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礙 6

한 해의 끝
글 입력 2022.12.2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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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코로나에 다시 걸린 듯하다. 처음에는 조금 무거운 숙취겠거니 했지만, 사실 그게 내 바램이었는데, 숙취에 좋다는 것을 몽땅 때려넣어 놓으니, 찬찬히 구토감이 가시는 공간을 통해 몸살기가 물큰히 들어차 버린다. 어제는 참 힘들었다. 미리 와서 면접자들을 배웅하고 안내해야 했는데, 그들보다도 늦게 출근을 하였으니 혼이 날 각오 정도는 했지만, 사실 그런 데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그러니까 면구스러운 얼굴과 허둥대는 몸짓을 갖추어보기에는 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그 전날의 술이 문제겠거니,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 전날은 목요일, 여느 때 같은 퇴근길, 오산에서 이태원은 참으로 먼 거리라 근처 간단히 끼니라도 때워야겠다는 심산으로, 사실 방금 막 광역 버스 한 대를 놓친 참이라 이 추운 겨울 거리를 20분간 서 있을 각오가 서지 않아서 눈에 잡히는 아무런 곳에나 들어서 버린 것이다. 백스카레였나, 그런 이름이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이미 그때부터 기침가레가 끓기 시작하였으나, 한 놈이 물어온 역병에 팀 전원이 기침을 앓고 있었으니 그저 때늦은 감기려니 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카레에서는 신맛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가격은 11,000원이라니, 오산의 부동산 가격을 고려하면 폭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만큼 물가가 상승한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곤 말았다. 


불만스러운 끼니를 때우고 나와 집으로의 머나먼 길, 그보다는 더 가까이서 날 기다리는 추위에 그만 풀이 죽으려 했다. 오산시청에서 우리 집을 가려면, 5300번 광역버스를 타고 1시간, 강남에서 환승하여 또 우리 동네에 오는데 1시간이다. 버스 타이밍을 잡으려 들어선 밥집이었지만, 중간에 버스 시간 체크하는 것을 잊어버려 결국 바깥에서 13분을 서 있어야 했다. 오한이 밀려들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것에 비해 아무렇지도 않은 날씨에 내가 너무 자만했다. 하필 히트텍을 벗어던지고 나니 진짜 추위가 몰려 왔다. 어쩌면 몸살기 때문이었을지도. 그리고 그런저런 구차한 사정과 그 비슷하게 구차한 연말생각이 아무도 없이 컴컴한 플랫폼 안으로 겨울기단과 함께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때가 22일이었지? 24일은 토요일, 누군가의 설레는 시간이겠지만 내게는 당직출근을 하러 아침 새벽 공기를 찢고 나와야 하는, 그런 자질구레하고도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래서 조금 더 초라한 나날이 그날 내 퇴근길 앞에 물씬 놓여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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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연락이 왔다. 고객사 대표 2명이 우리 회사 영업사원과 강남에서 한 잔 걸치고 있단다. 오지 않겠느냐 물었다. 평소라면 다음날 6시의 이른 기상과 머나먼 출근길과 또 기나긴 금요일 하루를 생각해서라도 목요일 저녁에 술은 사양이었겠지만, 여차저차하여 금방 가겠노라 말했다. 광역버스의 장점은 오직, 그 수많은 사람을 품은 양철 벽에 서려 있는 불쾌할 정도의 체온들과 그에 대조되도록 시원하게 뚫려 있는 버스전용차로이다. 겨울엔 이런 게 다 복이다. 그러나 그날은 왜 그랬을까. 광역버스의 차창은 원래 뿌옇게 김이 서리곤 하는데, 쨍하니 투명한 것이 보기에 다 으슬으슬했다. 기사님은 괜찮으신 건지 히터도 틀어놓지 않았고 그에 또 대조되도록, 경부고속도로는 1차선 전용차로까지 다 꽉 막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술자리에 있을 시간이 줄어드는데, 오한으로 부르르 떠는 가슴팍 안으로 이런 걱정이 같이 떠오르는 걸 느끼며, 나도 참 나다 싶었다. 


강남역 지나서 내렸다. 강남은 언제나, 내릴 적마다 나를 조금 울적하게 한다. 그 높은 빌딩들과 수많은 사람들, 유행을 선도하는 듯한 젊은이들의 복장과 아무런 걱정 없다는 듯한 얼굴들과 이 한겨울에도 끄떡없다는 듯이 클럽 앞에 진을 친 사람들의 입김과 술집, 술집, 시끌벅적한 소음과 네온사인들이 하루의 진액을 다 빼고 먼 길 돌아 퇴근하는 내 자화상에 너무 선명하게 비치곤 한다. 간판과 취객들을 거슬러 약속장소에 갔다. 예상대로 이미 셋은 얼추 취해 있었다. 나는 그날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취하고 싶었다. 나와 술은 그리 친하지 않아서, 1병을 다 끝내기도 전에 현기증과 편두통이 엄습하게 마련인 것이라 평소에도 그리 가까이하지 않는다만, 그날 왜 그런진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나는 취하고 싶었다. 안주를 먹기에는 그 불만스러운 카레로 아직 배가 가득했고, 나는 그저 연거푸 따라서 들이켰다. 좌중도 "와 상덕 대리님이 오늘 마이 힘들었는 갑다~" 하였다. 사실 대리는 아니지만, 굳이 거기다가 "나 대리 아닌데요" 하기도 좀스러워서 그냥 가만히 소주만 마셨다.


늦게 도착한 탓에 1차는 금방 끝나버렸다. 고기 판을 3번 갈아치웠다고 하니, 아쉽지만 이제 그만 이별코자 하였으나, 그들은 이 앞에서 맥주 한 잔만 더 하자고 나를 끌어당겼다. 시간은 10시였고, 내가 평소에 자는 시간이 10시 30분인 걸 감안하면, 내가 그 날 왜 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를, 맨정신의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 취기는 영 멀리 있었고, 밤바람은 더욱 깊어져 도리어 정신은 쨍하였으며, 못 이기는 척, 그래 그 달콤한 끌어당김에 나는 어수룩이 넘어갔다. 강남이랑은 영 친하지 않아서, 사실 비단 강남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주변 사람들에게 권할만한 맛집을 알지 못한다. 사실 맛집뿐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곳이 있노라며 쾌활하게, 그리고 우악하게 이끄는 그 손이 참 좋았다. 


불콰해진 이들끼리 떠들어대는 것을 바라보며, 한 발 떨어져서 걸었다. 저들끼리 "여가 참 좋드라", "아이다 저가 찐또배기다" 하는 것을 정답게 바라만 보았다. 그러면서 갈피를 모르는 그들의 발자취처럼 이야기는 중구난방으로 퍼지더니만, 주종이 맥주에서 위스키로 튀어 버렸다. 머지않은 곳에 위스키 바가 있었다. 1차를 우리 영업사원 법인카드로 긁었으니만큼, 고객사 대표들도 자기네 면을 세워야 직성이 풀리려는가 싶었다. 위스키 바나 그냥 펍이나 대충 길거리에 무슨 무슨 바라고 적힌 곳이나 무엇 다른지를 몰라 멀뚱허니 서 있었다. 취객이 문을 벌컥 하고 여니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호스트와 바 테이블을 따라 나란히 앉아 있는 남성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자리가 없는 가베, 하며 그 취객은 다시 문을 닫았다. 거기서 또 멀지 않은 곳에 이번엔 자기가 아는 위스키 바가 있다고, 사실 그 건물이 자기 월세 사는 곳이라며 다른 대표 하나가 득의양양이 앞장을 섰다. 약간 불안했지만, 이제 와 무르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라 묵묵하니 걸었다. 


다다른 바에는 손님이 없었다. 대신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종업원 3명만이 텅 빈 바에서 우리를 반겼다.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한다. 한편 도망가고 싶었지만, 한편 아예 새로운 경험이라 궁금하기도 했다. 4인 석에 앉았다. 모든 좌석은 가운데의 홀과 맞닿아 있는 구조인데, 이 홀을 따라서 종업원들이 각 테이블의 손님들에게서 주문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인가 싶었다. 하필 손님이 하나 없어서 3명 다 이쪽에 몰렸다. 그들이 건네는 메뉴판을 슬쩍 들여다보곤 슬며시 눈을 뗐다. 주문 단위가 죄다 보틀인데 술값이 30만 원을 넘기는 것을 보곤, 괜히 아뜩해지는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랬다. 

 

*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네 놈 전부 숫기없는 모지리들인데, 개중 한 놈이 바로 옆에 바싹 붙어 팔을 괴고 있는, 그러니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자 은근히 제스쳐를 취하고 있는 종업원들에게 썰렁한 농을 건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이야기를 다 받아주었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각자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것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더니 그게 신호탄인 듯이 좌중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괜히 장차 있을 사업 이야기를 꺼내질 않나, 개중 한 명이 이 위에 사는데 월세가 140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우리 영업사원 선배도 거기 질세라, 최근에 어느 다른 회사에서 나를 스카웃하려고 했는데 페이가 맞지 않아 관두었다는 둥, 자기 입으로 떠들기에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풀어내기 시작했다. 종업원들은 전부 그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어딘가 슬퍼졌다. 그 치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술잔만 연거푸 들이켰다. 거기 앉은 오빠는 왜 말이 없냐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내 슬퍼졌다. 나는 그만 취한 척하려고 했다. 우리 선배는 애가 원래 숫기가 없다는 말을 마치 아이스브레이킹이라도 되어줄 것인 양 유쾌하게 떠들어 젖혔다. 


어색해서였을까. 위스키를 너무 빨리 마셨다. 물 잔 하나, 온 더 락으로 쓸 얼음 컵 하나, 그리고 샷 잔 하나가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물이랑 위스키만 연거푸 마셔댔다. 잔이 비니 종업원이 손을 뻗었다. 내 앞까진 닿지 않는다. 내 잔을 이리 달라는 제스쳐일 테다. 서글펐다. 무엇이 그리 서글펐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도 다 알 수 없는 내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손만 뻗어 잔을 받고, 곧바로 얼음 컵에다가 붓고, 다시 마셨다. 좌중은 여전했다. 점점 더 신이 난 표정들이다. 이제 취기가 차올랐고, 나는 곧바로 먼저 일어나보겠다고 했다. 좌중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점멸하는 눈동자 너머로 액정 위에 뜬 시간이 간신히 보였다. 동네로 가는 막차는 이미 끊긴 지 오래, 한남대로에 내려서 40분간 걸어가야겠거니, 추위에 택시 생각이 간절했지만,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아무런 버스나 잡아탔고, 너무 빨리 들이켠 위스키가 이제부터 내 속에서 찬찬히 그 독을 풀어낼 줄은 미처 몰랐다. 취기는 서서히 오르다간 버스의 훈기에 섞여선 왈칵 들어찼다. 그 이후로 기억이 아예 없다. 다음날 눈을 떴다. 집에서 늦어도 7시에는 나서야 하는데, 7시 20분에 눈이 뜨였다. 15분 만에 준비를 하곤 정신없이 서둘렀다. 내 책상 위에 가득 찬 물 컵 하나와 모닝케어 한 병과 컨디션 환이 뜯겨 있는 것으로 보아, 동생이 간밤 나를 구제해주었겠거니 생각하며 털어 넣었다. 몸이 안 좋았다.


그래서 이 모든 게 숙취겠거니 했다. 출근길은 멀고 강남으로 1시간, 거기서 오산으로 1시간 내내 잤다. 회사에는 지각했고, 오늘 면접 보는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할 면접비를 현찰로 뽑아야 해서 조금 더 늦었고, 죽상으로 출근했다. 과장님은 엄한 분인데, 장전해둔 쓴소리를 몇 마디 하시다간 내 몰골을 보곤 도로 집어넣으셨다. 금요일은 하루가 길다. 루틴잡만 놓고 보아도 그런데, 면접자들을 인솔하고 신규센터에 필요한 집기류와 자재류 발주를 체크하며 처리하자니 더욱 그랬다. 점심시간에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시행했다. 훈기가 불콰하게 차있는 대회의실에서 토가 쏟아지려는 것을 참으려고 계속해서 침을 삼켰고, 그것이 오히려 기포를 만들어 자꾸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가슴이 저 혼자 들썩였다. 다행히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점심을 걸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컴컴한 방을 찾아 누워 잤다. 그쯤 코는 막혀 있었고, 식욕도 아예 없었다. 졸음보다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무기력증과 구토감이 곤혹스러웠다. 자고 일어나도 가시지 않았다. 팀장님은 내게 반차를 권했지만, 이미 다른 선배 하나가 반차를 떠났고 나머지 팀원들도 각자 감기 기운에 골골대며 각자의 기침 소리로 화음을 자아내고 있었기에 내 그것을 기꺼이 수락하기는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팀장님 바로 앞자리에서 허물어지는 몸을 의자에 내맡기고 엉덩이를 쭉 빼 참으로 오만불손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고개는 어깨가 떨어진 방향을 따라 마구 꺾였다. 똑바로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가 힘겨웠고 자꾸만 허물어지고 싶어졌다. 아무쪼록 하루가 얼른 꺼져버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숙취가 가신 몸둥어리 안으로 몸살기가 왈칵 밀어 찼다. 밤은 여전 추웠고 어찌저찌 먼 길 돌아 집에 도착했으며, 곧잘 타이레놀 2알에 포카리스웨트 1PT를 때려 박았다. 그리곤 참으로 덧없는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 밝은 것이다. 감기는 항상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을 늘 잊어버리는 게 문제이지. 경미한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아, 역시 감기가 나를 비켜가려고 그러는가 보다 하고 자만하게 된다. 그러니 술을 퍼마셨겠지. 그리고 이튿날에 경과가 심해지고, 사흘째 되는 날에 그 절정에 달한다. 오늘은 그 절정이다. 토요일 아침에 경기도로 가는 길은 텅 빈 것이 매끈하기 그지없다. 개중에도 누군가는 경기도 오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 이가 있으나, 그래서 그이의 하루가 괜히 궁금해지는 일이 종종 있지마는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내 눈감아 잤다. 아니 자려 했다. 마스크 안쪽으로 계속해서 코가 흘렀다. 버스 기사님의 눈에 들키지 않게 고개를 숙여서는 티슈로 연거푸 닦았다. 풀기에는 영 좀스러워서 계속해서 닦았다. 때마침 코 안쪽이 헐어서 그저 닦아보기에도 따가웠다. 


그렇게 주간 당직으로 오늘 하루를 보낸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당직은 역시나 바빴다. 오늘 물류를 받아서 오늘내일 판매하는 것이 소매업자들의 원대한 꿈이자 계획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때 마침의 오늘을 맞아 현장은 개판을 쳐두었다. 배송누락된 제품이 너무나도 많다. 히트텍을 포함하여 4겹으로 입었다지만, 한편 고뿔을 안은 채로 영하 24도의 냉동창고를 누볐다. 자꾸만 얼어붙는 속눈썹을 홉하고 힘주어 떼내며 미출된 제품을 찾아다녔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체감온도라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자연스레 그것을 몸으로 알게 된다. 바람이 불지 않는 영하 24도의 냉동창고를 벗어나, 맷바람이 부는 영하 11도의 야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뼈 시리게 느끼게 된다. 냉동창고에서 일하는 현장 작업자들의 얼굴은 그래서 늘 죽상이다. 그래도 오늘은 내 얼굴이 더 죽상이었던지 그들이 안부를 물으며 위로를 건네주었다. 어딘가 기분이 이상했다. 


15시 정시퇴근을 목표로 달렸지만, 17시가 넘어서 퇴근할 수 있었다. 계속 물티슈로 코 아래쪽을 대고 있어서 지금은 완전히 헐었다. 콧물이 조금 마르니 이제 코에서 불이 난다. 고뿔이면 좋겠건만, 아무래도 코로나인 것 같다. 집에는 19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동생은 이 복된 날을 기리느라 집을 비웠다.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추운 집은 어둠 속에서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몸에는 바깥을 전전하는 오한이 잔뜩 베 있었지만, 그럴 때 꿈꾸어볼 만한 따뜻한 집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어처구니도 없지. 우리 집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줄곧 원룸 일체형 난방이나 도시가스 난방 정도만을 겪었던 나로서는 LPG 가스통의 무시무시함을 미처 알지 못하고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특약사항으로 입주 후 3개월간 가스비 지원을 해준다는 문구가 자그마히 적혀 있었는데, 세상에 까닭없는 호의란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대수롭잖게 놓쳐버렸다는 것이 한이다. 

 

*


동생과 같이 살아보겠다고 투룸 전세를 구해보자니 사회초년생 형편이 다 거기서 거기일 테고, 더불어 그즈음에 전세난이 야단이었다. 작년 중순이었지. 초여름이었다. 웬만한 원룸 전세가 1억 언저리에 육박하니만큼, 투룸 전세는 애초에 매물 자체를 찾아보기조차 어려웠다. 동생은 서울살이를 고집했고, 나 또한 서울살이에 대한 기대가 은근하니만큼 서울 안에서 찾되, 시세 맞추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경기도로 출퇴근해야 하니 경부고속도로 라인, 광역버스 라인에 가까워야 하겠는데, 그 근처는 죄다 비싸거든. 중구는 물론이요, 한남대로 변, 거기서 강을 지나면 논현, 강남, 서초, 양재이다. 그렇게 찾다 찾다 들어온 곳이 지금의 보광동 집이다. 여기는 이미 재개발이 확정되었단다. 그래서 수요도 적고, 시세도 저렴했다. 나는 못내 불안했지만, 재개발이 확정되었다고 해서 곧잘 공사가 착수되는 건 또 아니라고들 하여, 까무러치라지 하는 마음으로 여기 터를 잡게 되었다. 


재개발 확정지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다만 오래된 건물이 많아, 여름에 덥고 겨울에 많이 추울 뿐. 작년 겨울을 내가 어떻게 났는지 진정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17평 남짓 되는 투룸 방에 LPG 가스로 난방을 트는 것은 허공에 가스를 분사하는 것과 진배없다. 동파를 막고자 외출로만 틀어두었는데도 가스비는 17만 원이 나왔다. 그래도 추운 건 매한가지였다. 오래된 집은 벽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그 벽을 따라서 한기가 꾸불꾸불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거든. 벽에 손을 대면 아뜩해지지. 단열이 전혀 안 되는 곳에 LPG 가스를 들이부어 볼 만큼 내가 과감한 사람이 못되지만, 동생은 추위가 진절머리난다며 사람답게 살자고, 온도를 올리자고 으름장을 두었다. 그 기세에 못 이겨 27도로 올려보았다. 그다음 달에는 가스비가 37만 원이 나왔다. 


동생은 소득이 없다. 그런 녀석이 서울 살겠다고, 더 정확히는 어버이랑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으니, 부모님은 내가 녀석을 챙겨주기를 노골적으로 기대했다. 막내 딸년 성질머리가 괄팍하여, 부모님은 이 녀석 눈치만 보고 쓴소리 하나 못하신다. 그렇게 같이 살기를 6년 하였으나, 개중 4년은 내 벌이도 없어서 우리 앞으로 돈이 많이 나갔다. 그리고 이내 취직을 한 내가 그 기대에 부응코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다 자연스러운 일이리다. 전세 월 이자는 그리 많이 나가지 않았지만, 그 외 수도세와 전기세, 무엇보다 가스비가 무시무시하다. 더하여 한 달에 대중교통비로 18만 원이나 빠져나가는 만큼 보광동 살이는 내게 참 여러모로 가혹했다. 그런 속도 모르고 우리 철딱서니 없는 동생은 무엇 그리 태평한지, 한 톨 품앗이도 없이 가스를 더 틀어달라고 성화였고, 우리는 싸웠다. 결국 동생은 추워서 못살겠다고 작년 겨우내 고향집으로 피신했다. 나는 텅 빈 방에서 전기난로를 틀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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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이 끝나고 돌아온 집은 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귀가했을 땐 수도관이 얼었다. 샤워를 하려고 온수를 켜니 물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먼 길 위 오직 바라마잖던 온수 샤워가 허사가 되고 나니 화가 났다. 흐르는 물은 얼지 않으니 수도를 온수 방향으로 돌려놓고 온종일 물을 켜두면 동파를 방지할 수 있다던데, 동생이 그걸 꺼버렸다. 유튜브로 허겁지겁 배수관 녹이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드라이기로 녹이는 방법, 전기난로로 녹이는 방법 등등이 있었지만, 우리 집 보일러실은 집 바깥에 샌드위치 판넬로 적당히 지어놓았기에 전기를 끌어다 댈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배관에 수건을 두르고 정수기에서 뽑은 뜨거운 물을 조금씩 뿌렸다. 수도는 나오지 않지만, 온수 방향으로 틀어놓고선 배관에 10분 정도 조금씩 뜨거운 물을 부었다. 기대와 두려움에 화답하듯, 마침내 컥컥 거리며 수도가 나왔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추위에 고뿔로 허물어지는 육신을 안은 채로, 온수마저 나오지 않는다면 솔직히 버틸 자신이 없었거든. 


고된 당직을 마치고 늦게 돌아온 집은 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오직 전날의 교훈을 통해 조금 틀어둔 물줄기 소리만 흐르고 있었고, 어둡게 내리깔린 방 안으로 보이지 않는 한기가 가득 벅찼다. 방에 돌아와서 죽 한 사발에 타이레놀 한 정을 털어 넣은 다음, 난로 앞을 궁싯거린다. 코 아래가 헐어서 화끈하니 따가웠다. 난로 앞에 한 줌 열기를 탐하는 내게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오랜 생각 하나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이라는 둥, 젊어서 편하면 늙어서 힘들다는 둥, 이런 경미한 것들에 부화뇌동하기에는 삶이 녹록지 않는다는 둥, 오히려 그 앞에 우뚝 서 자랑스러우리라는 둥, 뭐 그런 석잖은 오랜 생각들. 나의 오기, 나의 자랑, 실은 나의 초라함들. 


앞서 나의 음울한 일상을 털어놓았지만, 나는 내가 불우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미련하고 아둔할 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런 너저분한 생활도 끝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들이 뇌리 깊은 곳에 주렁주렁 달려 있을 따름이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알량한 책임감도 전부가 아니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다는 아니요, 그보다는 마지못함에 가까운. 소득이 없는 동생을 두고 가자니 겨울은 가혹하고, 오산에 세들어 살자니 거긴 너무 쓸쓸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자니 일과가 피로해 못할 짓이요, 결국 온갖 마지못함들이고 나의 아둔함들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유독 더 그런 걸까. 요 며칠 간 이런 지지부진한 나날을 보내고, 고뿔은 심해지고, 추위도 따라 커가니 마침내 나는 문득 낯선 생각 하나를 가진다. 나는 참 아둔하지 않은가. 주변으로부터 사서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먼 출근길은 물론이요, 아직 차 하나 장만하지 못해 뚜벅뚜벅 걸어내는 일과 겨울철 얼어붙은 집구석과 무시무시한 가스비와 물론 그 애는 추호 그리 생각지 않는다마는 동생 놈을 거두어 사는 일과 오직 우리 팀만이 시달리는 끝없는 야근과 그저 그런 우리 회사와 그에 빗대어 초라하게 빛나는 나의 학력과… 네가 왜, 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다. 몸이 강건하여 기세가 등등한 나인 때에는 그 모든 것들의 앞에 오만불손할 정도로 의기양양한 나였지마는, 몸 따라 마음이 한풀 꺾이니 뭐랄까, 내 그토록 두려워하던 것, 즉 보통의 생각들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


왜 나는 사서 고생을 하는가. 그것은 분명 나의 선택이다. 왜 나는 이 경미한 수고스러움을 차라리 택하는가. 반대급부에는 뭐가 있지? 회사의 동료들을 기억 속에 떠올려본다. 회사까지의 거리를 한 걸음이라도 아끼기 위해 오산 근처에 자취방을 구하고, 마찬가지 이유로 차를 장만하고, 한 푼 아끼기 위해 아득바득하기보다는 충분히 소비하고, 적당히 친절하고, 소개팅을 받아 연말을 같이해줄 적당한 누군가를 만나고, 그 안에서 적당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들. 어쩌면 나는 그 모든 적당함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적당함 안에 머물며 그것을 누리며 만족하거나, 하다못해 그 순간에조차 떠오르는 약간의 불만족을 마음 깊숙한 곳에 밀어 넣은 채로 그럭저럭 살만하노라 스스로 여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내게 너무도 분명하였으며, 그러니까 그 적당함 속에서도 느껴지는 약간의 불만족 따위의 것과 타협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어려웠다. 


살아가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권태이다. 그러면 나를 조금만 아는 이는 내게 묻는다. 예컨대 내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그렇게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하게 살아가는 것도 힘겹지 않으냐고, 그저께 수도관이 동파되었을 때 수도 밸브를 잠근 것을 두고 싸우다가는 악에 받친 동생이 그런 이야기를 건넸다. 그 질문 앞에 떠오르는 수 없이 많은 사고의 단편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잘 전달할 수도, 이해시킬 자신도 없어 침묵했다. 내가 권태를 두려워한다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 지금 삶의 방식이 권태와 다른 무언가 긍정적인 면모를, 당당히 선보이거나 누릴만한 무언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나는 그 질문을 바꾸어 해석했다. 그건 내 삶의 모양을 향해 겨누어진 회의 懷疑겠지. 그래 나도 내 삶에 모종 회의를 느낀다. 왜 그렇지 않으랴. 


오기로 이루어진 삶의 형태, 근래의 내 삶은 그런 올올이 옴팡지고 얄궂은 촉감의 실들로 구성되어 있는 듯하다. 집과 회사가 멀면 그만큼 저녁은 짧고 아침은 이르지만, 한편 그렇게 잃어버리는 것들로부터 눈을 떼 나는 눈앞에 펼쳐진 새벽녘의 한기를 자랑스러워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에 버스를 타고 동네를 떠나는 때, 아직 죄다 닫혀 있는 차창 밖의 가게들과 죄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버스 내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보며 약간의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광역버스에서 내려 강을 따라 걷는 동안 우거진 수풀 사이에 자리한 오리와 백로, 무리를 지어 있는 잉어들을 보면서도 마찬가지 사랑을 느꼈다. 조금 더 일찍 집에서 나와, 안 그래도 남들보다 이른 아침에 마련해본 약간의 여유로운 시간을 따순 캔커피 하나에 담배 하나 정도 누리는 것으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자랑스러움이고 사랑스러움이었을까. 그것만이 있었을까. 보통의 삶이었을까. 어쩜 나는 나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애쓰고 있는 것은 정말 아니었을까. 


내 믿는바 권태는 평안에서 온다. 나는 그렇게 강렬히 믿는다. 그러니까 회사와 집이 가까울수록, 자동차가 쾌적할수록, 집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 겨울엔 따뜻하며 여름엔 시원할수록, 즉 일상이 평안에 가까울수록 권태도 성큼 가까이 와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한 가지 욕망이 해결되면 그것은 애석하게도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전락하기에. 그리곤 기존의 것보다 높고 성취하기 어려운 욕망이, 그다음 층위의 욕망이 마음속에 대두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더욱 높고 어려운 욕망을 바라게끔 설계된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런 비범한 능력이나 행운을 갖춘 사람이 세상에는 존재하겠지만, 대다수에게 있어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혀 체념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요, 범박한 나로서는 그 순간을 늦추고 싶을 뿐이다. 그때 내 삶에 빛이 꺼질 것 같아서, 그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적당함을 누릴 줄 알고, 그 안에 적당한 만족과 딱 그만큼의 적당한 불만족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나는 언제나 적당함 속에 숨어 있는 권태가 두려웠다. 평안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는 권태가 무서웠다. 그러니까 빛날 것일랑 없는 이 회사에서의 일과와 그것을 토대로 형성되어 있는 나의 삶이 적당한 평안을 맞이하는 순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싫증을 느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게 나는 너무도 분명해, 그 순간의 권태를 마지못한 마음으로 부정하거나, 그래서 어쩔거냐 하며 체념하기가 어려웠다. 내 안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은 너무 선명해, 그로부터 나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회사 동료들에게서는 이미 그런 기색이 보이고 있다. 다만 그것은 욕구와 같이 명징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서, 복되게도 아직은 스스로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불편한 일상, 그것은 나의 삶을 계속해서 불만족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그것을 바란다. 만족하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 오기로 불타는 강대한 집념들이 턱-하니 놓여나고 강렬한 에너지는 흩어지고 편안함을 누리고 안주하고 걸음이 느려지고 이내 멈출 것만 같았다. 지독한 역설, 일상이 편하지 않을수록 나는 더욱 열렬히 꿈꿀 수가 있게 된다. 앞서 말마따나 그 욕구들은 마음먹는 순간 쟁취할 수 있는 쉬운 것들이기에. 기본적인 욕구에 속하고, 어쩜 손쉬운 것들. 손 뻗을만한 곳에 있는 목표들은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별처럼 높아지는 순간, 그래서 도저하다 여겨지면 사람은 체념하게 되는 것이려니. 그러니 나는 집념을 안은 채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 불에 쓰일 연료로 지금 순간을 움직이게 하는 가까운 욕망과 멀리 높은 곳에 빛나는 욕망, 꿈을 병치하고 싶었다. 즉 나는 단계적으로, 언제까지고 꿈꾸고 싶었고 계속해서 타오르고 싶었다. 


나는 회사 동료들에게 물었다. 요즘은 무얼 하며 삶을 누리느냐고. 그들의 얼굴에는 빛나는 환희나 오기로나마 불타오르는 꿈 같은 것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피로해 보였고, 무엇보다 꿈꾸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나에 비해 조금 나마 평안한 그들의 삶은, 역설적으로 지루해 보였다. 그들은 때가 되면 차에 시동을 걸고, 집까지의 적당한 거리가 막히는 것을 답답해하고, 집에서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고, 다음번에는 어떤 드라마가 개봉될지 기다리고, 결혼한 이들은 반려자와 소소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회사에 오기를 반복한다고 답하였다. 혹은 자주 술을 마신다고도 하였고, 사내놈들은 이성 문제를 논했다.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지루해보였다. 목말라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위스키 바에서 관찰한 세 명의 사내들을 사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들과 내가 같은 것을 느끼고 공감할 수 없었을 뿐. 홀에 자리한 아리따운 여인들과 술을 나누어 마시고 이야기를 건네고 실은 지극한 페이-오프 관계였으나, 그들은 맞장구를 쳐주고 기분이 아주 잠깐 좋아지고 그래서 더 마시고 더 소비하고… 그 모든 것이 덧없어 지루하고 괜시리 쓸쓸해 보일 뿐이었다. 잠깐만 왔다가 가는 것들에서 위안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렇다. 앞서의 평안이 그렇고, 일상의 작은 행복들이 그렇다. 그런 내게 그들도 되물었다. 힘들지 않느냐고. 아마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나와 나의 삶에 대해,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기는 어려웠을 테기에 우회적으로나마 질문한 것이겠으나, 나는 위에 써둔 것들을 모조리 설명할 자신이 없어 적당한 밈을 차용해, "내가 택한 지옥"이라고 답해주었다. 


동생과 함께 서울에서 살기 위해 포기한 많은 것들, 먼 길과 싸구려 집의 추위와 갖가지 비용들과 저녁이 없는 삶과 지금의 쓸쓸함과 초라함, 이 모든 것은 결코 동생을 위하는 마음으로 내려진 결정이 아니다. 추호 희생이 아니었다. 나는 휴머니스트가 못돼서, 차라리 그런 이상스러운 결정을 내리고 내릴 수 있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의 지리멸렬함, 나의 오기, 나의 자랑, 실은 나의 초라함. 이 과정에 필연히 수반되는 지리멸렬함과 초라함을 오기와 자랑스러움으로 덮어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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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려면 반드시 거실을 거쳐야 한다. 거실에서는 입김이 났다. 온수를 켰으나, 샤워기가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내 몸에 가득 밴 오한에 이 기막힌 한기가 더부니 나는 내 집 안에서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이 모든 것이 기가 찬 나머지, 나는 묻는다. 이 삶의 지평 너머에 무엇을 걸어놓고 나는 사는가 하고. 눈부신 미래도 아니, 금의환향도 아니, 오래도록 버티는 힘과 근면함, 그리고 차근차근 쌓아온 경험이 주는 단단함. 그 너머에는?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요, 변치 않는 것이다. 나를 이해해줄 단 한 명의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내가 행하는 이 모든 아둔함들에 대하여, 네가 왜라고 의구심에 찬 질문을 하지 않고 속들이 이해한다는 듯이 웃어 보일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아는 것. 


묻는다. 그것이 내가 고수해 온 이 우습지도 않은 행적들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느냐고. 잘 모르겠다. 진정으로 모르겠다. 나는 다만 미련한 사람이고 지독한 사람이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쯤 가지고 있다. 나는 또한 타협이 잘 안 되는 사람이라서, 즉 나를 적당히 이해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기에, 그런 이를 만나는 일이란 아예 불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럴수록 나는 증명을 하려는 가도 싶다. 견디고 기다리는 일이 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자 어쩜 어려운 일이라면, 다른 쪽으로는 빛나는 것이 없는 나는 내 잘하는 것을 갈고 닦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왜, 라는 생각 하나와 그럼에도 이러한 삶을 고수하는 나는 참 아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하나. 오늘은 그런 생각, 회의에서 도망치지 못하겠다. 입사하고 나서 저녁이 없었다. 6시 칼퇴근을 해도 적당히 끼니를 때우면 9시 언저리에나 귀가하는 삶에 저녁과 여가가 있을 리야. 야근이 많은 우리 팀 특성상, 주중에는 오직 회사뿐이었고 주말에는 널브러져 쉬거나 글 몇 자 적는 것이 근 2년 전부이다. 대학 때에는 친구도 더러 있었더랬지만, 이런 이상한 생활 통에는 약속 잡기도 벅차다. 그렇다고 돈푼이라도 모았느냐면 글쎄. 이에 나는 질문한다. 내가 왜, 라는 생각 하나와 그럼에도 이런 삶을 아마 한동안 고수할 나의 아둔함에 대하여. 


나는 회의하는 것이다. 권태가 싫어 오기를 부려왔다지만, 고뿔과 오한과 추위와 연말과 외로움에 그만 작아져 버린다. 오기로 가득 차 있던 내 흉곽이 쪼그라드니, 이제껏 나를 침노하지 못하던 작은 생각들이 자연스레 들어찬다. 그러나 딴에 나는 믿는 것이란, 이 고뿔이 가듯이 봄이 오고 나는 거기서 또 이상스러운 꿈을 꾸고 이제껏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리라는 사실이다. 그 일견 덧없는 순환의 한편으로, 쓰는 만큼씩은 지혜로워지리라는 것을 이제 믿고자 한다. 계속해서 꿈꾸고 오기로 지탱하는 삶의 회귀, 그 한편으로 쓰는 만큼씩은 지혜로워지리라, 오늘은 그 문장 하나를 써놓곤 작아진 가슴팍 안으로 꽉 붙들어 잡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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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우울감에 취해 무아로 글을 쓰다 보니 성탄절이다. 나는 남은 하루도 자가격리하며, 계속 글을 쓸 생각이다. 이번 화는 무애의 쉬어가는 순서이다. 5편 이후 석 달간 써놓은 것들이 쌓여만 가는데, 떠오르는 대로 써서 쟁여두니 문단은 쌓여가나 그 사이 연결고리는 없고, 덧대고 덧대는 동안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더욱 아득히 묘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아직 다음 편을 게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이 시리즈를 붙잡은 지가 어언 일 년. 겨울은 가장 두려운 계절, 작년 나는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는가. 


쓰는 만큼씩은 지혜로워지리라, 나는 일 년간 붙잡아 온 이 글을 굽어보며 그것을 믿으려 한다. 작년 나는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는가. 답답함과 불안함, 막연함. 삶은 큰 틀로 보아 계절의 스케일을 따라 무한히 회귀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삶에는 이따금 작은 환희나 영광도 없었으며, 나는 이렇게 무색하게 퇴화해버리는 것은 아니냐, 대중 이런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까지와는 다른 무언가 새로움을 발견해내고자 글을 시작했으나 보라, 삶의 행태는 여전하고 그 안에 깃든 원리도 여전하다. 그러나 분명 달라진 것이 있었으니 지금 어떠한가. 그때의 내가 할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는 조금 더 용감해졌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개척되지 않았으나, 쓴 만큼은 개척되었노라 믿는다. 그만큼 나는 더욱 나를 믿고, 내 오만방자한 신념에 더 짙은 무게추를 드리운다. 


아마 오늘 나를 엄습한 추위와 회의는 내일, 

아니면 그 다음 내일,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다음의 내일쯤엔 스러지겠지.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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