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할 수 없는 가해자, 동정할 수 없는 피해자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글 입력 2022.10.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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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연애를 하고 있는가? 또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각자 원하는 사랑을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구름을 떠올리듯 자신의 가슴 한 켠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이상형(理想型)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구름이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듯, 우리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사랑은 우리가 그리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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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쌍의 남녀가 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서로 사랑하고 있다. 여자의 이름은 쿠미코, 남자의 이름은 츠네오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여자에게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항상 쿠미코가 츠네오에게 업혀야한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랑. 츠네오가 쿠미코를 업고 있는 모습, 그것이 이들이 해야 할 사랑의 형태다.


완벽한 모양새는 아니지만, 그들의 연애에는 행복이 있다. 남들보다 천천히 길을 거닐며 남들은 무심히 지나칠 것들의 본질을 또 다른 시선으로 잡아채기도 하고, 무리하게 속도를 내다 결국엔 언덕을 뒹굴어버리지만, 서로를 보며 와하고 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츠네오는 지쳐간다. 그리고 츠네오의 그런 정신적 피로가 표출될수록, 사랑의 형태는 반대로 향하게 된다. 어느새 지쳐있는 츠네오를 쿠미코가 정신적으로 업고 가는 형태의 사랑이 지속된다. 쿠미코는 알고 있다. 자신에게 허락된 사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음식물을 버리는 간단한 일조차도 성추행이라는 끔찍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자신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편하게 상대방의 뺨을 때리고 떠날 수 있는 사랑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절하리만큼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츠네오는 쿠미코에게서 도망친다. 쿠미코는 쓸쓸히 남겨진다. 츠네오는 그녀를 떠나오는 길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츠네오의 독백처럼, 둘은 아마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할 것이다. 정확히는, 츠네오는 다시는 조제를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해변가를 걸을 때, 손을 잡고, 천천히 그리고 나란히 걷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 사랑은 다르다. 서로 엉긴 채 넘어지기도 하고, 비틀거리며 때론 파도에 휩쓸릴 뻔 하기도 한다. 이런 위험천만한 동행에 우리는 관계 자체를 원인으로 삼고, 갈등하며 결국 상처 남은 채 서로를 떠난다. 그렇다면, 츠네오와 쿠미코는 애초에 안 만나는 게 나은 관계였을까?


그에 대한 열쇠는 츠네오가 아닌, 쿠미코가 쥐고 있다. 쿠미코의 삶은 어둠 속에 던져져 있었다. 세상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공격했다. 그녀는 도저히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우연히 츠네오가 다가왔다. 처음 쿠미코는 밀어냈다. 이런 어두운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츠네오가 엮이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츠네오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결국 그들은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 츠네오는 최선을 다해 쿠미코에게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쿠미코는 세상을 하나 둘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 자신을 공격해왔던 세상에 생긴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츠네오와 함께라면 어떤 호랑이도 두렵지 않았다. 어느새 츠네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쿠미코였지만, 그녀는 담담할 수 있었다.  그런 모양새의 현재조차도, 심해 속에서 공포로 오들오들 떨던 과거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드넓은 바다를 헤엄쳐 본 경험만으로도 말이다.

 

츠네오가 떠나간 후 다시 쿠미코는 혼자 남았다. 또다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언제 자신을 해칠  지 모르는 세상을 경계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쿠미코는 이전과 다르다. 그녀에게 이전과 같은 두려움은 없어진지 오래다. 츠네오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어떤 사랑이든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하지만 쿠미코와 함께한 사랑같이 독보적인 사랑의 형태는 다시 경험해 보기 힘들 것이고, 자신이 그 사랑의 형태를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츠네오는 정말로 쿠미코에게 최선을 다했으니까.

 

우리는 츠네오가 쿠미코를 버렸다고 아무도 츠네오를 탓할 수 없다. 쿠미코가 쓸쓸히 혼자 남겨졌다고 그 누구도 동정할 수 없다. 그저 그들의 사랑을 삼자의 시선에서 목격했다는 무책임의 크기만큼 아려오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뿐이다.


이들의 사랑에 고통의 농도가 더욱 짙을 뿐이지, 우리가 하는 사랑의 형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희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바닷가를 서로가 각자에게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길 바라며 잔잔히 손을 잡고 걷기만 하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하긴 힘든 것이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우리는 점점 진정한 사랑이 주는 고통을 내려놓고 상대방에게서 계속해서 '나'를 희망한다. 나의 안위, 나의 편안함, 나의 자존심.

 

츠네오는 쿠미코에게서 '쿠미코'를 발견했고, 쿠미코는 츠네오에게서 '츠네오'를 발견했다. 그들이 어떤 조건을 가졌든,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상대방을 사랑했다. 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이런 사랑을 꿈꾼다. 상대방에게서 '너'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랑. 비록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러울지는 몰라도, 그 고통으로 인해 함께 성장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사랑. 그게 내 이상형(理想型)이다.


 

[고한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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