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 리움미술관 [미술/전시]

글 입력 2023.01.0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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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한강진 부근에 위치한 리움미술관은 엄청난 규모의 현대 미술품과 한국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계속해서 현대 미술의 담론을 생성하고 확장하는 기획 전시 또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리움미술관은 현대미술관과 고미술관, 기획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미술관도 너무 재밌게 관람했지만, 가장 마음이 갔던 공간은 고미술관이었다. 심지어는 고미술품을 자주 보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발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리움미술관 멤버십에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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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 고미술 소장품은 4개 층으로 되어 있고, 각각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서화, 종교 미술품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전통의 미를 재해석한 현대 작품을 선보이는 <공예, 지금> 展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 리움 미술관의 색다른 매력 중 하나이다.

 

고미술품으로 가득한 전시 공간 한편에 현대 작품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역사와의 대화가 계속해서 이뤄지는 듯한 연출이 흥미로웠고, 현대미술품을 통해 고미술품만의 미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기도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고미술품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계기를 살펴보자. 한국의 고미술품은 어떻게 나를 그 매력에 슬며시 젖어 들게 하였는가?

 

한국의 고미술품은 세련미와 절제미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오랜 시간 바라보아도 눈이 피로하지 않고 편안하다. 게다가, 질리지 않는다. 은은한 매력 속에서 영롱함을 뽐내기 때문일까?

 

화려하고 자극적인 미술품에 익숙해져 있던 내 망각이 한 꺼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고미술품에서 돋보이는 형형색색의 화려함은 첫 시선에서 나를 사로잡을 수는 있겠으나, 결국 한국의 고미술품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자극적인 색깔과 장식은 나의 시선을 일부분에만 머물도록 강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고미술품은 아니었다. 흘러가는 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여유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나의 눈을 마사지해준다.

 

그렇기에 한국의 고미술이 갖는 미학적 가치가 크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고미술은 특정한 영역만 보도록 하지 않는다. 전체를 먼저 살펴보도록 이끈 후, 정교함으로 시선을 옮기도록 한다. 가까이서, 또 멀리서 바라보아야 보이는 섬세함이 자꾸만 그 작품으로부터 눈길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주제로 한 두 개의 관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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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전시관에 들어가자마자 고고하게 빛나는 매병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 매병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로 보물로 지정된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 매병’(고려, 13세기, 점토)이었다. 오묘한 비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매병이라는 형태가 서로 잘 어우러져 ‘고고함’을 눈앞에 시각화한 듯했다.

 

13세기의 고려청자는 후기에 접어들고, 본격적으로 상감 기법이 발전하게 된다. 비색은 계속해서 절정에 이르는 상황이었고, 상감을 도입하게 되며 고려만의 고유한 청자를 창작하게 된다. 그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위 작품이다.

 

비색은 오묘하다 못해 영롱하기까지 하다. 전체적인 아우라로 관람객을 이끈 후, 섬세함의 세계로 안내한다. 무늬를 파낸 뒤에 성분이 다른 흙으로 채워 넣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상감으로 표현된 구름과 학, 모란과 국화가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장식되어 있다. 새겨진 요소 하나하나의 섬세함에 감탄하다 보면, 다시 전체적인 그림이 보이며 그 수려함에 감탄하게 된다.

 

또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바로 국보인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고려, 13세기, 점토)이다. 미술사 강의 시간에 배웠던 ‘청자 진사채 표주박 모양 주자’(13세기 전반, 최향 묘 출토)와 유사한 형태였다.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에도 연꽃봉오리를 안고 있는 명상적인 모습의 연지동자가 보였고, 붉은 구리를 활용한 진사채 기법으로 풍성한 연꽃잎을 표현하였다. 백제의 금동용봉향로의 몸통 부분이 연상되는 연꽃잎이었다.

 

이 작품에도 역시 손잡이와 뚜껑을 연결하기 위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최향 묘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게 손잡이 위에 개구리를 얹어놓고 개구리를 손잡이 구멍으로 활용한 것처럼 보였다. 연못에서 개구리가 뛰노는 모습을 연출한 섬세함을 실물로 접했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선각과 양각 등 다양한 기법이 조화롭게 녹아들어 그 예술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백자를 주제로 한 전시관에서는 귀얄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이 눈에 띄었다. 바로 ‘분청사기 귀얄문 병’(조선, 16세기, 점토)이다. ‘귀얄’이라는 넓적한 붓으로 백토를 병 위에 바른다. 붓의 흔적이 매우 거칠고 시원하다. 철저하게 계획되고 조성된 섬세한 표면 장식 대신, 우연히 새겨진 무늬의 미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찰나의 붓 자국이 만들어낸 역동적인 무늬가 단정하고 차분한 병의 모습과 대조되면서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낸다. 마치 이우환의 ‘Dialogue(대화)’를 보는 듯한 경험을 하면서, 귀얄 기법이 찰나의 미학을 발굴하는 현대적인 면모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 다른 작품을 보면서 현대 한국 예술가를 떠올렸다. 바로 인화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중에서도 ‘분청사기인화 의성장흥고명 승렴문 대접’(조선, 15세기, 점토)가 인화 기법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접이라는 여유롭고 부드러운 형태가 도장으로 찍어낸 후 백토로 채운 작은 무늬들로 가득한 모습을 보니, 인화 기법의 섬세함과 만든 이의 노고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고도화된 기술을 요구하는 기법이어서 굉장히 귀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따라서 인화 기법을 사용한 그릇의 경우 관청의 이름과 제작지 등이 적혀있는 경우가 많아 역사적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당 그릇에서도 관청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바로 ‘의성장흥고’이다. 의성장흥고는 국가가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관청으로, 이 그릇이 국가의 요청에 따라 제작된 것임을 알려준다. 이렇게 인화 기법의 높은 수준의 난이도에서 나오는 ‘귀함’ 앞에서 절로 겸허해지는 경험을 하고 왔다.


한국 고미술품 미학의 핵심은 ‘조화’에서 우러나오는 숭고함에 있다. 작품의 구성 요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오묘하게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감을 은은하게 표현한다. 그 앞에서 작품을 감상하면, 영화 <전우치> 속 한 장면처럼 내가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한다. 혹은, 바라보는 것 자체로 명상적 분위기 혹은 꿈을 꾸는 듯한 ‘호접지몽’의 분위기를 선사한다. 그 어떤 것보다도 화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식과 조형을 감칠맛이 나도록 다룬 것 자체가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그 어느 것보다도 위대한 예술적 가치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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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미술품이 지니는 미(美)는 계속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자극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은은한 관심을 그에 계속 두고 싶어지도록 한다. 작품을 오래 볼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서로 비슷해 보여도 서로 그 빛과 선은 다르다. 김환기 작가는 우리 항아리를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김환기가 항아리에 대해 적은 이 문장이, 우리 고미술의 핵심적인 미학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장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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