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ge를 따라서] 처연한 마음의 향, 겔랑 미츠코(Mitsouko)

글 입력 2023.01.0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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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오크모스에 관하여 글을 썼다. 한가지 향조에 관해 설명하면 다음 글에서는 해당 노트를 지닌 향 몇 가지를 소개하곤 하는데, 알데하이드 노트에서는 샤넬의 넘버파이브(No.5) 한 가지만을 소개했었다. 해당 노트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향이기 때문이다.

 

오늘 오크모스 향에서도 단 한 가지의 향수를 소개하려고 한다. 오크모스 노트에서는 물론이고 향의 역사에서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향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를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향수의 살아있는 역사, 겔랑의 미츠코(Mitsouko)를 소개한다.


사실 미츠코를 들어본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샤넬의 No.5는 향에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 들어본 경험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겔랑(Guerlain)이 향수에 있어서 유서 깊은 브랜드라는 점도 낯설게 여겨질 것이다.

 

미츠코는 겔랑 가문의 세 번째 조향사였던 자크 겔랑(Jacques Guerlain)이 조향하여 1919년 소개된 향이다. 2019년에는 무려 100주년을 맞았으니 근현대를 모두 겪은 살아있는 역사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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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코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면 프랑스 브랜드에서 나온 향수에 일본 여자의 이름이 붙은 것이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미츠코는 당시의 인기 소설인 <전투(La Bataille)> 속의 등장인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는데, 1905년 러일전쟁 동안 일본 함대에 탑승한 영국 장교와 은밀한 사랑에 빠진 유부녀 미츠코를 모티브로 한다.

 

소설 속에서 이 일본인 여성은 담담하고 숭고하게 그녀의 사랑을 지키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미츠코의 향도 그처럼 어딘지 조용한 동양 여성이 떠오르게 만든다.


시대를 풍미했던 향인 만큼 많은 유명인이 미츠코를 뿌렸다고 전해진다. 잉그리드 버드만, 브리짓 바르도같은 세기의 미인들은 물론 찰리 채플린 같은 남성들까지 말이다. 20세기 초의 전설적인 발레 극단의 설립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극장 커튼에 미츠코를 뿌렸다고 한다.

 

유명인의 일화 중 가장 극적인 이야기는 진 할로우다. 진 할로우는 매일 저녁 8시마다 미츠코를 뿌렸다고 한다. 그런 와중 그녀의 남편 폴 베른이 결혼 2개월 만에 총으로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미츠코를 온 몸에 들이부어 흠뻑 젖어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저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어쩐지 미츠코의 음울함이 더욱 부각되는 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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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할로우

 

 

미츠코의 향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1912년에 출시된 겔랑의 또 다른 향수 뢰르블루(L’heure Bleue)에 관해 짧게 이야기해야 한다.

 

뢰르블루, 즉 푸른 시간이라는 뜻의 이 향수는 세계 1차대전 발발 2년 전에 출시되었다. 평화로운 낭만의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뢰르블루는 미츠코와 정반대의 지점에 놓여있다. 아이리스의 고운 분내와 보랏빛의 헬리오트로프는 겹겹이 층을 이뤄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연상시킨다. 화려한 우아함을 지닌 뢰르블루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시대를 대표한다.


뢰르블루의 출시 이후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벨 에포크는 끝났고, 침울한 전쟁의 상처만이 가득 찼으며, 미츠코가 탄생했다. 뢰르블루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의 화려한 모습을 담았다면, 미츠코는 전쟁의 먼지가 가라앉은 인간의 깊은 심연을 풀어내었다.


첫 시작은 가볍게 반짝이는 베르가못이다. 곧바로 연하고 말간 복숭아향이 뒤섞이는데, 바로 알데하이드 C14이다. 부드러운 복숭아털이 연상되는 이 합성향료는 1908년 탄생하여 당시로서도 혁신적인 최신 향료였다. 일반적으로 복숭아 향수라고 불리는 새콤달콤한 과즙 느낌의 향이 아닌, 마치 피부 위에 찬찬히 내려앉은 살굿빛 복숭아를 연상시킨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자같이 어두운 오크모스와 어우러지며 미츠코는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향취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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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코의 향기는 이 이상으로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현대적인 향들은 직관적으로 재료가 느껴진다면 미츠코는 그렇지 않다. 이미 한 덩어리로 완성되어 그 자체로 작품이다. 뿌리자마자 이미지나 장면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천천히, 어느 정도의 시간을 미츠코와 함께 흘려보내야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미츠코가 어떤 향이냐 물으면 쉬이 대답하기 어렵다. 귀엽지는 않지만 관능적이지도 않다. 화사하고 밝지는 않지만 무작정 슬프지만도 않다. 굳이 나의 대답을 해보자면, 겉은 무던하지만 속은 처연한 여인의 마음이 그려진다.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실제로 미츠코의 향이 그렇기도 하다. 미츠코의 향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은 이에 있지 않을까. 뭉쳐있는 사람의 마음을 말로 풀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깊은 마음의 향, 그게 미츠코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식어다.


현재 국내의 겔랑 매장에서는 미츠코를 만날 수 없다. 그다지 수요가 없는 이유로 수입되지 않는 듯하다. 쉬이 접할 수 없게 되었지만 좋은 기회에 미츠코를 만나게 된다면 꼭 한번 향을 느껴보길 바란다.

 

마냥 향기롭지도 예쁘지도 않은 향이지만 그 안에서 마음을 건드리는 한 줄기의 이야기를 느낄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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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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