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와 세상 사이에서 패션 [문화 전반]

개인적이고도 정치적인 패션의 세계
글 입력 2022.10.0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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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어김없이 옷장 앞에서 수심이 깊다. ‘오늘은 뭐 입지?’라는 질문은 하루를 시작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먼저 수두룩하게 쌓인 옷들을 스캔한다. 저 많은 옷 사이에 막상 입을 수 있는 옷과 조합은 별로 없으니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유행은 왜 이렇게 빠르게 바뀌는지. 이 조합 저 조합을 힘겹게 고민하다 보면 외출 시간이 임박하고, 결국 떠밀려 입은 옷들을 걸친 채 찝찝하게 만족스러운 마음을 안고 밖을 나선다.


그러나 길거리를 나가 보면 사실 조합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쨌든 나의 착장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옷을 입는 기준은 나의 만족도 있지만 결국 그것이 타인에게 얼마만큼 수용될 수 있고, 적합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으로 기울기에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타인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 보니 정말 개성적인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시기에 유행하는 옷들과 조합 몇 가지를 약속한 것처럼 맞춰 구매하고 입는다. 그렇기에 워낙 다양한 개성이 패션으로 표현되는 시대이지만,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의 가짓수가 늘어난 것이지 그 안에서 입는 개별적인 옷들, 막상 ‘원만히 수용’되는 스타일의 수는 한정적이라는 느낌도 한 편으론 존재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수 있다. 과연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입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대로 옷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시대와 유행 속에서 수동적인 능동성만을 표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는 그 흐름 속에서 자기표현을 하는 개인과 양상이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구조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다만 패션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정치적인 세계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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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관습화되어 있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장례식에는 무채색 계열의 검거나 흰옷을 입는 것이 예의다. 결혼식에는 깔끔하면서도 돋보이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이 예의다. 심지어 법으로 옷을 강제하는 경우도 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무슬림 여성들은 자기 몸을 천을 통해 가려야만 한다. 이렇듯 특정한 국가, 민족 등의 맥락 속에서 입어야 하는 것이 강제되기도 한다. 명시적으로 인권 침해적인 요소를 제외하고는, 사회화된 양상을 따르는 것은 어느 정도는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특수한 상황을 벗어나면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만약 ‘일반적인’ 시선에서의 남성이라면 배가 훤히 드러나는 탑을 입기 꺼려지지 않을까? 만약 특히 여성이라면 가슴이 지나치게 노출되는 옷을 입기 꺼려지지 않을까? 만약 노인이라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시도하기 꺼려지지 않을까? 자신의 상태(외형, 직업, 나이, 젠더, 분위기 등)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유행에 맞지 않아 ‘튀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행동에 심리적인 제약을 느끼지는 않나?


아직 모호하다면 백문이 불여일견, 패션에 얽힌 수많은 시선의 무게를 바로 체감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watchingnewyork이다. 이 계정은 뉴욕 거리의 다양한 패션과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 족 사람들은 적어도 한국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자유로워’ 보인다.

 

남성이고 배가 훤히 드러나는 핏 한 탑을 입는다. 누군가의 시선으론 통통하고 뚱뚱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체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여성이고 유두 자국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는다. 온몸을 둘러싼 타투를 드러내도록 옷을 입는다. 가슴 절제 수술 후 남은 흉터가 눈에 띄는 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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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자기 몸에 얽힌 수많은 억압의 시선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 속 그들은 당당해 보이고 편안해 보인다. 그들의 표정과 태도를 보고 있으면 얼마나 많은 사념들이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왜 그러한 시선에 발맞추기 급급해야 하는지 질문하게 한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한다는 패션의 기본적인 철학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어떤 존재든 고유하며 그 고유함이 편안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말이다.

 

혹자는 저건 ‘뉴욕’이니까 가능하다고 반문할 수 있다. 당연히 문화적인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한국이라면 만약 저들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할 유무형의 폭력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인이 한 사회와 문화 안에서 안전함을 느껴야 하는 것은 당연함으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온전한 자기표현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수록 옷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층의 권력을 가졌는지 상기되는 듯하다.


논외로 염려되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패션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가 분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옷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무척 재밌고 극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옷을  효과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듯, 그러한 수단으로써 이용하지 않고 싶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패션의 정치적인 부분을 되뇌었듯이 자기표현의 수단에 얽힌 위계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더 총체적으로 고유할 수 있는 나를 바라보기 위해, 타인을 바라보기 위해 말이다.


살면서 나를 의심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잊지 않고 이 계정을 떠올리려 한다. 나의 선호와 시선을 높이 사려고 말이다. 적어도 나만큼은 나에게 후해보려고 말이다.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이해하거나 의심할 때 이토록 다채롭고 풍성하고 고유한 개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무엇이 됐든, 어떻게 됐든, 어느 정도가 됐든 자기를 탐색하고 표현하는 이들의 수고와 용기를 응원하고 싶다. 더 고유한 ‘나’들을, 더 다채로운 이웃이 만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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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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