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의 길이가 관객의 방광의 한계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 [영화]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
글 입력 2023.01.3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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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화장실 좀"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한다는 행위는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것을 지켜본 후에 화장실을 가는 것까지가 포함되는 것 같다. 나는 화장실을 자주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일행에게 위의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보통 두 시간 정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영화를 볼 때 고민이 있다면 영화가 너무 길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이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건 2021년도에 <듄>과 <이터널스>가 개봉하던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영화적 체험'을 위해 <듄> 아이맥스로 관람했다. 영화가 길다는 얘기는 미리 들어서 영화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부터는 아무 음식과 음료도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길고 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터질 것 같은 방광을 달래며 다리를 떨고 있어야 했다. 영화는 좋았다. 비주얼과 사운드트랙도 훌륭했고 거대한 서사를 위한 배경 설명이 세련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잘 되어 있었다. 근데 길었다.

 

크레딧이 거의 다 올라가고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왔다. 심지어 나는 아이맥스 관 제일 마지막 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긴 긴 계단을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다. 그런 사건이 있었던 후로 나는 두 시간 반 짜리 영화는 별로 보고 싶지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터널스>는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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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다 긴 영화


 

참 이상하게도 명작이 되려면 영화가 길어야 한다는 믿음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대체 누가 만들어낸 헛소리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영화가 길면 상을 받기에 더 유리하다는 속설도 영화 업계에 있는 모양이다. 영화 관련 데이터 분석 사이트 스티픈 팔로우스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의 평균 러닝타임이 일반 개봉작 평균보다 20분은 훨씬 더 길었다.

 

물론 긴 명작 영화들은 많다. 특히 <아라비아의 로렌스>(3시간 38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3시간 58분)와 같은 영화가 그렇다. 이런 영화들은 여러 등장인물이 대거 등장하고, 이들의 갈등과 고뇌, 시대적 배경에 맞물리는 사건들을 친절하면서도 견고하게 표현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네 시간 분량의 영화를 집중해서 보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보고 나면 왜 이렇게나 긴 러닝타임을 유지했는지 납득이 된다.

 

그렇지만 이 영화들의 러닝 타임이 납득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터미션이 있다는 사실이다. 두 영화 모두 인터미션이 있고, 이 시간동안 관객들은 잠시 굳은 몸을 풀고 휴식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긴 이야기 사이에 잠시 휴식을 주어 중요한 부분을 한 번 짚고 넘어갈 기회를 주기도 한다.

 

 

 

'영화적 체험'


 

영화적 체험이라는 말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무 데에나 붙이는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일단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딱 그 순간 스크린 속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말로 정리해두려고 한다.

 

여러 영화 관계자는 코로나가 시작되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호황을 맞이하면서 극장용 영화에 대해 기대되는 것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집에서 편하게 '달릴'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라, 반드시 극장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고, 그런 영화의 조건 중 하나가 압도적으로 긴 길이라는 것이다. 집에서 긴 영화를 잠자코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는 좀 다른 의견이다. 영화적 체험을 제공하는 정말 좋은 영화는 굳이 길 필요가 없다. 어떻게 스크린 속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혹은 어떨 땐 관객이 스크린에서 튀어나오게끔 만드는 이야기도 영화적 체험을 제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경험은 수 시간에 걸친 긴 과정이 아니라, 장면과 장면에서 나오는 순간적인 느낌이다.

 

나는 영화가 그런 순간적인 체험을 더 많이 제공했으면 한다. 어떤 영화를 기억할 때 영화의 느낌과 분위기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콕 짚어서 어떤 장면과 그에 대한 나의 인상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다음은 내가 인생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영화 중 러닝타임이 짧은 작품들만 골라서 적어 놓은 리스트다. 거의 다 오래된 영화이기 때문에 극장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작은 스크린으로 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 영화들은 나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나에게 영화적 체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 - 82분

프란시스 하 - 86분

비포 선셋 - 79분

그래비티 - 90분

올란도 - 94분

해피 투게더 - 96분

화양연화 - 99분

레퀴엠 - 1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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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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