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저는 하루살이로 살겠어요

대신 하루를 아주 애써서요
글 입력 2022.12.0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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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게 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그리고 그때는 어떠한 말들도 위로가 안 되는 것 같아.


저 말을 적은 날은 대체 무엇이 그렇게 사무쳤을까. 쓰던 일기장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문장이었다. 내 인생에 꿈이 없었던 시기는 거의 없었고, 꿈보다는 현실을 쟁취하려 노력했던 취준생 시기에도 이상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니.


저 시기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며칠을 돌이켜보고서야 답이 나왔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H가 한 말이었다. H는 그 당시 내가 제일 많이 들여다보던 사람이었다.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반짝거려서 내가 많이 좋아했다. H가 듣는 음악이나 입는 옷이며 말투며 뭐든지 탐 나서 자꾸만 닮고 뺏고 그랬다. 가장 빛나는 것은 아마도 H의 꿈이었을 것이다. 나는 H의 꿈이 영원하길 바랐다. 도전하기 무서운 꿈을 겁도 없이 키워나가는 그의 열기가 정말로 따뜻했다. 내가 근사한 일을 하지 않아도 덩달아 뿌듯해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제법 오래, 참을성을 갖고 그를 응원했지만 H의 꿈은 제대로 크지 못했다. H는 매일 퇴근하고 온 나를 어색하고 슬픈 얼굴로 맞았다. 아무래도 H는 자꾸만 바스러지는 것 같은 자신의 미래를 지켜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H가 포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것을 결정 내리기 전에 우리는 헤어졌다. 그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꿈을 부르짖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H가 생각난다.

 

나는 실패할 수가 없어.


그리고 그가 습관처럼 외던 그 말을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꾸준히 실패하고 있다. 재수를 결정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고, 제일 친한 친구를 잃었을 때는 사흘 밤낮을 울었다. 사랑에도 여러 번 실패했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크고 작은 실패를 겪었다. 실패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취약하게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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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빌런 고태경

 

 

실패의 반의어는 아무래도 성공이 아닌 것 같다. 실패한다고 성공의 확률이 낮아진 적은 없었다. 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그러나 실패가 쌓일수록 꿈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꿈의 부속품은 아무래도 자신감과 시간, 좋은 날씨와 용기 같은 것들이니까.

 

결국 실패의 반의어는 꿈이라는 것이 더 말이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요즘 눈에 띄게 작아진 내 꿈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실패의 그림자는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실패의 다음 단계는 순응과 포기라는 것이 두렵게 느껴진다. 나를 다독이는 것은 갈수록 까다로워진다.


나는 그래서 무언가가 무서워질 때면 빨리 가상의 세계로 도망친다. 실패를 아주 납득 가능하게 안아주는 주인공들이 있는 곳으로. 하도 많이 봐서 대사를 외울 지경인 장면들이 닳고 닳도록 나는 그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같은 얼굴로 웃고 우는데도 내 기분에 따라 그것들을 각기 다른 모습이 되어있다.


얼마 전 처음 본 후 아직도 품 안에 안고 다니는 책 〈GV빌런 고태경〉 에서는 꼭 뭐가 되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라는 말이 나온다. 고태경 선생은 혜나에게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재능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위로에도 불구, 혜나는 자신의 삶을 보고 “우리 삶이 영화 같을 줄 알았는데……오케이는 적고 엔지만 많다. 편집해버리고 싶은 순간투성이야”라고 중얼거린다. 영화학교에서는 실패만 엄청 가르쳐주고, 실패 이후에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말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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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집 할머니는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라는 말을 토옥 떨어뜨려 놓는다.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거기서 더 영화를 넘길 수가 없었다. 뭐 이리 간결하고 사무치는 결론이 다 있지 싶어서. 내일은 오늘이 져야 온다. 그러니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오늘만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멋진 하루살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꿈을 이야기하는 영화나 소설은 ‘꿈 깨’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련하더라도 조금 더 꿈이 가지고 있는 장밋빛 희망을 보여주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꿈을 깨야 하는 설정들이 대충 묻어놓은 지뢰처럼 여기저기서 터진다. 그렇게 꿈이 깨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나면 어떻게든 남의 꿈을 처절하게 응원하려는 반항심이 커진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 GV빌런 고태경

 

 

최근에는 여럿의 친구들로부터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 우는지 나도 모르겠는 날.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내가 어떤 상태인지 파헤치고 싶지 않은 날이 온다. 외로운 것이 너무 사무쳐서 지금 뻗친 손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날이 있고 내일이 너무 걱정되는 바람에 오늘을 허투루 쓰고 있는 날도 있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감정에는 무슨 답이 적절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애꿎은 영화나 책 제목만 많이 보냈다. 이 영화도 같이 보고, 저 책도 같이 읽고, 다시 이 드라마도 보고, 이러면서 모르는 척 하루를 더 내밀었다. 영화는 계속 나오고, 책도 계속 나오니까 다행이다, 그러면서 뭐든 계속 보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응원부터 보내는 건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정도 문화처럼 굳어진 일이다. 뭐가 됐든 응원한다. 잘할 거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하냐. 당연히 네 자리다. 네가 널 응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힘껏 응원해 주마. 말 그대로 무작정 응원부터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미워하지 않고 꿈꾸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꿈꾸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 되면 안되는데 조금 서글퍼도 힘차게.

 

나사는 실패한 사람을 자르지 않는다고 한다. 실패를 해본 것이 곧 경험이기 때문에. <찬실이는 복도 많지> 주연을 맡은 강말금 배우는 30대에 데뷔하고 40대에 신인상을 받았다. 얼마 전 라틴 그래미 신인상은 올해로 95세인 앙헬라 알바레스에게 돌아갔다. 박명수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곧 아까가 되고, 오늘은 곧 어제가 되는 시간 안에서 매번 눈부실 필요는 없다. 하루를 쭈욱 연결해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하루에 찬란한 이름이 붙을지 누가 아나. 나는 그래서 나와 친구들의 응원 품앗이를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혜나와 찬실이, 그리고 나를 위하여.

 

p.s 이 글을 마무리한 날,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을 2:1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포기하지 않는 하루에는 가끔 거짓말 같은 보답이 따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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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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