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패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

무계획 부산 여행으로 맞이한 2023년
글 입력 2023.01.16 12:4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색다른 새해를 맞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굉장히 특별했다. 생에 처음 밟아보는 생경한 지역에서 스물여섯을 맞이할 줄이야.

 

가로등만이 겨우 갈 곳을 비춰주는 캄캄한 시골길, 존재 자체로 안심이 되는 동생들과 함께 있어서 였는지 뜨거운 숨을 식히는 차가운 밤 공기가 낯선 향을 품고 있는 줄도 몰랐다.

 

“와, 내가 경상도에서 스무 살을 맞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갓 스물을 맞은 막내 동생의 감탄 섞인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낯선 고장에서 새해를 맞았다는 것조차도 자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IMG_7212.jpeg

 

 

누구나 마음 속에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소망 하나 정도는 품고 살지 않을까. 별 다른 준비나 계획 없이 그저 발과 맘이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 낭만과는 거리가 먼 줄 알았던 나도 이런 작은 욕망은 품고 사는 것이었다.

 

천성이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두려움은 종종 게으름을 이기곤 한다. 대단히 알찬 계획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숙소와 교통수단은 미리 예약하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평소 신조였다. 적어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겁쟁이의 보루랄까.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여행한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외삼촌 댁으로 내려가는 날, 그 김에 가까운 부산까지 방문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전 날이 되어서야 날짜를 확정했다. 예상보다 하루 앞 당겨진 일정이었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 숙소를 잡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표를 예매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무슨 배짱으로 알람도 맞추지 않은 건지. 일어났을 때 상쾌한 기분이 들면 지각이라더니. 늦은 오전에 일어나서 모자를 눌러쓰고 역으로 향했다.

 

경유하는 역에서 시간이 두 시간 가량 붕 떴지만 애초에 일정이 없어서 였을까. 초조한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여유롭게 밥을 먹고 여행하지도 않은 지역의 기념품 점을 구경했다. 종교도 없으면서 염주를 사는 동생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오후 늦게 부산역에 도착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버스를 탔다. 사람으로 가득한 버스 안에서 매 여행마다 반복하는 후회를 했다. 보부상의 습관을 저버리지 못하고 과하게 챙긴 짐이 어김없이 문제가 됐다. 

 

겨우 자리에 앉아서야 부산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옆에서 통화를 하시는 아저씨의 말씨에서 부산의 향이 물씬 느껴졌다. 

 

겨울이라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정리하고 나니 해가 저버렸다. 생각해보니 겨울 부산 여행은 또 처음이더라. 캐리어와 사투를 벌이느라 이미 지쳐버린 우리는 몇 가지 후보 중에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는 대만족이었다.

 

여름이라면 북새통을 이루었을 한적한 바다의 야경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벌써 네 번째 방문한 부산이었는데, 무계획으로 온 이번 여행이 가장 편안했다.

 

물론 함께 여행하는 대상이 동생들이었다는 사실도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함께 살을 부대껴온 세월은 굳이 의식적으로 서로를 맞출 필요도 없이 마음을 통하게 했다.

 

목적지도 없이 발이 닿는 대로 움직이며,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눈에 띄는 건물로 향하는 우리가 참 우스웠다. 동네 주민인 마냥 편안한 옷차림으로 아무렇게나 네 컷 사진을 남겼다. 

 

다음 날도 계획은 없었다. 사실 얼추 세워 놓은 계획 마저도 전부 철회한 채 상황에 몸을 맡겼다. 식당도 검색하지 않고 그저 길을 거닐다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맛집이었는지 우리가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팅이 생겼다. 그런 소소한 행운이 큰 행복이 되었다.

 

지난 생일에 선물 받은 필름 카메라로 푸른 바다를 원 없이 담았다. 여름에 찍은 제주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테니 그 필름에는 바다만이 가득할 것이다. 

 

기호를 물어보면 그래도 산보다는 바다가 낫지 말하는 정도인줄 알았는데, 그냥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인가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던 계획을 무르고 차표를 바꿔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부산을 떠났다. 빡빡한 일정은 역시 무리인가 보다. 다음 번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겠다는 작은 다짐을 남긴 채 기차가 출발했다.

 

돌아가는 기차에 앉아있으니 스무 살, 친구들끼리 처음으로 떠난 여행지 역시 부산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나이를 허투루 먹는 것은 아닌지, 6년 사이 여행에도 기술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였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엉망 투성이였던 여행이었다. 숙소부터 일정까지, 하물며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는 처음의 쓴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시행착오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얼추 숙소를 고르는 눈도 일정을 짜는 능력도 발전했다.

 

그 때와는 정 반대의 여행을 마무리하며, 완벽히 실패였지만 그럼에도 추억이라는 이름 하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첫 여행의 실수담에 조금은 다정한 이름을 붙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실패는 그저 반면교사로서의 역할로 긍정의 소임을 다하는 줄 알았는데, 지난 여행들을 쭉 돌이켜보니 크고 작은 실수들이 가장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여행은 결국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탈피하여 불확실함에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대개 불확실함으로 비롯된 결과들은 나를 당황 시키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좋은 여행이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여행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중요한 건 나의 태도일 것이다. 

 

가령 이번 여행 역시 마냥 완벽하지는 않았다. 조금 사소하지만 분명 실패도 있었다. 떠나기 전 애타게 찾아 헤매 맛 본 물떡이 아주 실망이었다는. 전 날 우연히 발견한 시장의 물떡이 훨씬 싸고 맛있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허무하기는 했으나 이제는 이런 작은 실패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여행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유연한 태도인 것이다.

 

유한한 시간을 머문다는 점에서 내게는 삶도 하나의 여행과 같다. 실패에 한없이 좌절하고 작은 실수에도 곧잘 무너지곤 했던 나는 기꺼이 삶이라는 모험에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실수가 없는 여행이 밋밋하듯이, 실패가 없는 삶은 재미가 없으니까!

 

 

IMG_7313.jpeg

 

 

정신을 차려 보니 1월의 절반 가량이 지났다. 이십대의 절반이 지나간다고 2022년 마지막 날 유난스럽게 장문의 일기를 적었던 것이 어이없게도, 그 어떠한 새삼스런 다짐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2주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더라. 연초부터 여행하느라 몸이 지쳤다는 핑계로 겨울잠을 자듯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 보냈다.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내가 한심해지는 지금 간절히 바라는 건, 이미 과거가 된 지난 날들이 차라리 겨울잠이 됐으면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내가 열심히 달려나갈 추진력이 된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그 시간들이 낭비된 것은 아니겠지 하는 지독한 미련 때문에. 한 마디로 앞으로의 내게 많은 짐이 달려 있다는 말이다.

 

미래를 위한 현재를 살아가는 와중에 과거까지 등에 업고 살아가야 한다니. 업보가 참 무겁다.

 

새해 첫날의 마음으로 돌아가 스물여섯을 어떻게 보낼 지를 생각하다 낯섦에 유연해진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여행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태도가 꽤나 의젓해졌던 것이다.

 

내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색다른 서문이 주어진 만큼 스물여섯의 페이지를 수많은 모험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말로는 ‘도전’을 잘도 외치지만, 익숙하고 안전한 일상의 요새에 쉽게 숨곤 하는 나였다. 실패에 마냥 물러진 줄 알았는데 일년 사이 조금은 단단해 졌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뒤늦게 새해 다짐을 적어본다. 

 

거침없는 항해를 떠나보자!

 

 

 

IMG_5467.JPG

 

 

[김소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