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레이디스 - 사랑보다 깊은 결핍과 욕망

글 입력 2022.12.1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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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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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을 들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레이디스>. 16개의 짧은 이야기 중 첫 이야기인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을 읽으면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싫어졌나 보다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는걸. 이야기가 촉촉하지 않고 바삭바삭하게 메말라있어서 읽기 좋았다.


 

*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메리'라는 여자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가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이야기.


* 미지의 보물

한쪽 다리가 불편한 남자가 어느 키 작은 남자를 쫓아가 그의 가방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구경한다.


* 최고로 멋진 아침

뉴욕의 택시 운전사 애런이 클레먼트 마을에 내려와 프레야라는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마을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클로로포름 병으로 잠재우고 도망쳤다가 경찰에게 붙잡힌다.


*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뉴욕으로 온 엘스퍼스 레버링. 공을 잘 튀기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냉대를 받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

필립이란 아이의 어머니가 공원에서 만나게 된 디키 엄마가 불륜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플레밍 씨가 구매한 샌포인(말) 프린트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마구의 색이 프림로즈와 흰색이라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 프림로즈는 초록빛이 도는 노랑일까, 분홍색일까.


*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루이자 트럿이 회사를 쉬고 성홍열에 걸린 동생들을 간병하던 중 직장 상사로부터 함께 저녁 먹자는 편지를 받는다.


* 엄청나게 친절한 남자

도시에서 온 남자가 어린 샬럿에게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안을 한다. 몰래 드라이브를 가다가 샬럿의 어머니가 이를 발견하고 남자를 보고 반한다.


* 시드니 이야기

파리가 지겨워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거미줄을 쳤던 시드니. 맛없는 각다귀에 지쳐 집으로 돌아온다.


* 영웅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 루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고 헌신적인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집에 불을 지르고 아이들을 구하려 들어간다.


* 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

운동중독인 남편을 진료해달라고 대신 온 애프턴 부인의 부탁으로, 남편을 만나러 간 정신의학과 의사. 애프턴 부인이 미혼임을 알게 되고 환자도 등록한다. 


* 미스 저스트와 초록색 체육복

학교 행사를 위해 학생들이 완벽하게 체육복을 입고 춤을 추도록 엄하게 다그치던 미스 저스트 선생님, 막상 행사 당 일 중요한 분들은 춤을 보기도 전에 떠나버린다.


* 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

유럽에 있는 로잘린드에게 고백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던 돈. 이웃 두센베리에게 온 이디스의 편지를 몰래 읽어보고서 두센베리인 척 편지를 보내고 약속 장소에 그녀를 만나러 간다. 로잘린드가 마음을 거절하는 편지를 받았지만 그는 다시 편지를 쓴다.


* 마법의 문

지루함과 외로움으로 견딜 수 없던 힐데브란트는 술집 판도라 룸의 문을 마법의 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판도라 룸에 들어온 한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에게 매달려 더 만나면서 그녀가 최근에 이혼한 사실을 알게 되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그녀는 이미 호텔을 체크아웃한 후였다.


* 달팽이 연구자

달팽이 요리를 좋아하던 피터 노퍼트는 어느 날 달팽이들의 짝짓기를 보고 흥미를 느끼게 된 후로 서재에서 달팽이를 기른다. 바빠진 일로 오랜만에 들어간 방은 달팽이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달팽이들에게 에워싸여 꼼짝도 하지 못한다.

 

- 셀프로 요약해 보는 <레이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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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통 속의 크래커가 거의 다 없어졌을 때 메리는 크레이겐퍼톡 수녀를 방문해서 흰 설탕을 입히고 영국 호두를 넣은 초콜릿 케이크는 큰 조각째로 먹다가 말했다. "크레이겐퍼톡 수녀님, 수녀원을 떠나게 해주지 않으시면 빌어먹을 수녀원을 통째로 지옥으로 날려버리겠어요!" (중략)

메리는 남은 케이크를 입에 넣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제 말 기억해요. 내일 저녁 이 시각에 대답을 기다리겠어요." 그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며 선언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돌아보았다. "크레이겐퍼톡 수녀님!"

"으, 응..."

"남은 케이크는 제가 가져갈게요!"

 

p.18-19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가장 재미있었던 건 처음 읽었던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이다. "땅콩이 어떤지는 다들 알 것이다. 일단 까먹기 시작하면 뭐...'라는 문장 하나에 이 책이 재밌을 거란 기대가 됐다. 툭툭 내뱉는 느낌이 재밌다. 인용한 부분은 억지로 여자아이처럼 길러지고 있는 남자아이 메리가 수녀원을 떠나겠다고 협박을 하는 장면이다. 빌어먹을 수녀원을 날려버리겠다고 무섭게 엄포를 놓더니 맛있는 케이크도 챙기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 정도 녀석이면 수녀원을 날려먹었든 아니든 어딜 가서 밥은 안 굶고 다닐 테니 잘 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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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어지러웠지만 어떤 감정인지 당장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어떤 면에서 부족했던 걸까? 그의 어디가 잘못됐기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마을에 녹아들지 못한 걸까? 수수께끼 같은 치욕은 뉴욕 시절보다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 자기가 통제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고, 자기 안에서 추방할 수도 없는 오류 같았다. (중략)

뼈아픈 건 어차피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절감이었다. 떠나는 행위 바로 그 자체에 내포된 파멸의 감각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마을이 허물어져내렸다.

 

p.85  최고로 멋진 아침

 

 

<최고로 멋진 아침>은 반어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싶은 제목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프레야와 내가 좀 즐겁게 시간을 보냈기로서니 뭐가 그렇게 문제인 건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어땠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친하게 지낸 프레야 일가 자체가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가 일하지 않고 쉬는 건 차치하더라도, 어린아이와 하루 종일 매일같이 시간을 보내는 걸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단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인공 시점이니 그렇다고 인사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었겠다 싶기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집주인에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라고 당연히 물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서 달라질 수도 있다.

 

여러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나서 그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마음속에 밑바닥까지 땅굴을 파게 되는데, 나도 간혹 최악이라고 느끼면서 감정이 치닫는 경우가 있어서 남일 같지 않았다. 뭐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는 것. 일단 든든하게 먹고,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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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근사했던 건 오로지 어린이였다는 것, 부모님이 손을 흔들며 꼭 붙잡으라고 소리쳐주었다는 것, 짧은 원피스 차림으로 목마에 걸터앉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시간도 못 되어 잠자리에 들고, 까치발을 해도 침대 밑에 발이 닿지 않고, 내일이면 일어나 자동차 뒷좌석에서 "우리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자요, 아빠?"라고 물었던 것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다 영원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 엄청난 비극이다.

 

p.114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에서 잠깐의 자유를 만끽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히는 제럴딘을 보게 되면 아차 싶다. 남편은 그저 아내가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다시 구속될 것이고 그는 폭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 클로로포름으로 그를 잠재우기만 했는지, 왜 1달러만 가지고 놀이공원에 가있다 붙잡히고 마는지 답답하기도 하다. 그를 해칠 수도 없고, 그의 돈을 모조리 훔쳐서 달아날 용기 같은 건 없이 애매하게 도망쳐서 생긴 결과다. 집에 돌아갔을 때 그녀를 맞이할 남편의 얼굴을 알 수 없다. 애초에 그는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해놓고 돌변해서는 더럽다고 하는 걸까? 서로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미스터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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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스퍼스 레버링이야." 엘스퍼스는 쥐어짜내듯 말했다. 이름이 여리고 발가벗겨진 무언가처럼 공중에 걸렸다. 마치 자기 자신 같았다. 

 

상대편 아이는 동작을 멈추고 더 오래 빤히 바라보다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마치 공을 던지려는 듯 팔을 꿈틀하더니 엘스퍼스를 한 번 더 노려보았다. "너 말투가 웃기다." 소녀가 말했다. 


엘스퍼스는 그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매정한 냉대가 먼저 느껴졌다. 


p.139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야심이 있다면 뉴욕으로 와야 한다고 멋지게 던진 아버지, 모든 게 괜찮다고 하는 어머니, 계속 이 불안감을 억지로 참고 있는 엘리(엘스퍼스). 세 명의 긴장감이 엄청났다. 이상하게도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이 가장 공감이 됐다. 새 학기 첫날 혹은 새로운 걸 시작하는 날에 너무나 어색한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무관심하거나 냉대하는 반응을 겪어도 일단은 괜찮은 척하면서 버티는 삶. 말투가 웃기든, 표현이 서로 다르든 뭐가 그렇게 우스울 일인지.


아무리 개인적으로 살고 싶어도 곳곳에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선이 펼쳐져 있다. 그때마다 '우리'에 속하기를 절실히 바라게 된다. 막상 그 우리에 들어가도 또 다른 경계선이 잘게 쪼개져있는데도. 적응하지 못한 무능력한 사람, 관심받지 못하는 재미없고 매력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싶은 두려움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가끔 내가 가진 이 모순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가 편하다면서 왜 가끔은 혼자이지 않고 싶어서 괴로워하는 걸까. 각종 챔피언들을 선망하는 나는 어디선가는 이방인이며, 그들일 수밖에 없는걸 아주 잘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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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척 그리운 사람이 진심을 담아 보냅니다.

클레런스 브램퍼드

(끝)


그리고 더 작고, 더 각진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요일 저녁때 잠시 돌보는 분들을 두고 나올 수 있다면, 함께 저녁을 먹읍시다. 일요일 아침에 전화하겠소.

C.B.


삽시간에 흐느낌이 쏟아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카드와 봉투를 이마에 댄 채로. 그냥 신경이 쇠약해져서 그래, 그녀는 생각했다.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러나 왠지 자기 연민이 의심되어 울음을 멈추려 애썼다. 자기 연민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꽃다발을 보내지 않게 된 지가...


p.212-213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자기만의 루틴으로 완벽하게 다져졌다고 생각했던 루이자에게도 새로움과 따뜻한 마음이 필요했다는 게 느껴졌던 대목. 자신의 이름을 달고 하는 일이 생기고 나면, 가족이 아픈 것도 마냥 편하게 지켜볼 수가 없다. 내가 맡은 몫을 하지 못하면 결국 그 일은 쌓여있기 마련이고 결국은 미래의 내 몫이 되어버리니까. 분명 브램퍼드 씨는 그녀에게 좋으면서도 좋지만은 않은 상사였는데 이런 전개론 사내연애 각이 아닌가. 브램퍼드 씨에게도 루이자의 보기 드문 연가는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게 했고, 루이자에게도 브램퍼드 씨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계기다.


아프거나 힘들 때는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나를 생각하고 연락하고 곁에 있어줄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직감할 수 있다. 자기 연민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한 것이 과연 자기 연민일까. 많이 힘들었냐는 한 마디 말에 눈물이 쉽게 쏟아지는 게 사람인데. 그녀는 자그마치 세 명의 성홍열 환자를 돌보면서 고비를 무사히 넘기지 않았나. 그녀가 브램퍼드 씨를 두고 하는 몽글몽글한 상상도, 당신이 많이 그립다는 브램퍼드 씨도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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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파리라면 벌써 내 인생에 먹을 마지막 한 마리까지 다 먹어치웠다고!"

 

p.237 시드니 이야기

 

 

<시드니 이야기>를 보면 왠지 어머니가 판을 잘 짜버린게 아닐까 싶은 의심이 피어오른다. 어머니가 추천한 장소에서 새로운 거미줄을 치고 나서 그가 먹은 것은 맛없는 각다귀뿐이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파리가 맛있다면서 어머니와 함께 시드니가 지내는 것이 그리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가 떠오른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니 나비가 지쳐서 돌아와도 큰 감흥이 없었지만, 만약 시드니처럼 어머니와 대화 끝에 간 것이라면? 시드니가 지치고 무서워서 돌아올 아이란 걸 알고 있었다면? 알고 보면 가장 무서운 건 어머니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드니가 좀 더 버티지 않고 돌아오는 게 최선이었을까 싶으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다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집 밖은 원래 위험한 것인데 집 안은 얼마나 위험하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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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매를 조심하는 일을 비롯해서 꼭 기억해야 할 점은 사실 몇 가지밖에 없었다. 가끔 재떨이에 작은 종잇조각을 태운다든지, 시간을 잊는다는지 하는 소소한 것들이었다. 많이들 그럴 때가 있지만 그녀만큼은 기억해두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었다. 연습하면 기벽은 누그러지고 기억은 따라온다. 

 

p.245 영웅

 


<영웅>에서는 처음엔 '연습하면 기벽은 누그러지고 기억이 따라온다'라는 표현이 좋았는데 알고 보니 복선이었다. 공포영화처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어기고 나면 파국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루실도 월급의 반을 잘게 잘게 잘라서 종이를 태웠다. 하나라도 어기면 끝이다. 가정교사를 맡게 된 아이들과 부모님에게 진심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불을 지르고 구하러 들어가는 게 사뭇 비장하다.


루실이 이번에 모두를 구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그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낸다면 가족들은 앞으로 험난한 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과연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완벽하고 행복한 나날을 의심한 게 잘못이었던 걸까? 누구나 행복을 찾고 싶어 하면서 막상 잠깐 행복이 찾아오면 가두어두려고 한다. 마치 내 것이었던 것처럼, 빼앗기면 불행해지는 것처럼. 월급이 많으면 모아두었다가 선물을 사주면 그뿐이었을 텐데, 불안이 그녀를 좀먹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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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은 <레이디스>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의미로도 충분하다. 다른 제목이었다 해도 위화감은 없었을 것이다. 멀쩡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맑은 눈의 광인'들이 모여있다. 이야기 간에 공통점이 있다면 결핍된 존재들이 빈자리를 채우려는 욕망이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곳을 떠나서 설렜다가도 불안함에 휩싸이고 완벽한 일상도 한순간 무너지고 만다.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로 종종 허무함을 느끼고, 현실을 왜곡하고 스스로도 일그러져 버린다.


이들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일상 속에 마주칠 수 있는 것들이라 무섭다. 이들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우리도 역시 이상한 사람이 되고 이상한 선택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사고, 말과 행동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다. 가장 두려운 건 언제든 이상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책을 읽지 않는 동안 고통이란 말을 습관처럼 쓰곤 했다. 고통을 준 대상을 떠올려 봤고 이미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정리를 했다. 그리고도 남은 목록에는 여전히 내가 있다. 사랑과 인정, 건강과 행복을 갈망하면서도 의심하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일부러 고통을 찾기도 했다. 책을 덮으면서 친근한 마음을 느꼈다면 나 역시 그리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닌가 싶어 불안했고, 그럼에도 시간이 주어진 건 그 역시 다른 전개와 결말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건 아닌가 싶어서 이유 없이 편안해졌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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