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침내, 다시, 우리의 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12.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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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이라는 짧은 단어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이들 중 하나. 나의 춤은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던 유년시절 개다리춤 이상의 수준으로 결코 나아간 적이 없고, 그래서 성인이 된 나의 춤이 행해질 때마다 그것은 나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으며, 그걸 지켜보는 누군가의 얼굴을 덩달아 붉게 물들여왔다.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사람에게 춤이라는 단어는, ‘ㅊ’과 ‘ㅜ’와 ‘ㅁ’이 위아래로 쌓여 빚어내는 모양만큼이나, 낯설다. 오직 한 글자로만 이루어진 발음은 쉽고 간결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한입에 내뱉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어떠한 각오 없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엔 또 어쩐지 민망해지는 단어이자, 맞닥뜨리기 두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어쨌든 춤을 잘 못 추는 사람에게는.


‘춤’과 ‘몸’을 나란히 놓아두고 살펴보면 모양도 뜻도 닮았다. 춤은 내뱉어진 순간 언어의 영역 바깥 몸의 것으로 존재한다. 춤의 본질은 언어가 아니라 몸이므로, 춤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몸의 언어다. 그러한 “몸의 언어들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일”은 “버거운 것”이고,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아침달) 몸의 언어들로 말하는 일은 더욱 힘겨운 것이다. 나는 그토록 힘겨운 말하기 방식 앞에 늘 좌절한다. 춤이 아름답다는 것,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개소리다.

 

 


마침내, 라스트 댄스



이처럼 평생 서먹한 사이였던 춤에 대해 괜스레 사족을 늘여 쓴 것은 얼마 전 위대하고 강렬한 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지막 춤’이 마침표를 찍었고, 전 세계를 열광시켰다. 리오넬 메시. 경이로운 실력으로 축구의 신(神)이라 불리던 선수가 오랫동안 염원하던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

 

그의 우승 서사를 목격한 많은 사람이 드라마 같다고 했고, 그중 다시 여럿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모든 수식어는 이번 월드컵의 모든 순간을 정확히 갈무리하기에 불충분한 언어였다. 오직 몸으로 쓰인 결말이었으므로, 오직 몸의 언어로만 말해야 했다. 우리는 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 실력을 갖췄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던 한 인간의 사실상 마지막 도전을 사람들은 ‘라스트 댄스’라고 불렀다. 마지막 도전,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긴장감과 동시에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기꺼이 마지막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추락과 비상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투쟁을 이어가는 한 인간의 왼발에 집중하는 시선이 되어, 응원과 격려와 비난과 단념이 되어, 언어보다 열정적인 몸의 무대를 메웠다. 중동의 작고 부유한 나라는 언제나처럼 덥고,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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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이 울린다. 푸른 그라운드 무대의 막이 열린다. 뒤엉킨 몸들이 마지막 춤을 춘다. 완벽한 군무가 펼쳐진다. 스물두 개의 몸이 함께 움직이고,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120분의 장대한 공연. 마침내 (열광에 휩싸인 모두가 듣지 못했을) 긴 휘슬이 울린다. 울고 웃는 무수한 몸이 함께 만든 무대가 막을 내린다. 인간이기에 늙어가는 몸, 그 필연적 한계를 끌어안고 뛰어오른 마지막 도약에서 한 인간은 최고의 춤을 완성시켰다.

 

춤의 끝, 혹은 끝의 춤. 춤의 끝은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끝에서야 완성된 춤이라는 사실은 더없는 감동이었다.

 

 


퍼스트 댄스, 우린 다시



둥근 공이 구르기를 멈췄다. 폭발할 듯 일렁이던 열기가 떠난 자리에 추위가 파고든다. 바람이 불고, 눈이 온다. 잔열처럼 남은 여운마저 빠르게 식어버리면 한동안 잊고 있던 허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몸이 지배한 시간이 가고, 우리는 몸을 지배하는 언어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열정보다 큰 굶주림으로 덮쳐오는 언어와 질서와 생활의 시간에서, 언어의 시간을 다시 살아내기 위하여, 우리가 출 수 있는 춤은 아마도 ‘배고픈 자의 춤.’ 예술도 축구도 아닌, 진짜 일상의 춤은 아마도 그런 것.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등장인물 해미(전종서 분)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부시맨들을 만나 ‘배고픔’을 배우고 돌아온다. 물질적으로 굶주린 사람을 뜻하는 리틀 헝거와, 삶의 의미에 대해 굶주린 사람을 뜻하는 그레이트 헝거. 영화 속 해미는 그 각각의 춤을 춘다.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단연 해미가 위태롭고도 경건하게 추던 그레이트 헝거의 춤일 테지만, 삶 속에서 우리가 추는 춤의 형태는 리틀 헝거의 춤에 가깝다.

 

우리 춤의 시작이자 원형인 춤. ‘진짜로’ 굶주린 이의 가난하고 절박한 춤이자, ‘마지막 춤’을 위해 소비될 ‘최초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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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내내 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곳에서 기꺼이 춤을 춘 이들의 얼굴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자본이 자연마저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작은 나라에, 월드컵 경기장을 세우기 위하여 이주한 노동자들.

 

국적도 성격도 다르지만 오직 같은 언어―몸의 언어를 구사하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절박한 춤을 추던, 그토록 뜨거운 춤을 추다가 죽어간 6,000명 이상의 몸들을 작은 화면 너머로 목도한 적이 있다. 삶의 춤을, 생계의 춤을, 그래서 죽음에 가까운 춤을 추던 몸들을 오래도록 잊은 적이 있다. 어느새 모두 잊어버리고 열광한 적이 있다.

 

차가운 바람이 눈과 귀를 괴롭힌다. 크고 화려한 무대가 막을 내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평생 어떤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몸의 굶주림을 극복한 후 영혼의 허기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몸의 것을 도저히 어쩌지 못하여 영혼의 것이라도 채우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이란, 리틀 헝거에서 가일층 나아간 초월자의 춤이 아니라, 리틀 헝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 앞에 절망한 생활자가 취해야만 하는 춤일 수도 있다는 것.

 

해미의 춤과 이주노동자의 춤과 나의 개다리춤은 본질적으로 같은 춤이다. 우리는 다시, 그런 춤을 춘다. 춤이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춤이 그저 아름답다는 말은,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대체로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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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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