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뒤로 걷는 연습

노잼시기 극복법
글 입력 2022.10.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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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뒤로 걷는 게 좋다. 산책을 나왔다 지루해지면,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잠이 깨지 않으면 몸을 돌려 뒤로 걷는다. 뒤로 걸으면 이상하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시야가 넓어지고 왠지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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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예전의 나였으면 상한 마음을 속으로만 쌓아뒀을 텐데, 방에서 혼자 책이나 붙들고 우울하고 진정이 되지 않는 마음을 시간을 들여 그냥 견뎠을 텐데, 요즘은 여기저기 도움을 청한다. 나 힘들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는데 잘 안되니까 좀 도와달라고 말한다. 간만에 얼굴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좀 긴 전화를 뜬금없이 하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내가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본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주 나오는 말이 다들 ‘노잼시기’라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특별히 없고 뭘 해도 재미없고 권태롭다고 한다. 뭐 그럴만도 하다. 내 주변에는 대학교 말이거나 취업준비를 하고 있거나 사회초년생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동안 속해있던 공간과 공동체에서 떠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음 줬던 관계가 정리되고 막막함에 부딪히고 만다. 좋아하는 사람이 멀어지고 정든 곳을 떠나 다음 장을 향해 준비하는 과정이 마냥 즐거울 리 없다.


다들 나름대로 그 시기를 헤쳐나가는 방법이 있는 것 같다. 공부나 해야 하는 일에 충실하며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연애를 하며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는 이도 있다. 다이빙이라든지 캠핑이라든지 낚시라든지 자기만의 무기를 하나쯤 가지고 있어서 말로는 노잼시기라지만 즐겁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나는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무작정 걷는다. 방에 누워있는 것도 좋지만 불안과 우울을 곁에 두고 슬픔을 베게 삼아 핸드폰만 보고 있으면 인생 날려먹기에 딱 좋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어서 차라리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 고여있던 정신도 조금씩은 흐르게 되어있다. 힘든 시기를 슬기롭게 보내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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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에 잉크가 묻으면 닦아내는 방법도 있지만 새로운 물을 계속 채우는 방법도 있다. 잉크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며 물줄기를 따라 점점 희석되어 옅어진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도 새로운 일들이 들어차고 일상이 흐르다보면 조금은 나아진다.


그런 생각으로 거리를 걷거나 런닝머신 위에 오른다. 하지만 가만히 걷는 건 그리 힘든 운동이 아니라서 음악을 켜놓고도 시간이 길어지면 따분해진다. 그래서 그냥 몸을 가끔 돌려본다. 뒷꿈치에서 앞꿈치로 밀어내던 걸음을 앞꿈치부터 뒷꿈치로, 걷는 내내 바라보던 핸드폰 화면과 페이스, 시간, 거리가 뜨는 런닝머신 화면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지금까지 신경 쓰던 것들에는 뒤통수나 보여주면서 걷는거다.


그러면 정말 색다른 풍경이다. 거리에서 걸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걸을 땐 세상이 내 뒤로 지나쳐가는 것 같은데 뒤를 바라보며 걸으면 내가 세상과 멀어지는 것 같다. 그런 풍경에서는 익숙하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마음 속 고민들을 차분히 정리하기에도 좋다.


뒤로 걷는 시간은 보통 생각하는 시간이다. 헬스처럼 운동부위에 집중해서 자극을 느끼는 시간도 아니고, 목표달성을 위해 기록을 맞추는 시간도 아니니 보통 그냥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천천히 걷는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사건을 타고 뻗어나가는 허무맹랑한 상상. 그 사람과의 통화, 아직도 이불을 차는 지난날의 실수와 미래에 대한 막막함까지 불러와 오만가지 고민과 자기반성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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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방향을 바라보며 걷는 것. 한편으로는 일상에서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좋았던 순간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에피소드처럼 남아있는 사랑했던 순간의 단편들을 쫓아 더듬고 있다. 어린 시절 주말마다 시간을 보냈던 교회에 찾아가보고, 기회가 되면 조금 돌아오더라도 어릴 때 자주 다니던 거리로 걷기도 한다. 또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했던 일들을 따라서, 기회가 되면 주변 사람들과 농구공을 던져보고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방 한 구석에 먼지가 쌓여가는 기타를 꺼낸다.


물론 움직이는 몸도 줄을 튕기는 손가락도 전과 같지는 않지만, 이래서 내가 이걸 그렇게 열심히 했었구나 이해가 된다.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는 건 현재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나날에 대한 기대도 쉽지가 않아서 과거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는 것일 테다. 거기엔 답이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지난 날을 돌아보는 일이 나를 좀 더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지나온 시간이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도 조금은 느끼는 중이다.


더불어 예전에 듣던 음악도 자주 듣는다. 최근에 지구오락실이라는 프로그램이 흥하면서 사람들이 모이면 음악 맞추기 레크레이션을 자꾸만 하는 바람에 추억의 노래를 자주 듣게 되기도 했고, 코로나가 완화되면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축제와 각종 행사에서도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음악에도 추억이 담기는 지라 그런 음악들을 들으면 그때의 시간, 그때의 감정들이 재생된다.


지금의 감정도 나중에 이 음악들에 담길거라고 생각하면 지금 듣는 음악들도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요즘엔 NewJeans의 노래가 그렇다. 최근에 복잡한 마음을 욱여삼킬 때 자주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Attention의 전주를 들으면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답답하고 뭉글뭉글한 느낌. 왠지 복잡했던 한 페이지가 또 넘어가는 소리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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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더듬어 오다보면 결국엔 현재의 내가 있다. 밴드부에서 노래하고 기타를 치던 나에서 작곡을 하고싶어 맥북을 들고 화성악과 피아노를 공부하던 대학시절의 나를 지나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로. 짧은 쉬는 시간에도 주말에도 농구공을 들고 뛰쳐나가던 어린시절의 나를 지나 몇 년 만에 공을 잡고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는 기술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나로. 자주 가던 장소와 골목들을 지나 내 일터와 생활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나로. 어릴 때의 반짝이고 겁먹지 않던 나에서 지금의 나로.


내가 겪는 구체적인 불행과 불안을 설명할 자신도 용기도 없어 ‘노잼시기’라는 정형화되고 편안한 말로 지금을 부르긴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어떻게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중인 것 같다. 감정적인 문제도 직장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는 있지만 이제는 앞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뒤로 걷기라도 해서 지루함을 떨쳐버리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차분히 생각하며 과거를 더듬다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가 보인다. 그 길을 잘 살피다보면 앞길도 보이기 시작할거라 믿는다. 인생은 점이 이어져 선이 되는 거고, 수많은 프레임이 연속되어 만들어지는 동영상이니까.


지금 이 글도 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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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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