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취향의 발견 (1) 정가영 [영화]

글 입력 2022.12.25 17:2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취 향 의 발 견 

 

-내가 수집한 이야기들-


 

더 노골적으로. 내가 은폐하고 있는 속마음을 발가벗겨 눈앞에 선명히 들이밀어줘.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걸 모르는 척하지 않게 해줘. 세상이 숨기고 있는 것들을 다 까발려줘. 모든 것의 양면성을 보여줘. 우리 안의 미움, 질투, 이기심, 속물근성, 허영, 욕망 그 모든 게 괜찮다고 해줘. 거짓말이어도 넘어가 줘. 무례해도 좀 귀엽게 봐줘. 어린아이같이 하잘것없어도 사랑스럽다고 해줘.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해줘. 그리고 모든 게 그럴 수 있다고 해줘.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줘. 계속 정답에 의심을 품게 해줘.

 

 

호기심은 많지만 동시에 게으르고 겁 많은 나 같은 부류는 아무래도 예술 쪽으로 눈을 돌리는 듯싶다. 예술은 내 일상을 훼방놓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의 영역을 모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며 안전했다.

 

내가 사는 방식에 의심을 품게 할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진지하게 머리 싸매고 풀던 난제도 한없이 가벼운 넌센스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 진리처럼 귀하게 여기던 성서가 사실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잔잔하던 세상에 질문을 던져 혼란을 부르는 이야기. 솔직하고 통쾌하며 발칙한 이야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더라.

 

오늘은 정가영 감독의 이야기다.

 

 


 

 

[1]

정가영

 

#밤치기 #비치_온더_비치 #연애_빠진_로맨스

 

 

[크기변환]정가영_포스터3.jpg


 

사랑을 갈구하는 일은 왠지 구차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한없이 이해받고 싶은 날도 덤덤함으로 그 마음을 대충 덮어두었다. 괜찮은 척, 쿨한 척했다. 거절은 끔찍이도 싫어서 누군가를 크게 짝사랑해 본 적도 잘 없다. 내 확신보다 상대방의 확신이 중요했다. 상대방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스믈 피어오르던 마음도 금세 접을 수 있었다.

 

난 내 사랑과 욕망에 솔직하지 못했다. 처절하기 싫었다. 정가영은 다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정가영 감독은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은 애처롭다'는 내 기존 생각을 전복시킨다. 유쾌하고, 발칙하게.


 

오빠, 근데 되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저 오빠 좋아하면 안 돼요?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

같이 있으면 좋았을 거예요, 분명.


영화, 밤치기 중

 

 

<밤치기>의 여성 캐릭터 ‘가영’의 대사다. 짝사랑은 들키면 끝나는 암살인 줄만 알았던 나에게 이런 대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토록 당당히 구애할 수 있다니.

 

<밤치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화감독 ‘가영’이 자료 조사를 핑계로 ‘진혁’을 불러내어 끈질기게 들이대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내용. 가영은 진혁이 맘에 들어 이런저런 수위 높은 질문을 한다. 하지만 진혁은 끝내 넘어오지 않고, 가영은 포기하고 돌아간다.

 


[크기변환]밤치기.PNG

 

 

극 중 가영은 느끼하지 않게 사랑과 욕망을 표출한다. 민망한 대사에 비해 정작 화자가 너무 담담해서, 그 이질적인 간극에 실소가 새어 나온다. 철면피 가영은 쪽팔림이라곤 도무지 모르는 사람 같다. 불도저마냥 추파를 난사해대니 진혁은 물론, 보던 관객마저 저 여성의 뻔뻔함에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미디어에서 쉽사리 볼 수 있었던 여성의 유혹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축약 가능할 것이다. ‘순진하고 은근하게’ 혹은 ‘관능적이고 요염하게’. 극 중 가영은 그 무엇도 채택하지 않는다. 가영 특유의 너스레로 진심을 능글맞고 평온하게 툭툭 뱉을 뿐이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행동하는 남자 그리고 보여주는 여자. 나에게도 이 방식이 익숙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남녀 관계의 낯익은 형국 또한 가영은 천연하게 비튼다. 가영은 자리를 뜬 진혁을 끝까지 불러내어 키스를 시도한다. 그녀는 시종일관 욕망에 따라 바지런히 움직인다.

 

 

[크기변환]비치온더비치_스틸.PNG

 

 

정가영의 다른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담담하게 성적 욕망을 표현하며,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한다. 담백하고 능청스럽게 실없는 농담에 진담을 섞어던지며, 그냥 자기답게 원하는 바를 태평하게 좇는다. 

 

<밤치기>의 리뷰를 찾아보았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19금 헛소리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냐고 혹평했다. 또 누군가는 삼류 그 이하라며, 주도적인 여성상을 꼭 성적인 것으로 표현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성적 코드가 직설적인 데다, 서사가 빠르게 이뤄지지 않았던 만큼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듯했다.

 

19금 헛소리 삼류 영화, 아니, 그 이하의 포지션도 아무렴 어떠냐는 듯한 <밤치기>의 포스터 속 문구. 이 영화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리한다. #원나잇_토크_무비. 끝까지 떳떳해서 좋다. 참 정가영스럽다.

 

<제 뇌의 반은 영화, 반은 사랑이에요>라는 인터뷰 영상에서 정가영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없이는 무의미하다고. 그녀는 고백하는 데 희열을 느끼며, 거절당하는 비참한 순간도 아름답다고. 

 

욕망에 호언장담할 줄 아는 사람은 몇 없다. 욕망을 가식 없이 결백하게 표출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드러내는 정가영이야말로 근사하게 자기다운 생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원색적인 정가영표 영화는 우리 모두 사랑과 욕망에 간솔해도 바보가 되지는 않으니, 안심하고 그 감정에 침잠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취향의 발견 (2)가 연재됩니다

 


아트인사이트_권기선.jpg

 

 

[권기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