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스카팽의 한계, 어쩌면 몰리에르의 간계 - 연극 '스카팽'

글 입력 2022.12.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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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에서 제작한 임도완 연출의 연극 <스카팽>을 관람했다. <스카팽>은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스카팽의 간계>를 원작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연극의 전반적인 형식은 16~18세기 이탈리아에서 발달하여 당시 서유럽을 풍미했던 극양식인 ‘코메디아 델라르떼(Commedia dell'arte)’를 따른다. 이는 문자 그대로 ‘아르떼(arte)’, 즉 배우의 기술과 기지를 활용하여 즉흥적으로 극을 채워나가는 코미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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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스카팽>을 이야기하기 전에, 원작인 몰리에르의 희곡 <스카팽의 간계>의 줄거리부터 간단히 짚어보자.

 

극 중 배경은 17세기. 옥따브와 레앙드르라는 두 남성이 각각 이아상뜨와 제르비네뜨라는 두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권위적인 가풍에서 자란 옥따브와 레앙드르는 신분이나 출신을 알 수 없는 여성들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고 숨긴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아버지인 아르강뜨와 제롱뜨가 연애 사실을 알게 되고, 두 아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인 스카팽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하인 스카팽이 얼렁뚱땅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일을 벌이고 수습하는 것이 남은 내용 전부다. 연극 후반에서는 알고 보니 이아상뜨가 제롱뜨의 딸이었고, 제르비네뜨가 아르강뜨의 딸이었음이 밝혀진다. 즉 두 여성은 미천한 신분의 고아가 아니라 각 아버지의 숨겨진 자식이었다는 얘기다. 결국엔 두 집안이 서로 부잣집 겹사돈을 맺으며 이야기는 끝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스카팽의 간계>는 전형적이고 허무맹랑한 플롯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클리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에게 통쾌함과 즐거움을 준다. 풍자와 해학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낮은 계급(하인 스카팽)이 높은 계급(부자 아르강뜨와 제롱뜨)을 골탕 먹여 입맛대로 갖고 노는 설정은 우리 고전 마당극과 탈춤에서도 자주 쓰인 것이니, 한국 관객의 정서에도 익숙하다.

 

이 사실을 견지하듯, 국립극단의 <스카팽>에서는 몰리에르가 무대에 직접 등장하여 “출생의 비밀과 같은 소재가 뻔해 보여도, 나중의 TV 드라마에서 다 써먹는다”와 같은 농담을 건넨다.

 

그렇다. 임도완 연출이 각색한 <스카팽>의 무대에는 극작가인 몰리에르가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해, 무대 안의 작은 무대에서 열리는 자신의 연극을 지켜본다. 액자식 구조를 활용하여 극의 재미를 높이고 볼거리를 늘린 것이다. 몰리에르 캐릭터는 이따금 객석을 향해 자조를 던지거나, 현재 한국 사회를 가볍게 겨냥한 개그를 활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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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을 거치며 원작에 없는 ‘몰리에르’가 추가되면서, 전지적 관찰자이자 연극의 창작자만이 말할 수 있는 대사가 생겨났다. 예를 들면 극의 방향이 엇나갈 때마다 배우들을 향해 ‘(계속) 연결해’를 외치며 명령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원작의 스카팽에게 있었던, 냉소적이며 비판적이지만, 복잡한 인물 관계를 제 맘대로 조정하며 애쓰기도 하는 특성이 오히려 몰리에르에게 옮겨졌다. ‘스카팽’이 극의 제목인데, 정작 스카팽의 서사는 되려 얄팍해진 꼴이다.

 

스카팽의 간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주고 매력적인 지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힘은 그가 다른 인물과 맺는 갑을관계에서 명확히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자본, 신분, 명예, 어떤 측면에서도 스카팽은 가진 것이 없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영특하고 비판적으로 세상을 가지고 놀 줄 알기에, ‘높으신 분’들에 결코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각색된 <스카팽>에서는 스카팽이 본인의 자아로 설계했던 작전에서 벗어나 극 외부의 몰리에르에게 영향을 받는다. 이는 희극적으로 확실한 웃음을 줄 수 있는 장치지만, 기존의 인물이 가졌던 매력을 반감시키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설정이다. 따지고 보면 스카팽도 ‘몰리에르의 간계’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다. 그러니 원작과 비교하여 주인공인 스카팽에게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원작의 형태를 변형했음에도 몰리에르의 등장이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몰리에르를 활용해 서사적 빈틈을 영민하게 채웠고, 흐름이 지루해질 때마다 분위기를 환기하여 관객을 다시 무대로 이끄는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빈틈없이 모든 장면을 설명하고 채우려는 모습에서는 연출가의 자아가 강하게 반영된 캐릭터로 느껴지기도 했다.

 

몰리에르의 등장 말고도, <스카팽>에서는 현대적 각색을 위해 원작에서 고위 계층의 부자 남성이었던 아르강뜨를 여성 캐릭터로 바꾸었다. 그래서 아르강뜨와 옥따브는 모자관계로 그려진다. 극 중에서 아르강뜨는 제멋대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아랫것’들을 무시하는데, 우스운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을 주도했던 재벌가의 여러 인물이 떠오르는 설정이었다.

 

이외에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코메디아 델라르떼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무대 하수에 음악감독이 있어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배우의 움직임에 맞추어 계산된 효과를 넣어주는 것이었다. 임도완 연출의 여러 작품에서 보였던 특징으로 기억한다. 이에 더해 배우들이 직접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심지어는 랩과 비트박스까지 한다. 순간적인 합에 맞추어 동작과 연주를 이끌어가는 모습에서 그들의 피나는 연습량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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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신났다. 다만, 이 유쾌한 감정 기저에는 나조차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웃고 싶지 않은 감정’ 또한 자리했다. 상당히 잘 계산된 연출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기에 깊은 생각 없이 웃고 넘기기에는 편했지만, 다시금 내가 느꼈던 불쾌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었다.

 

옥따브와 레앙드르는 ‘스카팽의 간계’에 속아 넘어가는 인물이다. 권력 계층에 종속되어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우매한 성정을 지녔으며, 상황을 개선할 의지보다는 신세를 한탄하며 부조리를 재생산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스카팽과 함께 묘기를 보이며 관객에게 박수를 받는다. 주종 관계는커녕 오히려 춤과 노래로 달아오른 극장 속에서 ‘우리는 모두 친구’와 같은 분위기로 변모한다.

 

물론 모든 극이 해피엔딩을 거부하고 사회를 개혁하자는 정치적 의도를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작의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 머리 꼭대기에서 계략을 꾸미는 스카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몰리에르가 의도했던 것은 이러한 갑을 관계성을 전복시킴으로써 탄생하는 사회 풍자일 것인데. 옥따브와 레앙드르가 오히려 멋들어진 가무를 보여주며 매력을 뽐내니, 그들의 지질함과 못난 성정도 눈감아주게 되는 이상한 결론에 다다른다. 갑질하는 철부지면 뭐 어떤가. 부잣집끼리 결혼해서 혈연주의 계급에 종속되면 그만이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극의 결말을 마냥 통쾌한 웃음으로 덮어버리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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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따브와 레앙드르의 위치가 애매하다 보니, 그들과 사랑으로 엮이는 이아상뜨와 제르비네뜨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두 인물 또한 현대에 맞추어 각색된 것이 어느 정도 보였지만, 여성 캐릭터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이아상뜨는 조신하고 정숙하다. 사회적으로 굳어진 성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청순한 여성의 모습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가끔 말 몇 마디를 던지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도 기억에 별로 남지 않는 가벼운 대사였다. 가난하고 연약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인물이니까. 적극적으로 각색된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인물의 매력이 너무나 납작하게 그려진다.

 

작품에서 고루한 성 관념을 답습하는 것은 이아상뜨 뿐만이 아니다. 남성 캐릭터들도 소위 말하는 개그씬에서 우습게 묘사되어야 할 때는 하이톤의 목소리를 자동 장착한다. 이성에게 작업을 걸 때는 중저음으로 변한다. 코미디에 진지하게 딴지를 걸면 피곤해진다는 것,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 관객과 발을 맞추기를 표방하는 희극이 아직도 이런 낡은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반면에 괴상할 정도로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고, 다리도 쭉 뻗어 의자에 시원하게 올리는 제르비네뜨는 ‘남자처럼’ 보이는 여자로 묘사된다. 괄괄하고 시원한 성격으로, 이아상뜨와 확연히 대비된다. 두 여성 캐릭터를 나란히 놓고 보니, 양쪽 모두 소비적으로 사용된 것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웃음 포인트가 제르비네뜨에 더 맞추어진 것 또한 위와 같은 이유일 테다.

 

줄곧 부채를 흔들며 레앙드르를 우아한 몸짓으로 유혹하던 제르비네뜨는, 결말을 앞두고 괄괄하던 성격을 버리고 얌전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대중이 생각하는 고착된 남성성을 장착한 여성이, 결혼하기 적합한 여성이 되어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해피엔딩을 이룬다. 관객은 정상성에 편입되려 애쓰는 제르비네뜨를 보고 피식 웃는다. 묘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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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편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관객이 대다수일 것이다. 난 어떨 때는 그런 관객들이 부럽기도 하다.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누군가를 마음 편히 지켜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일 테니까. 그러나 나에게는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분명히 자리한다. 그리고 연극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희극이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연극은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보존하면서. 극 중 몰리에르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의식적으로 삶과 연극을 ‘연결해’야 한다. 계속,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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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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