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할머니는 바나나킥 [사람]

그리고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글 입력 2022.09.1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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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세를 생각했을 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가족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런 순간을 예상하고, 또 대비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했다고 해도, 또 아무리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해도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다.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고모는 바닥을 짚고 울고 있었고 아빠는 그 옆에 앉아 조용히 슬픔을 삭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상복을 입고 상을 치렀다.

 

장례식은 지극히 일상적으로 돌아갔다. 아빠의 직장 동료들이 방문하면 엄마와 함께 테이블에 들러 인사를 했고, 부모님 앞으로 온 근조 화환은 나중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촬영해두었다. 늦은 밤이 되면 사촌들은 술과 안주를 깠다. 식사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메뉴는 항상 밥, 육개장, 전, 떡, 방울토마토, 뭐 그런 것들. 간이 잘 된 반찬을 먹으며 ‘왜 장례식장 반찬은 항상 맛있는 걸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전국 팔도의 한식 고수들은 다 장례식장에 있는 것 같다고. 상중에 쓰러지지 않으려면 입맛이 돌아야 해서 그런 것인지.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 1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도 할머니가 강원도 고성 어디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산다. 할머니의 죽음이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할머니가 있던 세월이 내 삶에서 너무 길었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누군가 나와 강원도의 상관관계를 물으면 아직도 '할머니 댁이 거기에 있다’고 대답하려다, ‘거기에 있었다.’, 또는 ‘아버지 고향이다.’라는 말로 돌려서 표현한다.


그렇기에 할머니가 봉안당의 자그마한 칸 안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실은, 할머니의 화장 과정을 본 이후로는 할머니에 대한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다. 할머니가 한순간에 뼛가루가 되고, 그 뼛가루가 항아리에 쉽게 담긴다는 것까지 전부.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던 사람인데 이제는 서 있지도, 앉아있지도, 누워있지도 않다. 그런 것이 불가한 존재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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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은 제사와 차례를 모두 없앴다. 대신에 할머니가 계신 곳을 방문해 잠시 묵념하고 돌아온다.

 

지난 설에 고모는 할머니를 위해 제사상에 올리는 나물을 무쳐왔다. 코로나 때문에 취식이 일절 불가능하다는 봉안당 안에서 우리 가족은 나물무침이 담긴 찬합 뚜껑을 열고 묵념했다. 그날 할머니에게서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고, 고개를 숙인 내 눈에는 정갈하게 놓인 나물무침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찬합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고, 묵념 이후 헐레벌떡 찬합 뚜껑을 닫고 자리를 떠야 했다.


이번 추석에는 바나나킥을 챙겼다. 아빠 말로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과자라고. 마찬가지로 바나나킥 봉지를 터서 묵념했다. 공교롭게도 음식은 또 내 손에 들려 있었고 그 탓에 고개를 숙이면 파삭파삭하게 생긴 바나나킥이 눈에 들어왔다. 인공적인 바나나 향과 함께 묵념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엄마는 바나나킥을 음복하며 ‘혀에 닿자마자 과자가 녹으니 할머니가 좋아하실 만도 하다’고 말했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나보다도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라고 하면 종이가 깔린 상과 제기들, 그 위에 얹어진 전, 튀김, 나물, 수육, 떡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전부다.


할머니를 추억하라고 하면 당연히 고성의 집에서 우리 가족이 탄 차를 배웅하는,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선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이 멀어지고 할머니 대신 나물이나 과자와 눈을 맞춰야 하는 세월이 길어진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그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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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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