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오늘의 평범한 순간이 언젠가의 특별한 기억으로, 연극 '복길잡화점'의 유연 연출
-
오늘의 평범한 순간이 언젠가의 특별한 기억으로
연극 '복길잡화점'의 유연 연출
손때 묻은 고즈넉한 복길잡화점, 그곳은 일평생 잡화점을 지켜온 '경석'과 그의 아내 '연화', 두 사람의 아들인 '복길'과 그의 딸 '소리', 잡화점 직원 '민정'의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인 나이테 같은 공간이다. 그 하루하루는 한 마디로 평범하다. 출생의 비밀도, 재산을 둘러싼 형제 간의 암투도, 유혈이 낭자한 범죄도 여기엔 없다. 복길잡화점에 새겨진 시간 속에는 가족의 소소한 행복과 남다르지 않은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가족 구성원이 돌아가는 과거 역시 바로 그 복길잡화점에서의 일상이다. 별다를 것 없는 여느 비근한 하루, 그러나 차마 잊지 못하는 어느 각별한 하루. 바로 이 지점에서 평범함은 어느덧 대체 불가능한 특별함으로 재의미화된다.
<복길잡화점>으로 연극 연출로서 첫발을 뗀 유연 연출도 바로 그 점에 주목했다. 연극, 뮤지컬 등 무대를 비롯해 드라마, 영화 등 매체에서도 배우로 활발히 활동해 온 그는 극적인 이야기 속 극적인 인물로 살아 온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을 전쟁에 보내고 자매들을 홀로 키우는 마치 부인(<작은 아씨들>)이었고, 바깥세상과 스스로 단절한 독거노인(<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이었으며, 심지어는 동화나라의 인어공주(<난쟁이들>)로도 분했던 그가 이번 연극에서는 소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에 주목한 것이다. 지난 한성아트홀 공연에 이어 대학로 해오름 예술극장에서 뜨거운 앵콜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복길잡화점>의 유연 연출을 만나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
인터뷰는 연극 <복길잡화점>,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
공연 시작 전에 티켓 부스에서 휴지를 나눠 주시더라고요. 공연을 다 보고 정말 세심한 배려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난번 한성아트홀 공연 때 무방비 상태로 오셨다가 마스크랑 얼굴이 다 젖어서 극장을 나오시는 관객분들이 있었어요(웃음). 그래서 PD님이 앵콜 공연 때는 (‘복길잡화점’이 프린팅된) 휴지를 무료로 드리자고 제안해 주셨죠.
<복길잡화점>은 연출가로서 처음 도전하신 작품인데요. 이 작품을 연출 데뷔작으로 선택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작년 이맘때쯤 대본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연출에 대한 생각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뤘어요. 그러다 다른 스케줄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때 대본을 읽고는 사연 있는 사람처럼 지하철에서 펑펑 울었어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인데, 그 가족의 이야기가 특별하지 않은 점이 제 마음을 많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또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픈 상황에서 나머지 가족들이 슬퍼하는 것에 초점을 둔 드라마가 많은데요.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부분은 연화가 강한 척하다가 떠나려는 순간에 다 내려놓고 기억을 잃는 자기 자신이 두렵다고 얘기하는 장면이었어요. 아픈 누군가의 가족이 아닌 아픈 사람이 직접 토해내는 말이잖아요. 실제로 저렇게 기억을 잃는다는 게 너무 무서울 수 있겠다, 두려울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 작품을 꼭 해 보고 싶었어요.
그럼 처음부터 연출로 데뷔하실 계획은 아니었던 거네요?
이전에도 안무 작업을 연출한 경험이 있긴 해요. ‘연출을 꼭 해야겠다.’라기보다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안무 연출 등을 했을 때 스스로 도움이 많이 돼서 인생에 한 번쯤은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본격적으로 연출을 하겠다는 결심은 없었고요.
<복길잡화점>을 보면서 전에 배우로 참여하신 적 있는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엠마’ 생각도 났어요. 사람마다 속절없이 약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연출님께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건가 혼자 짐작도 해 봤고요(웃음).
<복길잡화점>을 처음 만났을 때는 엠마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오히려 배우들이랑 작품 분석에 들어가면서 '엠마의 마음이 이랬겠구나.'를 더 많이 느꼈죠. 엠마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기억을 잃어버린, 묻어버린 사람이고 이 작품에서는 기억을 놓고 싶지 않은데 놔야만 하는 상황이니까 그게 다르면서도 어떤 지점에서는 닮아 있었어요. 엠마는 기억을 찾는 게 두려운 거고 <복길잡화점>의 인물들은 기억을 잃는 게 두려운 거라 다르긴 하지만, 아픔에 있어서는 비슷한 부분이 많았거든요.
그럼 연출하실 때 특별히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을까요?
전 이 작품이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좋았거든요. 평범해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밖에서 봤을 때는 평범해 보이지만, 인생을 들여다봤을 때 각자가 느끼는 고난 같은 것들은 본인한테 굉장히 특별하잖아요. 그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연습 때도 배우들한테 많이 얘기했어요. 특별한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가 겪지 못했지만 어쩌면 우리 얘기라고. 인생을 들여다봤을 때 남들한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본인한테는 특별한 이야기가 많다고. 결론적으로는 모두가 다 특별하다는 얘기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 거기에 중점을 많이 뒀어요.
그래서일까요? ‘복길잡화점'은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작품의 제목이자 작중 주된 배경인 이 공간이 어떻게 구현되길 바라셨을까요?
무대 디자이너님과 얘기한 부분이 세트에 고스란히 구현됐어요. 저는 복길잡화점이 색채감도 없고 경석과 연화처럼 빛이 바랜 느낌이길 바랐거든요. 경석이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고, 가족과 함께 이뤘던 모든 것들이 세월과 함께 빛이 바랜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이건 너무 전형적인 얘기인데(웃음) 꿈을 향해서 열심히 살다 보면 뭔가를 이뤄냈다는 마음도 들지만, 그런 마음 사이사이에 쓸쓸함도 많이 느끼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복길잡화점에서 많이 느껴지길 바랐어요.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느낌이 화려하지 않게, 요즘 잡화점의 다양한 모습들보다는 조금 더 빈틈이 있는 모습으로 구현된 거죠.
뻔하지만 다르게 푸는 치매 이야기
만드는 입장에서는 ‘치매'라는 소재를 관객이 통속적으로 느끼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을 것 같아요.
처음에 PD님을 통해서 받은 대본에는 반전이 없었어요. 그래서 치매에 걸린 게 사실 다른 인물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내용이에요.” 하시는 거예요(웃음). 알고 보니 작가님이 초고와 그다음 버전 대본을 주셨는데 어쩌다 제가 초고를 받은 거였고, (그다음 대본에는 반전이 담겨 있었으니) 원래 작가님과 제 생각이 같았던 거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금까지 치매에 관한 이야기들은 가족들의 슬픔을 많이 다뤘잖아요. 저는 이야기를 뻔하지만 조금 다르게 풀고 싶었어요. 주변에도 치매를 겪는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고 있는 친구들이 꽤 많은데 겉으로 봤을 때는 ‘마음 아프겠다.’, ‘슬프겠다.’ 싶지만,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마냥 슬프기만 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더 즐거운 기억을 드리려고 하거나, 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마음을 먹거나, 더 강해지려고도 하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치매를 다르게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중음악이 쓰이는 방식도 인상적이었어요. 음악 덕분에 암전 때도 직전 씬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이어갈 수 있었는데요. 어떤 의도로 대중음악을 적극 활용하신 걸까요?
낯선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로 음악만큼 큰 게 없는 것 같아요. 왜 이런 경험 있잖아요. 길 가다가 옛날에 들었던 음악이 나오면 그때 먹었던 음식, 그때 같이 있던 누군가가 생각나고, 그때의 향기가 나는 느낌? 배우들이 가져가는 정서가 음악으로 이어지면서 여운이 남을 수 있게끔 하고 싶었고, 그럴 때 제일 중요한 게 대중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저희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 중에는 공연 자체를 많이 접해 보시지 않은 분들도 꽤 많을 텐데, 대중적인 음악과 함께 이야기의 정서에 더 공감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까지 영화 한 편 보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연극, 뮤지컬이 (요즘은) 많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대중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부분이 있잖아요. 그래서 집에 앉아서 볼 수 있고 쉽게 다시 볼 수도 있는 영화처럼 저희 공연이 관객들에게 더 쉽게 다가가길 바랐어요.
처음에는 옛날 음악으로만 꾸리셨나 했더니 후반으로 갈수록 최근 노래도 많이 들리더라고요.
캐릭터별로 가져갈 수 있는 시대적인 것이나 정서를 고려해서 선정하다 보니까 과거에서 현재 시점으로 올 때 음악 연도 수가 바뀌더라고요.
의도하신 걸까요?
그런 부분도 있어요. 대중의 한 연령대를 선택해서 공감을 얻자는 게 아니었어요. 이 연극에는 경석, 연화, 복길, 민정 그리고 소리까지 3대가 있거든요. 3대가 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리다 보니까 음악도 그렇게 가져가게 된 것 같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연화의 기억이 머물렀던 1984년의 대중문화를 유쾌하게 그려낸 ‘초원의 집' 장면도 인상적이더라고요. 대중문화를 작품에 많이 녹여내신 이유가 있을까요?
이전의 대본에서는 다른 장면이었어요. 초원의 집 장면에 이렇게까지 공감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초원의 집은 저의 개인적인 추억이기도 해요. 딱 한 번 가 봤는데 제가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어도 정서적으로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됐더라고요.
사실 처음에 캐릭터를 구축하고 확장시킬 때 다 저라고 생각했어요. 연화한테 특별한 기억이 뭘까 고민하다가 그날 딱 하루 TV에서 보던 가수를 눈앞에서 보고, 그 가수의 음악을 직접 듣고, 그 가수와 얘기 나누는 게 누군가한테는 얼마나 특별한 경험일까 싶었어요. (초원의 집은) 저에게 특별한 기억이지만 이 기억이 연화한테 갔을 때도 특별한 기억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걸 가족들이 구현한다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지금처럼 구체화한 거예요.
연극의 반전이 드러나는 장면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을 것 같아요.
공연을 많이 보신 분들은 눈치채시기도 하는데 복길, 민정,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석이 아프다는 걸 인지하면서 연화의 존재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거든요. 이들은 경석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래서 배우 동선도 연화 곁에 항상 경석이 있도록 짜였고요. 이 부분에 있어서 배우들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동선이나 연기도 조금씩 바꿨어요. 배우도 사람이다 보니까 연화가 얘기하면 자기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연화를 빼고 연습을 진행한 적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엄청 울었어요.
와, 처음부터 안 보고 있던 거예요? 저도 전혀 몰랐어요.
이게 더 반전이죠?(웃음) 손님들이 찾아와서 얘기하는 장면에서도 “할아버지, 어제 할머니 없었는데….” 하는 순간, 배우도 슬퍼지는 거예요. 제가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한 게 손님들한테는 경석의 병이 특별한 얘기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배우가 슬퍼지면 안 된다, (손님 캐릭터에게는) 슬픈 상황이 아니다."라고 얘기했어요. 의견 차이도 있었어요. 상황이 심각하니 연기 톤을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는데, 저는 이 상황에서는 경석 혼자 심각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심각하진 않아야 한다고 봤거든요. 복길도 몰랐던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고, 다른 인물들에게는 (남의) 개인사고, 결국 경석한테만 이게 어마어마한 거죠. 저는 이 지점이 엠마하고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내가 묻어 놨던 기억을 마주했을 때, 이 모든 게 나였다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인 거죠.
환상성이 있는 엔딩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연출적으로 장면을 만든 건데, 배우들이 다 더블이라 열어놓은 부분이 있어요. 한 배우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연화를 만나고, 또 한 배우는 그냥 그 상태에서 고스란히 연화를 만나요. 저도 다 공감이 돼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없겠더라고요. 현실로 보면 경석이 교련복을 입고 “연화야, 연화야” 부르다가 다시 기억을 잃게 된 건데, 저는 그 기억 속에서 연화를 만난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하지만 정서적인 선택은 배우들도 저도 열어놓고 해석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한 분은 그냥 그 나이 그대로의 경석으로 연화를 만나고, 한 분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연화를 만났을 때의 시점으로 돌아가죠.
말씀해 주신 대로 배우분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연출로서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배우들이 짜여진 연기와 캐릭터적인 무언가를 가져와서 (캐릭터를) 확장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배우한테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것들이 중요했고, 연기 자체를 너무 연극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상황만 놓고 즉흥극을 많이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얘기가 뭐가 있을까?" 하고요. 스태프 가족분 중에 그런 일을 겪고 계신 분이 있어서 실제 통화를 듣고 즉흥적으로 연습도 해 봤어요.
경석이 “나 이제 병원 갈게.” 할 때쯤 되면 연습 분위기도 슬퍼지고 가라앉았거든요. 즉흥극을 많이 했던 건 그런 이유였어요. 우리가 이 드라마에 "아우, 안 됐다." 하면서 슬퍼하는 건 남이랑 똑같이 바라보는 거다, 정작 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나 기억을 잃어서 어떡하냐?” 하면 “무슨 소리야.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아빠, 걱정하지 마. 내가 다 기억할게. 괜찮아.” 이런 얘기를 주고받기도 하는데.
실제로 치매에 관해 조사하다가 사연 하나를 읽었는데, 엄마가 치매에 걸렸는데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기억을 잃은 엄마가 어린 시절을 계속 말하는데 자기는 알지 못하던 얘기를 매일 듣는 게 행복하다더라고요. 치매를 앓기 전에 엄마는 너무 고된 삶을 살았고 웃지도 않아서 마음 아팠는데, 치매를 앓고 나서 엄마가 소녀처럼 어릴 때 얘기를 하는 모습에 행복하다는 사연이었거든요.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부분을 중점으로 배우들이랑 연습도 많이 했어요.
한성아트홀 공연 때는 거의 매일 모니터를 했는데요. 더블 배우들이 갖고 있는 것들이 다르니까 같은 대사라도 캐스트마다 정서적인 느낌과 해석, 매력이 다 달라요. 배우들한테 정말 고맙죠. 저도 재밌어서 많이 보게 되더라고요(웃음).
오늘의 평범한 순간이 언젠가의 특별한 기억으로
앞으로도 연출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그래, 이렇게 한번 경험해 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이번에 작업하면서 너무 즐거웠어요. 사실 대본을 장면으로 만들기까지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제 성격이 이걸 해결하고 자야 하고, 자다가도 생각나면 적어야 하고 이래서(웃음). 당시에는 ’잠을 너무 못 잔다’, ‘힘들다’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그 시간이 소중한 거예요. 배우를 그만두고 연출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 내가 공감할 수 있고 그림을 만들어 보고 싶은 작품을 만나게 되면 (연출을)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극을 한 번 해 보니까 영화를 연출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열심히 시나리오도 쓰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늘 배우로서 무대에 서 오셨는데, 연출로 참여하시는 건 또 다른 감각일 것 같아요.
시작점은 같았어요. 배우로서 어떤 역할을 맡아서 그 역할의 상황, 삶 같은 것들을 상상하며 그리는 방식이 <복길잡화점>을 만들 때 큰 도움이 됐어요. 어떤 장면이나 그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기보단 캐릭터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장면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경석을 그리다 보니까 그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연화였고, 연화를 저처럼 바라보니까 소중했던 복길이 있었고, 복길에게는 의지가 됐던 민정이 있었고, 민정의 삶을 들여다보니까 민정과 비슷한 소리가 있었고. 다 연결이 됐던 거죠. 장면을 만들면서 추가한 대사가 굉장히 많거든요. 내가 그 캐릭터라고 생각하면서 배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까 그런 부분들이 더 디테일하게 살아나지 않았나 싶어요. 저를 잘 이해하고 따라와 준 보석 같은 배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요.
영화, 드라마, 공연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데요. 연출님께 무대는 혹은 공연은 어떤 의미일까요?
무대가 배우에게 주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저는 무대에서 공연을 계속 해 왔기 때문에 그다음에 드라마라는 행보, 영화라는 행보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무대 위에서 두 달 동안 그 역할로 살고, 그 역할로 관객들을 만나고, 내 눈앞에 있는 관객들과 공감하고. 이런 건 무대 아니면 경험할 수 없거든요. 무대에서 (역할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앞에 있는 관객을 공감시킬 수 없고요.
어떤 정답도, 해답도 없지만 공연을 계속 이어 나가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아요. 드라마나 영화는 그 순간 가장 적합하다고 느낀 것을 결과물로 찍는 거잖아요. 공연은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까지 역할로서의 성찰이 어마어마해요. <복길잡화점>을 그래서 더 하고 싶었던 것도 있어요. 당시에 드라마를 촬영 중이었고 공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거든요. 스스로 뭔가를 느끼고 반성하고 성찰할 시간이 저한테 필요했던 거죠.
극 중 '복길잡화점'은 지난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돼요. 연출님께 '복길잡화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복길잡화점>을 처음 읽었을 때 제게 소중했던 것들이 많이 떠올랐는데,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초원의 집이었어요. 별거 아닌 추억이지만, 배우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게 그 시점이었거든요. 저는 이주일 선생님의 스탠딩 코미디는 못 봤고, 조영남 아저씨의 스탠딩 공연을 봤는데요(웃음). 그때 처음으로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걸 느꼈고, 아주 가까운 단상이었는데 저 위에 올라가서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복길잡화점>과 초원의 집이 딱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한테 (복길잡화점은) 어떤 물건, 공간보다 그때의 기억, 향기인 거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통해 관객분들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특별하진 않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참 아이러니한데…. 우린 모두 특별하잖아요. 그 특별함 때문에 때로는 상처를 받고, 내가 너무 특별하다고 생각해서 돌아오는 것들에 대한 실망감도 있고, 내가 특별하지 않다고 인정해 버려서 상처받을 때도 있고.
그런데 지금의 오늘은 언젠가에 가장 특별한 기억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오늘 제가 인터뷰하는 이 시간도, 끝나고 나면 ‘좀 더 잘할걸.’ 할 수도 있지만(웃음) '그때 <복길잡화점> 인터뷰했을 때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전했던 것 같아.'라는 특별함으로 남을 수 있는 거고요. ‘오늘 나는 왜 이렇게 특별하지 않지? 누군가는 주식으로 돈을 벌고, 누군가는 승진했고, 누군가는 합격했는데 왜 오늘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언젠가는 가장 특별한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김나윤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