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5월의 크리스마스인 이유 - 푸른 잿빛 밤 [공연]

글 입력 2023.01.2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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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크리스마스의 날짜는 12월 25일이다. 본디 크리스마스는 겨울, 12월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다른 시기의 크리스마스를 하나쯤 더 알 수도 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전히 사랑받는 영화의 제목인 <8월의 크리스마스>. 여름에 만나 사랑을 하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이다. 이 영화는 특히나 여름 중에서도 가장 한여름인 8월에, 정반대의 계절인 겨울을 대표하는 크리스마스라는, 역설적이고 인상적인 제목 덕분에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흔히 아는 12월도 8월도 아닌, 5월에 크리스마스를 보낸 둘의 이야기가 있다. 뮤지컬 <푸른 잿빛 밤>의 볼프와 라이자의 이야기이다. 이들이 겨울도 여름도 아닌 봄에 크리스마스를 보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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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전쟁 끝나고 돌아온 군인 중에 제정신인 작자가 몇이나 될 것 같아?

 


볼프는 소위로 참전했고, 동료 중 혼자만 살아남았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그는 전우들의 유품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는 마지막 임무를 받고 절망한 채 함부르크에 도착한다. 전쟁 이후 매일 악몽에 시달리며, 전쟁을 겪은 그 시간에서 멈춰있다. 혼자인 것에 또 절망하고, 전우의 가족들을 마주하면 느끼게 될 죄책감과 괴로움에 술만 마시며 망가진 인생을 겪는다.


그런 그에게 라이자가 말을 건다. 라이자는 직업소개소에서 일하는 여성. 전쟁 이후 사람들의 삶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예전에 공방에서 일했다는 사람에게 도시 재건 사업을 소개해주고, 은행에서 일했다는 사람에게 중앙은행을 소개해준다. 활달하고 밝은 그녀는 참전한 사람들이 전쟁 이후에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더 괜찮은 날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고, 그리하여 술만 마시는 볼프에게도 야간 경비원 일을 소개한다.


그러나 볼프는 싸늘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이 진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반문한다. 공방에서 일했다는 사람은 이미 팔을 다쳐 원래의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하고, 은행에서 일했다는 사람은 마약 냄새를 풍겼기에 돈을 훔치러 갔을 것이라 일침을 가한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지금은 주정뱅이인 자신이 그런 걸 할 수 있겠냐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라이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아무런 근심 없이, 그저 더 괜찮은 내일을 향해 밝아 보이기만 했던 그녀는 뜻밖의 말을 한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왔잖아요. 적어도, 돌아왔잖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돌아갈 수 있어요.

 


어떻게든 돌아왔다면,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고, 전쟁 전으로 돌아간다는 게 힘든 일인 걸 알지만. 그래도 그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면, 그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라도 주어진다는 것. 숨이 붙어 돌아왔다면, 돌이킬 수 있는 삶이라도 있다는 것.


사실 라이자의 동생은 볼프의 동료였다. 라이자 역시 전쟁에서 동생을 잃은 후, 동생과 함께했던 시간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외쳤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동생을 기다리고, 동생을 떠올리며, 동생이 있었던 그 이전의 삶으로 갈 수 있다고, 가고 싶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동생의 부재를 느끼며, 동생이 없어도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끊임없는 자기암시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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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무용한 한낱 약속


 

인간이 그저 적과 아군으로만 나뉘는 전쟁이 일어나면, 그래서 목숨이 개개인의 존엄을 대표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면.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둘만 나누었던 약속, 둘만 아는 메시지, 둘만 나누었던 의미 따위는 모두 무용한 것들이 된다. 목숨에 비하면 한낱 부스러기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겨진 사람, 라이자는 더욱 그 약속을 나누었던 순간을 되새기게 되고, 동생 라디와 함께했던 추억을 두고두고 떠올린다.


볼프와 라이자는 같은 아픔을 기저에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다고 해서 그들의 아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때로는 소소한 행복도 느끼며, 결국에는 각자의 상처도 공유하며. 그 과정에서 볼프는 라이자가 자신이 유품을 전달해야 할 동료의 유가족이었음을 알고, 충격과 극심한 괴로움을 느낀 뒤, 라이자에게 5월에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달라고 한다. 라디가 마지막까지 원했던 것이 크리스마스트리에 누나가 준 부적을 매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5월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민다. 어여쁘게 예쁜 트리를 꾸미고, 둘만의 크리스마스가 완성되면, 볼프는 고백한다. 자신이 라디의 동료였으며, 유품을 전해주러 왔다고. 그리고 실은 자신이 라디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이라고. 라디와 볼프는 갑작스러운 적군의 공격에 동료를 잃고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처했고, 그 과정에서 볼프의 책망성 발언을 들은 라디는 패닉에 빠져 결국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어쩌면 무용할지도 몰랐던 그 약속, 그러나 그 약속의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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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이별도 없어야 하는 세대, 그러나 모든 도착의 주인인 세대


 

극의 초반부에서는 ‘전쟁 이후, 노력 한 대도 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 질문에 다른 대답을 가진 볼프와 라이자를 보며, 그러나 같은 상처를 앓는 둘을 보며 우리에게도 생각을 요구한다. 전쟁을 겪어 보았기에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볼프와, 전쟁으로 가족을 잃어 보았기에 더 전쟁이 없었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라이자. 어떤 대답으로 마음이 기울든, 둘의 마음이 모두 이해가 가고, 또 마음이 아프기에 점차 숙연해진다. 그리고 이 질문이 현재 세대에서 누군가는 직접 겪고 울부짖으며 답을 찾아갈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같은 세대를 사는 우리들의 최소한의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극의 후반부에서는 라디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며 셋 모두 고통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그 누가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총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공에 총을 쏘는 것조차도 무서워하던 어린 소년이 적군의 총격을 겪고, 자신의 동료가 죽는 상황에서도 남은 동료라도 챙겨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멀쩡할 수 있으랴. 라이자 역시, 동생의 죽음의 경위를 알게 되어 괴로운 와중에도, 이를 말해주고 이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겪는 눈앞의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어떠한 행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거주하는 곳이 달랐더라면 나도 이 셋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극의 마지막, 볼프는 라이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볼프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던 실제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책 「이별 없는 세대」의 구절을 차용한 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에게 깊이는 끝 모를 나락이다.

우리는 행복도 없고 고향도 없고 이별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젊음은 젊지 않다.

 

우리에게는 국경도 없고 제약도 없고 보호막도 없다.

그런 우리를 경멸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어린 시절 울타리에서 내쫓긴 세대다.

 


최소한의 이별도 없어야 하는 세대. 최소한의 보호망도 받지 못한 세대.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도착이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다.

 


국가의 보호망으로부터도 지켜지지 못했지만, 모든 도착의 주인인 세대라는 것이다. 일구어내고 지켜낸 모든 결과와, 이루어 낸 모든 도착에 자격이 있는 세대라는 것.


전쟁이란. 겪어보지 못한 나는 감히 가늠도 못할 괴로운 재앙이자, 갑작스러운 재해이자, 인지할 새도 없이 피부로 견뎌야 할 재난일 것이다. 어떨 때는 가까운 지구촌, 또 다를 때는 너무 먼 지구라는 행성 아래에서. 전쟁을 겪는 사람들과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한 인간으로서, 전쟁을 직접 겪지 않더라도 가져야 할 책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극이었다.


스토리의 개연성, 넘버 등 작품의 구성적 부분에 아쉬움이 있었더라도, 이런 시기에 이런 메시지를 담은 시의적절한 극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가히 손뼉 칠 일이 아닐까. 초연 공연의 마지막 날인 오늘. 조금 더 갈고 닦아져서 재연으로 또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끝으로 지금 현재에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될 극의 대사를 놓아 본다.


 

우리는 지금 그냥 겨울을, 밤의 나날을 견디고 있는 거래.

고독한 밤, 폭풍의 밤, 냉기의 밤.

그 모든 밤을 견뎌내고 나면 내일이 올 거라고 그러시는 거야.

 


잿빛 밤에서도, 밝은 내일을 꿈꿀 자격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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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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