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행단을 세우는 마음, 인의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 - 현장극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

글 입력 2022.11.0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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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기도 오산시의 화성궐리사에서 열리는 현장극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궐리사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화성궐리사는 조선의 제 22대왕 정조가 창건하고 사액을 한 곳이다. 그런 특별한 장소에서 열리는 현장극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 역시 공자의 뜻을 기리고 애민 정신을 세우기로 한 정조의 이야기, 화성 궐리사가 세워진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오산시의 기념물인 ‘오산시 궐리사’를 알리기 위한 이 극은 문화재청과 오산시의 주최 아래 극단 정:지가 기획 및 제작을 맡았다. 그리고 정영선(브이알북 대표) 각본, 정인정 연출, 민슬지의 각색 등 여러 정성 어린 손길이 이 연극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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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서 진행되는 현장극 관람은 오랜만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아무래도 날씨가 걱정이 되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 하늘은 파랗게 맑았고 기온도 여느 날보다 따스한 편이었다. 연극의 전후로 진행된 체험 행사의 영향인지 유소년을 동반한 가족 단위 관객이 많이 보였다. (궐리사 경내에서 공자, 정조와 의미를 연결지은 여러 만들기 체험 행사가 있었다)


실제로 공연의 눈높이 또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적합했다고 여겨진다. 자칫 어려울 수도 있는 역사 이야기지만, 극 안에서 해설자 역할을 하는 정령(최규호 분)이 가벼운 톤으로 핵심 인물을 소개하기도 하고 어린 관객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질문을 던지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손을 들고 극에 몰입했다.

 

화성궐리사는 본래 공자의 후손인 공서린(조선 중종 때 문신이자 공자의 65대 손)이 후학을 양성하던 강당이었다. 이 터에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심었다. 고사에 따르면 공자는 살구나무(혹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영향으로 이후 은행나무 아래에서 공부를 하면 큰 학자가 된다는 믿음 또한 생겨난 것이다. 조선에서도 그 믿음은 유효했다.

 

정령이 공서린(정인정 분)과 그의 죽음을 설명한 후 극 중 시간은 음악과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이 연극의 독특한 점이 라이브로 연주되는 첼로 연주가 곁들여졌다는 것인데, 사당의 경내라는 특수하고도 고즈넉한 장소에 첼리스트 이진영의 첼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도 의외의 운치가 있었다. 연주에 맞추어 붉은 옷의 권선화 안무가가 춤을 추는 동안 다른 배우들은 은행나무가 되어 바람과 시간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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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때는 어린 정조(정찬희 분)가 세손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문소연 분)를 잃은 사건인 임오화변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연극이 펼쳐지는 공간 뒤편에서 나무의 형상으로 뭉쳐 몸을 흔들고 있던 배우들은 각자 앞으로 나와 영조, 노론 사대부(김주찬 분), 사도세자와 어린 정조가 되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대부의 눈 밖에 난 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버지인 영조와 사대부들이 등을 돌리면서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게 된다. 이때 아버지를 잃은 괴로움을 나타내는 정조의 몸짓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정령이 말한 대로 정조는 그 날을 하루도 잊지 않았다. 살얼음을 밟듯 조심스럽게 지냈을 세손 시절-왕이 되기 전 그는 자객의 습격 때문에 갑옷을 입고 잠을 잤을 정도라고 한다-을 거쳐 당당히 왕으로 즉위한 정조가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연극 속의 정조 역시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를 알리며 크게 외친다.

 

왕이 되었으니 정치적, 군사적, 학문적으로 왕권의 기반을 단단히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억울한 자가 없고 중요한 바를 잊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다. 정조는 공서린의 사후 잊혀 가고 있던 학교를 공자의 인(仁) 사상을 기릴 사당, 즉 궐리사로 만들기로 한다. 당시 충남 논산시에 소재한 노성궐리사는 노론 사대부들이 세운 것으로, 왕이 직접 궐리사를 세울 필요를 느낀 것이다. 정조가 앞으로 조선은 왕과 백성을 위한 나라가 될 것임을 천명하며 연극은 끝이 난다. 오산시 화성궐리사의 역사란 이토록 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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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궐리사가 왜 정조에게 중요했는지, 이곳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등에 대해 더욱 자세한 정보는 연극 직후 이어진 강연에서 들을 수 있었다. 도서 <리더라면 정조처럼>의 저자인 김준혁 한신대 교수의 강연이었다.

 

궐리사라는 이름은 공자가 탄생한 마을 이름, 즉 산동성 곡부 안의 마을 ‘궐리’에서 유래했다. 한편 공자의 묘를 공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자가 성인으로서 황제의 무덤보다 높은 칭호를 받은 것이다.(황제보다 더 높은 이의 무덤에만 ‘림’ 자를 쓸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문예의 공자와 무예의 관우의 경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그런 공자를 정기적으로 참배했고, 그 참배를 위한 사당이 궐리사였다. 한국의 노성궐리사와 화성궐리사 역시 그 이름을 따른 것이다.

 

앞서 현장극에서 언급되었듯이 충남 논산의 노성궐리사는 노론 사대부들이 세운 것이다. 이는 특정 사대부 세력이 자신들이 공자를 계승했다는 의미로 사당을 세운 것이라, 중국에서 황제들이 공자를 참배할 궐리사를 만든 것과 격이 맞지 않았다. 김준혁 교수에 따르면, 공자는 학문의 왕 같은 사람이니 조선에서도 왕이 직접 공자를 모시는 게 맞는 일이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노론 사대부를 압도하고 제압하여 정치적인 기반까지 공고히 하려는 정조의 판단이 화성궐리사를 세우게 한 것이다.

 

정조가 화성궐리사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아보려면 먼저 이 사당이 위치한 화성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과거에 화성은 지금의 수원-오산-화성 전역을 일컬었다. 즉, 지금보다 그 규모가 컸다. 빛날 화, 아름다울 화 자를 쓰는 화성은 그 이름대로 빛나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정조가 수원 도호부를 화성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화성 유수에 판서 이상을 역임한 이로만 임명한 데서 옛 조선의 도시 화성의 지체를 알 수 있다. 조선의 3백 개 고을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던 곳이 수원 화성이었으며, 화성은 정조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기획 도시였다. 실제로 정조는 무예의 중심(장용영)과 불교의 중심(용주사)을 화성에 두었으며, 나아가 유교의 중심으로서 화성궐리사를 만든 것이다.

 

조선에서 공자를 받들기 위해 국가가 만든 기관은 성균관과 궐리사 두 곳이었다. 성균관이 공자의 뜻을 받드는 교육기관이라면 화성궐리사는 제사기관이다. 오산시 화성궐리사에는 공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데, 이 또한 정조가 규장각에 있던 초상을 궐리사로 보낸 것이다. 이는 정조가 가장 사랑한 초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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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리사 내의 공자상

 

 

강연의 말미에 김준혁 교수는 정조가 아꼈던 신하 정약용과 그의 형인 정약전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좋은 학문, 큰 학문이란 더 많이 배워 그 지식으로 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이란 이야기였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전한 말씀이었지만 강연을 듣던 필자 또한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해주시던 말씀과 결이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공부 많이 하면 세상에 좋은 일 할 게 참 많다’던 아버지의 말씀. 어릴 때는 그 말을 그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깊은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커서 그 내용을 다시 돌아보니 이루기 어렵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깊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 하나 밝게 건사하기 힘든 삶 속에서 그 말은 꼭 잘 닦아 나를 비추는 거울 같다.

 

내 마음속에 분명 있었으나 나도 모르게 어느새 흰 천을 덮어씌워 구석에 두었던 거울. 그 덮어놓았던 천을 궐리사 경내에서 은행잎을 흔들리게 하는 바람 한 점 사람들과 같이 맞으며 걷어냈다. 공자의 가르침, 정조의 애민정신, 현실에서 삶의 가치를 환기해주는 예술가들, 잊을만하면 좋은 말을 되새겨주는 좋은 어른들. 오랜 시간 속에 맥이 끊기지 않고 전해져 온 인(仁)의 가치를 떠올려 본다. 그것을 계속 되새김질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잘 닦아 비췄던 움직임들을 생각해 본다.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전통에서부터, 옛 성현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공연을 만드는 것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까지 자못 경건해진다.

 

그날 느낀 바를 다 잊기 전에 내딛는 한걸음에, 하늘거리는 은행잎에 마음을 묶어본다.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떠올린다면 다짐하고 실천할 기간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속셈으로. 학문을, 마음을 잘 닦아내야지. 나는 물론 남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게다가, 인생에 있어 공부란 끝이 없으니 말이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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