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

오래된 약속
글 입력 2022.09.24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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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자마 파티를 하던 12월 25일, 그날 밤 기적처럼 눈이 내렸다. 그토록 바랐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우리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뛰어나가 추위도 잊은 채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밖에 서 있던 우리는 그 밤 먼 미래를 약속했다. 7년 후, 스무 살이 되는 해 크리스마스 날 지금처럼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마치 10년 후의 만남을 약속하던 준세이와 아오이처럼 말이다.

 

1990년, 한 음반 가게에서 준세이는 처음으로 아오이를 만난다. 아니 그보단 준세이의 눈에 아오이가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던 첫 만남 이후 그들은 우연히 한 미술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잠깐의 스침과 우연한 만남,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보다 완벽한 과정이 어디 있을까. 학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를 다니던 준세이와 아오이는 서서히 서로를 인식하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카에 이사무 감독의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하토나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감독은 열아홉 준세이와 아오이의 뜨거웠던 과거와 이별 후 어느새 남이 되어버린 그들의 현실을 빛바랜 필름 속에 담아낸다. 지난 20년간 창고 한구석에 박혀 있던 앨범을 꺼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째서인지 그다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이별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한 소재인데 왜 유독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조금 더 나 자신을 투영하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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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강하게 이끌리면 부딪히기도 쉽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말은 즉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19살에 만나 뜨겁게 사랑했던 준세이와 아오이는 서로를 잊지 못하고 삶을 살아간다. 1994년 봄, 23살의 준세이는 미술품 복원을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한다. 그곳에서 일을 배우며 훈련생으로 공부하던 준세이는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지만 그는 여전히 아오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1997년 봄, 밀라노에서 우연히 아오이를 봤다는 친구에 얘기에 준세이는 밀라노로 향하지만 정작 아오이가 남자친구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가 단독으로 복원하고 있던 작품이 훼손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공방은 잠정적으로 문을 닫게 되고 준세이는 다시금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오이에게 지난 시간에 대한 편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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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들의 사랑이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아오이가 준세이에게 말도 없이 아이를 지운 것이 문제였을까, 준세이의 아버지가 아오이에게 돈을 주며 헤어져 달라고 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혹은 아오이의 낙태가 낙태가 아닌 유산이었던 것과 준세이의 아버지가 아오이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을 준세이는 전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오이를 잊지 못하던 준세이는 10년 전 아오이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찾아온 아오이를 만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오이를 향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숨기고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준세이에게 아오이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은 아오이가 우연히 발견한 연주회에 가는 것이었다. 처음은 분명 평범한 연주회였다. 하지만 그다음, 첼로이스트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것은 10년 전 아오이와 자주 학교 벤치에 앉아 들었던 첼로 이스트의 연주이자 자신과 아오이의 러브 테마 곡이었던,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냉정과 열정사이>였다.

 

 

피렌체 두오모는 연인들을 위한 성지야.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지. 

언젠가 함께 올라가 줄래?


언제?

 

이를테면 10년 후. 준세이 약속해 줄래?

 

좋아. 약속할게

 

-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中

 

 

과거를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준세이였을까. 아오이였을까.

 

누구보다 지난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아오이도 마찬가지였다. 냉정하게 준세이를 떠나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간절히 준세이와 함께 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기에 1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렌체를 찾아왔다. 준세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알기에 함께 하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과거 학교에서 연주를 연습하던 첼로이스트를 우연히 만나 다음 해에 피렌체에서 같은 곡을 연주해 주기를 부탁했다. 잊지 못하는 약속을 기약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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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모든 OST들은 그들이 나눈 사랑과 감정과 슬픔들을 나에게 보다 깊게 새겨 넣는다. < The Whole Nine Yards >, < 냉정과 열정 사이 >, < What A Coincidence >를 비롯한 그 외 무수히 많은 곡들과 함께 영화가 시간을 되짚어감에 따라 나는 지난 과거들을 회상한다. 지키지 못한 오래된 약속들은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다. 20살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그 장소로 누가 왔는지도 나를 결코 알 수가 없다. 좋아하던 친구들, 짝사랑하던 남자아이, 지난 약속들을 모두 마음속에 묻어두고 나는 냉정히 시간이라는 기차에 오른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가 있을까. 기차에서 내리는 나를 반겨주기 위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것은 기차에서 내리고 나야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토록 꽉 막힌 해피엔딩일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볼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면이 페이드 아웃 되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아쉬움이 남지 않은 유일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준세이와 아오이 그 둘의 미래가 전혀 궁금하지 않다. 다만 애틋함이 가득한 그들의 또다른 첫 만남의 순간을 그대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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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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