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르지 않아도 부르는 걸 알아요. [도서/문학]

글 입력 2022.11.1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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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름을 만나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로를 알아가고, 또 가끔은 그 많던 이름을 잊기도 한다. 이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 꽃

 


우리는 이 시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봐왔다. 특히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은 그 어린 마음에도 나에게 깊게 파고 들었다. 단지 국어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만이 아닌, 이 시와 시 속에 있는 '이름'이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이름'의 속성


 

이름의 속성은 '애정'이다.

 

8살 여름, 아버지는 어항에 물고기를 세 마리 담아 집으로 가져오셨다. 세모난 모양에 큼직한 크기, 빨간 눈에 해파리 같은 지느러미까지. 물고기라고는 금붕어나 구피만 봐왔던 내 인생에서 가장 특이하고 이상한 생명체가 등장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 종을 '디스커스'라고 소개하며 그 누구보다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하루는 나무와 사각 유리함을 가져오시더니 직접 톱질을 해가며 물고기를 위한, 물고기에 의한 어항을 손수 만드시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아버지만큼 애정을 가지고 물고기들을 돌볼 수는 없었다. 빨간 눈이 나를 쳐다볼 때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도 학교를 갔다 오면 부엌에서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어항 앞에 앉아 그 세 마리의 생명체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늘 똑같은 공간을 몇 바퀴씩 도는 걸 구경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애정이라는 감정은 호기심으로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세 마리 디스커스에게 이름을 지어주며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꿋꿋하게 그 이름들을 마음속에서 여러 번 불렀다.

 

이사를 가는 날, 아버지는 커다란 어항 대신에 양동이에 물고기를 담고 미리 이사하는 새 집 베란다에 가져다 두었다. 새 집에 미리 적응을 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세 마리 물고기들은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페인트 냄새에 노출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날 밤, 어두운 방 안에서 아버지는 홀로 앉아 있으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아버지도 세 마리의 물고기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셨을까? 밥을 줄 때마다 이름을 되새기며 많이 먹어라 싶으셨을까? 아버지가 그 작은 생명체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 조그만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아버지에게 (어쩌면 아버지도 모를 사이에) 커다란 존재가 되었나 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태어나면서 이름이 붙여지고 이름이 불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은 성립되고 성장한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항상 '엄마'였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엄마'로 불렸다. 직장에서는 '선생님', 누군가에겐 '언니'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슬픈 건 이름 석 자가 불릴 일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름을 대신해 역할로 불리면서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반대로,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어느 순간부터 오빠는 어머니의 이름에 애칭을 만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장난스레 투정을 부리면서도 또 그게 그렇게 싫어 보이지 않았다. 친구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 이야기를 장난스럽게, 때로는 조금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이유는 이름이 주는 애틋함과 동시에 이름에 포함된 나에 대한 속성 때문이 아닐까? 어느 집에서는 결혼 후 부부가 서로를 'OO 씨'로 부르기로 했다고 들었다. 서로를 평생 동안 부르며 계속해서 정체성을 찾아주는 것 같아 이 이야기가 나에게 무척 인상 깊었다. 훗날 나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나이를 먹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은 '기억'이다.

 

이름을 듣고 오랜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빛바랜 기억들이 슬금 슬금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처음으로 등록한 헬스장에서 어색하게 개인 트레이너 선생님과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인을 할 때 종이에 적힌 트레이너 이름을 보고 알았다. 중학교 동창이라니. 그 친구와의 중학교 때 기억이 고개를 내밀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에 태권도를 좋아하던, 목소리가 크지만 무례하지 않던, 옆자리에 앉아 쉴 틈없이 이야기를 해주던 그런 친구였다.

 

찾아도 찾을 수 없을 텐데 이렇게 돌고 돌아 한 동네에서, 그것도 트레이너와 트레이니의 관계로 만나게 되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우연인가! 그렇게 우리는 하체 운동을 하다가 서로를 알아보았고 옛 추억을 이야기하였다. 이름이 아닌 겉모습만 보았더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름이라서, 그 친구의 이름 속에 내 기억들이 담겨 있어서 이름을 통해 그를 알아보았다. 이처럼 이름 속에는 우리의 추억과 잊고 살았던 기억이 듬뿍 담겨 있다.

 

이와 같은 이름의 속성들 때문인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꽃이 되었고,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되고 싶다는 김춘수 시인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다.

 

이제 이 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바로 박선아 작가의 '어떤 이름에게'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듯한, 어떤 이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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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여행지에서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혹은 비슷한 무언가를 낯선 타지에서 보았을 때 작가가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편지를 작성한 것이다. 수신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말이다. 제 3자는 그 '누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편지 속 이야기가 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들려주는 편지인 것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발신자와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이름이 없어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있다니, 신비롭지 아니한가. 책을 읽고 있는 나조차도 어느새 누구에게 편지를 쓰면 좋을 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써보면 되지!'

 

 

 

내가 보내는 '어떤 이름에게'


 

오늘은 카페에 갔다가 중학생쯤 돼 보이는 학생들을 봤어. 그래서 너와 중학생 때 나눴던 이야기가 갑자기 기억난다. 정글짐 맨 위에 앉아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대뜸 내가 너한테 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말했지. 그림도 잘 그리고 싶지만 재능이 없어서 슬프다면서 말이야. 그런 너는 나에게 그럼 배우면 되잖아?라고 말했어. 그 시절 나는 그런 너에게 좀 서운했던 거 같아. 내가 원한 건 해결책이 아니라 공감이었는데 말이야. 시간이 지나 MBTI가 유행하면서 서로 다른 성격 유형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엔 너의 모든 행동과 말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어. 하여간 다시 돌아가서, 어린 마음에도 너는 말 그대로 어른스러워 보였고 성숙해 보였지. 현실적으로 이 상황을 바라본다는 것도 다 느껴졌어. 참 다르기도 달랐지. 서로 다른 아이돌을 좋아했고, 너는 현실적 나는 비현실적, 떡볶이에서는 난 어묵이 좋은데 너는 떡이 좋대. 그래도 그 시절 난 너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재밌었던 거 같아. 음악방송에 가겠다고 수업 종이 치자마자 학교를 달려 나왔고, 유행하는 드라마 명대사를 따라 하던 것도 웃겼지.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와 같아서 외롭지 않았어. 커다란 웃음소리로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라 웃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아파트 주민분들께 미안하기도 하다. 며칠 전에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뜨끈한 온돌방 때문인지 거하게 취한 날, 우리 둘이 아이처럼 엉엉 울었던 거 기억나? 술 취해 주책이다 싶기도 하지만 왜 때문인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려와. 항상 완벽주의였던 너에게 난 위로를 주는 친구이고 싶었나 봐. 생각하니까 지금 또 갑자기 눈물이 고인다. 비현실적인 나는 현실적인 너의 부분을 부러워했고 현실적인 너는 비현실적인 나를 부러워했다니, 이게 얼마나 모순적이면서도 슬픈 상황이니! 우리 여전히 정반대에 지금은 서로가 바빠서 연락도 뜸하지만 가끔 만나도 즐거운,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우리의 우정이 자랑스러워. 전학 온 학교에서 낯가리며 조용히 있던 나에게 다가와 놀이터에서 같이 '탈출 게임'을 하자며 손을 내밀던 초등생의 너에게 아직도 고맙네. 비행기를 타려고 할 때마다 타이밍이 안 맞아 멀리 해외여행을 못 가 속상해한 너, 우리 나중에 함께 유럽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자. 분명 재밌을 거야. 

 

 


부르지 않아도 부르는 걸 알아요.


 

내 편지를 읽고 '어떤 이름'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아차렸을까? 아마 틀림없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과 여러 관계는 이름만으로 엮여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기억과 지난 시간에 대한 추억으로 연결되어 있다. 커다란 지구에서 몇 십억 분의 일로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만났다는 건 말 그대로 만날 운명이었다.

 

 

여행하며 마주한 이야기를 그때그때 떠오른 이에게 편지로 써뒀습니다.

순서가 조금 바뀐 것뿐입니다.

이전에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쓰고 모두에게 말하는 것처럼 굴었어요.

이번에는 그 이름을 먼저 불러봤습니다.

 

- '어떤이름에게' 작가의 말 中

 


작가의 말을 읽고선 책장을 넘기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떠올리며 모두에게 말하는 것처럼 쓰인 글과 그 이름과 그 사람을 떠올리며 오롯이 그를 위해 쓰인 글은 쓰는 입장에서도, 읽는 입장에서도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편지의 특성이 바로 이것이다.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그를 향한 내 감정과 마음을 표출해 내는 것. 이름을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받는 이가 당신임을 깨닫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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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이름들이 내 머리속으로 들어오고 때로는 소비되고 잊히면서 나에게 남는 이름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이름이 나에게 남아있다는 건 그이와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름이 남겨질 존재였을까? 때로는 누군가도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편지를 써주기를 바란다.

 

오늘 밤은 이름 없는 편지를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편지를 읽는 누군가가 '이건 내 이야기다!'라며 비밀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게, 우리의 기억을 몰래몰래 꾹꾹 눌러 담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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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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