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들은 왜 그녀가 꽃뱀이길 바라나 -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피해자다움은 없다
글 입력 2022.10.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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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가 끝난 시점이었다. 학교가 떠들썩했다. 연이어서 두 명의 교수가 성추행으로 공론화된 것이다. 각각 해임과 정직 처분을 받았고, 학교 게시판에는 처벌이 약하다는 비판의 내용을 담은 대자보가 덧붙여졌다. 하지만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 속에는 피해자의 신상이나, 최초 고발의 근원을 묻는 내용도 분명히 있었다. 교수 앞 날이 망했다며 걱정하는 목소리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피해자의 얼굴이 비슷할까봐 무섭다. 거짓말쟁이, 꽃뱀, 그럴만했다, 평소 행실 등의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딱지가 다닥다닥 붙은 모습일까봐 무섭다. 그 딱지들을 없애버리고 나면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 지워져버릴까봐, 그렇게 지워진 피해자의 수가 내가 셀 수 있는 수보다 많을까봐 가끔 두려워진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3년간 1261건 발생했지만 구속율은 17.8%에 그칠 정도로 저조하다. 많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굴되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혀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실종사건으로 시작한다. 변호사 판옌중은 자신의 아내인 우신핑의 실종사건을 쫓는다. 우신핑은 어떠한 단서도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판옌중은 우신핑을 찾는 과정에서 우신핑이 성폭행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판옌중은 우신핑의 선생님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여러가지 면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피해자’,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평가를 내린다. 우신핑은 그 피해를 빌미로 돈을 뜯어냈다는 오해도 받는다.

 

그리고 이 피해자다움에 대한 질문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아니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피해자는 그럼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들은 왜 피해자가 꽃뱀이기를 바라나.

 

 

“오드리는 그 글에서 어떤 문장을 거듭 읽었다. “코끼리는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기억력이 좋은데, 어떤 코끼리는 십몇 년 전에 지나갔던 수원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갈증에 시달리는 무리를 이끌고 그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코끼리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읽고 오드리는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298p)

 


오드리와 쑹화이쉬안은 전부 친족 성폭력, 그루밍 범죄의 피해자들이다. 작가는 작은 사회에서 여자가 얼마나 쉽게 ‘나쁜 여자’로 전락하는지, 그 사회에서 나쁜 여자가 맞이해야 하는 적대감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우신핑을 향한 가족의 비난을 통해 보여준다.

 

오드리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대상이 린 선생님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화이쉬안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오빠와 함께 슬퍼했고, 오빠는 화이쉬안에게 하나뿐인 믿을 만한 가족이 되어줬다. 그런 사람들이 가해자가 되었을 때 피해자들이 그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은 현저히 적다. 적대감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웃고, 없었던 일인 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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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감상을 말하자면, 도저히 소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힘들었다. 보통의 리뷰와는 달리, 소설의 내용을 거의 적지 않은 것도 그 탓이다. 굳이 소설의 이야기를 내가 나서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판옌중의 말처럼 이 이야기는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다. 성폭력은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느냐 피해자가 되느냐는 그들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지금도 피해자가 직접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억울함이나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호소해야 한다.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고 죄의 본질을 가려내야 그 말이 ‘진실’임을 믿어주는 사회에서 피해자임을 주장하고 나서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미투 운동으로 토해진 많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이 세상을 느리게나마 바꾸고 있다.


 

“그 사건들은 각기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현상’에 가까웠다.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였다. 그때까지 판옌중은 자신이 ‘성폭행’이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한 사람의 의사에 반해 성교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떨리는 손으로 서명한 글씨를 보고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소녀는 그로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 혹은 또 다른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소녀가 앞으로 보게 될 세상은 어떤 색깔일까?” (303p)

 


얼마 전 여성신문의 ‘판결을 판결한다’라는 꼭지에서 완벽한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기고를 봤다. 필자는 “성폭력 피해는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타 범죄와는 달리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강하게 작용하는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폭행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제대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피해자의 자격처럼 요구되는 것은 기존 법리에 위배된다.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가 처한 상황마다 대처 양상이 달라 ‘피해자다움’을 강요할 수 없으며 피해자가 보여야 할 마땅한 반응을 상정하고 그와 어긋난다 하여 합리성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가해자에 무죄를 선고한 2심을 파기한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아주 조금씩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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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몇 번을 걸러 적었지만 여전히 조심스럽고 불편한 글이 됐다. 지금 와서 보니 소설의 표지는 마치 문 하나를 두고 여자와 남자가 열고 닫음을 실랑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성별에 관계없이 문 밖으로 나오기를 응원하는 모양으로만 보고 싶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의 세상이 흑백은 아니었으면 한다. 그 소녀가 볼 수 있는 세상이 아직도 총천연색이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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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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