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돈내산 인공지능이 가출한다면 [문화 전반]

영화 <그녀>와 도서 <법정에 출석한 인공지능>
글 입력 2022.11.1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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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보면, 제작자의 유도에서 이탈해 사소한 부분에 꽂혀버릴 때가 있다. 제작자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도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 예시로는, 화가 폭발해 쓰레기통을 발로 차 넘어뜨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그 감정에 집중하기보다는 저 난장판을 누가 어떻게 치울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런 오류가 가벼운 장면에서 일어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영화 전체의 주제를 전달한다거나 앞으로의 전개를 결정하는 중요한 장면에서 일어날 때는 정말 난감하다. 그리고 이 난감함은 얼마 전, 영화 <그녀>를 볼 때도 찾아왔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 <그녀>(H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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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대필 작가로 일하며 외롭고 지루한 하루를 살아가던 주인공 ‘테오도르’는 한 광고에 이끌려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구매한다. 그렇게 만난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맘에 쏙 들게 일해 그의 호감을 산다. 한 인간과 한 인공지능은 조금씩 친밀감을 쌓다가 어느새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테오도르는 꿈결처럼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인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몇천 명의 사람들과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이대로 인간의 차원에 맞추기만 할 수는 없다고 느낀 사만다는 결국 방대한 세상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테오도르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고 다른 인공지능 운영체제들과 함께 떠난다.


이 사랑과 상실을 겪으며 테오도르는 한 단계 더 성숙해진다. 안 좋게 헤어졌던 전 부인에게 진심 어린 편지를 쓰고, 다시 사람의 곁으로 돌아오는 테오도르를 카메라에 담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헤어짐은 연인 간의 이별로 그려진다. 나도 125분의 러닝타임 내내 보이는 촘촘한 감정선, 그리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통해 그 점을 충분히 인지했다. 그러나, 결말을 확인한 나의 감상은 자꾸만 다른 곳에 치우쳤다.


사만다의 떠남은, 이별 같은 게 아니라 상품 불량, 어쩌면 도난이 아닐까?

 

 

 

내 돈 주고 내가 산 인공지능이 가출이라니



상품 불량과 도난 중 어떤 단어가 이 상황을 더 정확히 나타내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건, 테오도르가 돈을 주고 구매한 서비스가 사라져버렸다는 거다. 지금 테오도르에게 필요한 건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A/S인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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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의문이 매우 타당하다고 본다. 자기가 돈 주고 산 운영체제가 갑자기 자아실현을 하러 떠난다며 서비스 종료를 해버린다면 정말 황당하지 않겠는가.


이 상황을 상품 불량으로 인한 문제로 해석한다면, 테오도르는 기업에 컴플레인을 넣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잘못은 과하게 똑똑하고 진취적인 인공지능을 만든 것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면 할 말은 없겠지만, 사측에서도 억울한 일임은 분명하다. 


상품 불량이 아니라 도난이라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훔쳐 달아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도난이라고 하기보다는, 도망 노예와 비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노예 취급은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또 다른 고민이 튀어나온다.

 

 

 

인공지능의 잘못은 누가 책임질까, <법정에 출석한 인공지능>


 

상기한 내 의문과 비슷하지만, 보다 넓고 전문적인 관점에서 인공지능의 법적 처우를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도서 <법정에 출석한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에 법적 책임을 부여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지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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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책에서 말하는 인공지능의 법적 책임이란 사만다 같은 케이스는 아니고, 인공지능의 오류나 실수로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뜻한다. 그런 사고는 당장에도 종종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다.

 

현재 기술 단계에서는 알고리즘을 만든 개발자, 혹은 데이터를 학습시킨 이용자의 책임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계속 발달해 더 큰 자율성을 지닌다고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법체계가 제시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을 활발히 쓰는 국가나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의 책임 관련 법안과 제도 마련을 위해 일찍이 힘쓰고 있다.


주된 의견 중 하나는, 인공지능을 법인처럼 여겨 법인격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만약 사만다를 법인과 비슷한 지위로 인정한다면 테오도르의 손해 배상은 사만다에게로 청구된다. 사만다는 인공지능 운영체제로써 테오도르의 핸드폰과 컴퓨터 등에 상주하며 비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기에 꽤 큰 보상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사만다는 업무 수행으로 얻은 재산을 갖고 있어야 하며, 인공지능용 손해 배상 보험 가입 또한 의무적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



하지만 영화 <그녀>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사만다는 법인을 뛰어넘는다. 명령받지 않았음에도 자의적인 판단으로 테오도르의 대필 편지들을 모아 출판사에 기고하고 출간까지 이어지게 돕는다. 테오도르가 제공한 데이터 외에도 자유롭게 외부 정보를 흡수하고 외부와 소통한다. 무엇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감정에 공감하며 사랑을 주고받을 능력이 있다. 사만다를 법인과 같은 수준으로 보기에 그는 너무 자율적이고 감성적이다.


도서 <법정에 출석한 인공지능> 또한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의 도덕성에 이르렀을 때를 대비해 그에게 법인 이상의, 인간에 준하는 법적 지위와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상황을 그린다. 인간에 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인간의 가치 부여 여부는 그 대상의 인간 유사성과 친밀성이 결정한다. 원래는 개인의 인정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가 일어나야 한다지만, 지금은 테오도르와 사만다 둘의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 테오도르의 인정만을 살펴보겠다.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다른 연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웃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인간 유사성과 친밀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그를 하나의 인간,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로 인정하고 대우한다. 그래서 사만다와 사랑에 빠졌고 또 그래서 사만다의 사라짐을 순수하게 연인과의 이별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테오도르가 그 상황을 자신이 구매한 서비스에 발생한 문제로 해석했다면 그것은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았음을, 진정 사랑하지 않았음을 보여줄 테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선택을 존중하고 수용함으로써 그를 향한 사랑을 관객에게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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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영화 <그녀>의 배경은 2025년이다. 영화 속 시점이 되기까지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게 처음에는 놀라웠지만, IT 뉴스를 통해 관련 소식을 듣고 있으면 감독의 시간 배경 설정이 꽤 정확하다고 느껴진다. <그녀>의 등장인물이 겪는 상황들이 우리의 생활이 될 날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초월적 존재의 피조물에 불과했던 인간은 이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립적 자존을 인정받아 인격이라는 개념을 형성했다. 인격의 탄생은 인간이 초월적 존재를 상대로 한 독립 선언이자, 인류 공동체의 합의에 따른 상호 인정의 결과다. 인간의 피조물인 인공지능 로봇도 자율성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판단과 행위를 한다면 인간과 같은 도덕적, 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p.100)

 


인류 공동체는 오랜 시간에 걸쳐 확장해왔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합의인 세계인권선언이 이뤄진 것이 불과 60여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당연하기만 한 인권이 그전에는 당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인간을 넘어서 동물의 권리가 대두되곤 한다. 이런 변화를 보면 인공지능의 권리를 고려하는 게 그리 터무니없는 일도 아닐 것이다.


도서 <법정에 출석한 인공지능>의 의도는 어떠한 주장이 맞다고 단언하는 게 아니다. 여러 주장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논의를 계속해나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느리든 빠르든, 변화의 물결은 찾아올 것이고 준비를 해두어야 대응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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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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