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쨌든 사랑

글 입력 2023.01.0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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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사랑이니까” 

 


정말 예쁜 말이다. 이 짧은 문장 앞에는 어떤 문장과 사건들이 있었을까. 문장 앞에 생략된 서사들이 부딪혀온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사랑이니까. 소란스러운 사건들이 저 다섯 글자 앞에 가라앉는다. 힘들어도 아파도 그 마음이 나를 자꾸만 배신해도 어쨌든- 사랑이니까 괜찮은 거다. 그러니 계속하는 거다. 어쩌면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사랑이니까.


그 말은 사랑이 자꾸 우리를 아프게 해도 여전히 우리가 사랑해야한다는 뜻도 될 수 있고, 겉에서 보기에 어떻고, 누군가와의 관계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에도 어쨌든 사랑이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선인장 끌어안기’라는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선인장 같은걸 뻔히 아픈걸 알면서도 끌어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가시가 나를 관통하도록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 가시 너머의 무엇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껴안는 것.

 

그래도 사랑이니까, 어쨌든 사랑이니까 껴안는 것일 테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고슴도치들이 서로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왠지 그려진다. 씁쓸하고 따가운 무언가를 끌어안고, 딛고 서는 마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도 우리는 선연하게 사랑을 피어낸다. 한 때 인터넷에서 돌아다녔던 한 메모처럼.

 


OO아, 

너랑 하는 연애는 너무 즐겁고, 고통스러워

그래도 계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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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희망일까?


그러니까 내말은, 사랑을 하는 삶이 더 나은 삶인가 하는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사랑이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우면서도 껴안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궁금하지 않은가. 나에게 묻는다면 글쎄, 나는 아직 사랑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어딘가에서 본 사랑들을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마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마음, 사랑과 관련된 것들을 떠올려보고 작품에서 표현되는 사랑의 모습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연말을 맞아 넷플릭스에 새로 올라온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다시 봤는데, 사랑에 대한 재밌는 정의를 발견했다. 작중에서 피의자 신분이었던 여자주인공 서래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경찰인 남자주인공이 했던 사랑한다는 말이 담긴 녹음을 반복해서 듣다가 들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주인공 해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해준은 그녀에게 묻는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는 말을 했느냐고. (물론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분명해보이지만 그는 ‘사랑한다’는 단어를 꺼낸 적이 없다.)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녹음파일에는 해준의 목소리로 ‘나는 당신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러니 핸드폰(범행의 결정적 증거가 들어있는)을 먼 바다에 던져버려라’라는 말이 담겨있었다. 무너지고 깨어짐, 그것은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서툰 서래가 찾아봤던 붕괴의 사전적 정의이다.  그 모든 말이 그녀에게는 사랑의 고백으로 들렸던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경찰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영화 전반에서 드러냈던 그가 수사 내내 마음을 흔들려하고 종국에는 그녀가 살인사건의 진범임을 알고도 핸드폰을 버리라고 말해주는 그 순간 그는 사랑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어쩌면 그 붕괴의 순간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사랑을 왜 하는 것인지, 사랑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질문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 발견한 것은 사랑을 통해서 얻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수단으로써의 사랑), 사랑 그 자체가 그것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목적으로써의 사랑), 그것을 감수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기도 하다는 것이다(사랑의 본질).


다시 말해, 누군가를 위해 붕괴(영화 - 헤어질 결심) 혹은 가시(단편소설 - 선인장 끌어안기)까지 감당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 순간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써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붕괴될 것을 알면서도, 가시에 찔려 감당 못 할 아픔(혹은 슬픔)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이란 불가피한 것 아닐까. 비이성적으로 보이고 조금은 무책임해보여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최근에 사랑에 대한 문장들을 모아놓은 게시글을 봤다. 출처를 찾을 수 없어 그 중 문장 몇 개를 기억나는 대로 여기 적는다.

 


“우린 다 계획에 없었던 사랑을 하고 예상치 못한 크기로 사랑을 쏟게 되잖아요”

 


“사람을 좋아하는 건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다. 슬픈 일이 항상 기다리고 있고, 근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잖아”

 


‘아, 나 사랑하고 싶다’ 생각할 때보다 아무 생각 없을 때 시작하는 사랑이 더 강렬하다. 전자는 마음 한켠에 비워놓은 자리로 들어오는데, 후자는 마음 속 일부분을 깨부수고 그 자리로 침입해버리니까.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 정말 있긴 있다. 거대한 자연의 의지 앞에 갑작스레 놓인 것처럼 내 의지는 아무 힘도 없이 사그라들고 이것에 굴복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느끼는 운명론적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그것이 친구든 동료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끌리고 반한다는 것, 서로를 아끼고 응원한다는 것, 같이하면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어떤 이득도 이유도 없이 시작되는 그런 순간의 진심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이 인생의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사랑이 있는 삶은 우리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준다. 함께 걸을 사람 하나쯤 있다면 ‘어쨌든’ 괜찮을 것이다. 어느 날에는 괜찮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쨌든 사랑이라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득실을 따져서 하는 것은 거래이지 사랑이 아니다. 이득을 바라지 않고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고, 반대로 대단한 무언가를 주지 않고도 부족한 모습, 가시 같은 결함을 가지고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는 것.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조금 더 성장하게 만드는 것일테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를 진정으로 살게하고, 바꾸어 놓기도 한다.


사람들은 쉽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지 말라고 말하고, 해가 되는 사랑은 그만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부디 그런 사람들을 바보취급하지 말아주시길.


아픈 사랑을 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괜찮을 거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어쨌든 사랑이니까,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사랑은 틀리지 않았다고. 그런 순간에도 서로 껴안는 것이야말로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불가피한 사랑을 순간을 겪고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응원을 보낸다.

 

어쨌든, 사랑이라고.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김초엽, 소설집 - '방금 떠나온 세계'에 수록된 단편소설 <로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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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 단편소설 <선인장 끌어안기>과 전시 <어쨌든 사랑>, 같은 제목을 가진 누군가의 미발표 자작곡, 그리고 불가피한 사랑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로부터 영향을 받아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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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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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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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하늘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마음 속 깊이 와닿는 문장들이 참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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