만이었다. 공연 감상은, 다른 장르의 그것과는 또 다른 설렘이 있는 경험이었다. 절취선을 따라 표가 찢어지는 순간부터, 자그마한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아, 둘 곳 없는 코트와 가방을 껴안을 때, 한껏 분주한 스태프분들과 기대 가득한 관객들의 표정을 바라볼 때, 그 모든 과정이 생생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이토록 가슴 뛰는 과정의 연속적인 언박싱 쇼와도 같은 공연 예술 관람은, 날씨도 마음도 추워지는 겨울에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즐기고 싶은 목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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