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기억과 망각 사이의 글쓰기 - '300개의 단상' 서제인 번역가

글 입력 2022.12.3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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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고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단 한 가지도 떠올릴 수 없었다. 

 

- 『망각 일기』, 8p

 


2022년이 다 갔다. 한 해를 돌아보니 문장으로 쓸 수 있는 기억보다 그렇지 않은 기억이 훨씬 더 많다. 모호한 잡념이나 특정한 느낌, 단편적인 장면처럼 추상적인 덩어리로만 존재하는 기억이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흩어진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록을 습관으로 삼는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망각에 맞서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한 해의 끝과 새로운 해의 시작이 만나는 12월, 동시 출간된 세라 망구소의 책 『300개의 단상』과 『망각 일기』는 기억과 기록, 그리고 망각에 대하여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세라 망구소는 미국 문단에서는 이미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로, 시와 소설을 비롯해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산문을 쓴다. 국내에는 이번 작품들로 처음 소개되었다. 『300개의 단상』에서는 세라 망구소가 시간 속에서 건져 올린 짧지만 깊은 300편의 글을, 『망각 일기』에서는 25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온 일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지난 23일, 『300개의 단상』을 번역한 서제인 번역가를 만났다. 한국어가 아닌 원어로 만난 세라 망구소는 어떤 작가였을까. 그 생생한 첫인상과 함께 번역가의 일과 번역이란 작업에 대해서 애정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궁금한 작가, 세라 망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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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번역하는 서제인이라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한 지는 3년 정도 되어 가는 것 같아요. 주로 출판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번역하신 세라 망구소의 『300개의 단상』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세라 망구소의 작품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요, 번역가님은 세라 망구소라는 작가를 원래 알고 있었나요, 아니면 이번에 번역을 맡으며 새롭게 알게 되었나요? 어떻게 세라 망구소와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몰랐던 작가였는데, 출판사에서 제안을 먼저 주셨어요. 처음 『300개의 단상』을 받고, 두께가 얇아서 소품 같다고 생각했어요. 검색해보니 세라 망구소는 이 책을 다른 책의 집필을 미루며 일종의 ‘딴짓’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작가도 딴짓으로 쓰기 시작했다니, 혹시 번역도 딴짓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웃음) 다른 책을 번역하면서 틈틈이 쉬어간다는 기분으로 이 책의 번역을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짧은 글이 300개 있으니까 하루에 3~5개 정도 번역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분량이 짧은데도 번역이 쉽지 않았어요. 함축적이고 밀도 높은 문장이 많아서 나중에는 한 개의 글을 하루 종일 고민하곤 했습니다. 

 

 

저도 각 글마다 생각해볼 지점이 많아서 생각만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느꼈어요. 그럼 『300개의 단상』을 번역하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려웠는지 좀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까. 번역하면서 아리송할 때가 많았어요. 번역할 때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늘 상상하는데, 이번에는 그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죠. 양가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 글이 많았거든요. 처음에는 좀 혼란스러웠지만, 번역을 해나가며 글의 방향이나 거기 담긴 감정, 생각이 꼭 어느 한쪽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을 필요는 없겠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번역가님이 원문을 읽을 때 받은 느낌과 한국 독자가 한글로 된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을 하며 번역가님이 만나고 느낀 세라 망구소는 어떤 작가인가요?


한마디로 말하면 ‘궁금한 작가’였어요. 세상에는 굉장히 여러 종류의 작가가 있잖아요. 글을 특히 잘 쓰는 작가, 세상에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작가, 재미있는 작가… 세라 망구소는 제게 ‘자꾸 호기심이 드는 작가’였어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떻게 글을 써왔을까 궁금하고 신기했죠. 그냥 글을 잘 쓴다고 해서 모든 작가가 이런 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아요. 


사고방식, 표현 방식이 정말 독창적이었고, 인생의 쓴맛을 아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책에 나오는 300개의 단상은 다소 어두운 색조를 띤 농담에 가깝거든요. 그렇다고 희망을 완전히 놓아버린 ‘냉소’는 아니지만, 정말로 많은 일을 겪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어린 사람의 어깨를 치며 건네는 짓궂은 농담 같달까요. 


작가 본인이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다는 언급이 책 본문에 종종 나오는데 이 책만으로는 다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작가가 자신의 투병 생활을 썼던 회고록 『쇠락의 두 가지 유형(The Two Kinds of Decay)』를 원문으로 읽어보기도 했어요. 그걸 읽고 나니 이 작가가 쓰는 글의 맥락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번역하는 데에도 도움을 받았어요.

 

 


망각을 위한 기록



저자 사진 Sarah Manguso author photo c. Joel Brouwer 복사본.jpg

세라 망구소

 

 

『300개의 단상』에 나오는 300편의 짧은 글 중 번역가님이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면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왜 그 부분이 좋았는지 이유도 듣고 싶습니다.

 


희망을 포기하고 괴로움에 굴복하는 일. 부처를 능가하는 완전한 초월에 이르는 일. 이 두 가지는 딱 한 가지 작은 특징만 제외하면 똑같아 보인다. 그것은 미소다. 미소 짓는 걸 잊지 말자.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107쪽에 나오는 글이에요. ‘그것은 미소다. 미소 짓는 걸 잊지 말자.’라는 문장이 특히 인상 깊었어요. 제가 유머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유머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좋은 쪽으로 쉽게 뒤집곤 하더라고요. 번역하면서 느낀 세라 망구소 역시 유머에 능한 사람이에요. 꼭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아니었더라도 그걸 자기 방식대로 소화한 다음, 웃으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그런 모습이 이 문장에 포괄적으로 담겨 있는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아요.

 

 

이 책을 추천한다면 어떤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한동안 긴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잠깐 여백의 미를 즐기면서 쉬어가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또는 쉬어가려다가 뒤통수 맞고 싶은 독자요. (웃음) 여백이 많은 책인데, 읽다 보면 그 여백이 독자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지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세라 망구소의 책을 읽고 번역하는 일은 번역가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번역가님의 삶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변한 게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작가가 가진 기록과 기억에 대한 감각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게 가장 큰 변화였어요. 세라 망구소는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25년간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저는 그게 뭔지 너무 궁금했어요. 왜 그렇게 모든 것을 언어로 붙잡아두고 싶었는지 계속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번역을 하면서 이 사람이 글을 통해 어떤 시간을 짧게 압축해서 비워내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게 이 사람에게는 그 시간을 통과하는 방법이었겠구나 싶었어요. 같이 출간된 『망각 일기』를 보면 세라 망구소는 자기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너무나 압도적이고 벅찼다고 말해요.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어서, 글을 쓰면 생각을 그만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썼대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일의 무게를 덜어내려 했던 것 같아요. 


동시에, 그런 작업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망각에 대비해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더 소화하기 쉬운 형태로 머릿속에 갖고 있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기록은 기억에 대한 집착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망각하기 위한 것이기도 한 거죠.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가 이어져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번역가님도 기자, 편집자, 작가 등을 넘나들며 글을 다루는 일을 계속해오셨다는 설명을 읽었는데, 기록에 대한 강박은 없는 편인가요?


네. 일단 그렇게까지 열심히 기록하기에는 게으르기도 하고요. (웃음) 저는 오히려 언어로 기록하지 않고 지나가는 시간이 제 본질에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해서요. 언어를 통과하며 왜곡이 되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다 붙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체념한 것 같아요. 심지어는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겠다는 욕심도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탐정과 닮은 번역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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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형식의 책이라 어떻게 읽을지 난감한 독자도 있을 것 같은데, 먼저 읽은 독자로서 추천하고 싶은 독서 방법이 있나요? 또는 책을 읽기 전 알아두면 좋을 정보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각 글이 워낙 짧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하루에 몇 편씩 읽어도 되고. 하루 한 편씩 매일 읽는 것도 좋을 듯해요. 그리고 이 책 속 단상은 질문이기도 해요. 각 단상은 독자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며 질문 던지고 있죠. 그러니 읽으면서 독자 자신의 의견도 한번 써보고, 작가의 생각에 반론을 펼쳐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떻게 느꼈는지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알아두면 좋을 정보는… 저는 책을 읽다가 궁금해져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본 경우인데, 처음에는 역시 아무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책 이야기도 좋지만, 번역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번역하신 지 3년 정도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 3년 동안 작가님에게 번역은 무엇이었나요?


건조하게 말하자면 번역은 제게 일이고 직업이고 생계, 노동입니다. 직업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주어지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어요. 


또 번역은 제 자아가 비대해지지 않도록 깎아내는 역할도 해요. 번역을 할 때면 다른 사람의 텍스트를 읽으며 겸허해지고, 나의 자아가 앞으로 나설 여지가 많지 않아서 좋아요. 생각이 너무 많을 때면 머리가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오염되었다는 느낌도 드는데, 번역으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며 머리가 정화돼요. 내가 나 자신에게 질식해 죽지 않도록 도와주죠.

 

 

번역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는 답변이었다고 생각해요. 번역가님이 생각하는 번역 작업이란 무엇인지 좀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번역은 탐정이 하는 일과 비슷해요. 텍스트가 곧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되는 거예요. 모든 감각과 상상력을 동원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 해요. 쓰여 있는 것만으로는 다 알 수가 없기에 온갖 걸 다 검색해보는데, 그게 참 재미있어요. 탐정 일과 다른 점은, 범인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고 그 일을 재현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번역을 흔히 혼자 하는 일로만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경청하고 대화하는 일의 연속이에요. 사람마다 다른 논리구조를 갖고 있기에 같은 문장을 봐도 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거든요. 작가의 논리구조, 번역가의 논리구조, 편집자의 논리구조는 모두 다르기에 한 문장을 놓고도 서로가 다른 점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려 노력해야 해요.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우리가 이렇게 다른 데도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음을 발견해내요. 그게 이 작업의 즐거운 부분입니다. 

 

 

번역가님 인터뷰가 아마 제가 하는 2022년 마지막 인터뷰가 될 예정인데요, 다가오는 2023년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시고 싶은가요?


아무 이유도 없이 에너지가 차오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모두에게 여러모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서요. 

 

 

마지막으로, 『300개의 단상』을 읽게 될 독자분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한테 번역 작업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롭고 좋은 작가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일에 참여하는 경험이기도 해요. 이번 책을 번역하며 세라 망구소라는 작가의 매력을 알게 되었기에, 작가의 다른 책들도 국내 번역이 되어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니 독서가 즐거우셨다면 어딘가 짧게라도 감상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 작가의 더 많은 작품을 나중에 한국어로 읽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아요.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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