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미얀마에서 온 너에게

글 입력 2022.09.13 13:0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 알았어요.”

 

- 영화 <헤어질 결심> 中

 


나는 네가 이 글을 읽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너에게 선뜻 알려주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곳에서 이러이러한 글을 주로 쓰고 있어, 하고 말이다. 바로 이곳에 너를 위한 편지를 썼다고, 굳이 생색을 낼 생각도 없으므로 너는 아주 먼 훗날에야 이 글을 우연케 발견하거나 혹은 평생 이 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다.


네가 가까운 미래에 내 글을 읽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네가 게으르기 때문도 아니고, 글 읽는 걸 싫어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이유에 가깝다. 너무 바쁘게 살아서, 일주일에 제대로 쉴 수 있는 날이 하루도 없어서, 그렇게 꼬박 반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는 너라서 나는 마음 놓고 너를 초대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내밀한 글쓰기의 세계로. 이 글을 언젠가 네가 읽게 될까, 조금의 두려움과 희망을 느끼며 우리의 첫 만남을 떠올려본다.

 

 

[크기변환]1.jpg



우리는 아르바이트에서 처음 만났다. 동네 한복판에 자리한 가게였다. 내가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 너는 그곳 주방에서 꽤 오랜 기간 일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네가 나와 ‘같은 종족’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같은 종족이냐 하면, 너는 나와 여러 방면에서 놀랍도록 통하는 게 많았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널 지켜보며 뜨문뜨문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결과였다.


그러나 어쩌면 너는 모든 사람하고도 비슷한 종족에 속하는 건지도 몰랐다. 왜냐면 너는 첫날부터 나를 박장대소하게 할 만큼 유머와 활력이 넘쳤고, 사장님을 비롯한 아르바이트생들 모두가 너를 끔찍이 아끼고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의 눈에서 너를 향한 호감의 눈빛을 너무나 명징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한 집단의 기둥이자 버팀목이 된다는 것. 그건 절대로 손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 따위의 평범한 사람이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너의 천성이자 능력이었고, 곧 네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의미했다. 이것이 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너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오며 가며 대화를 나누고, 각자의 성향을 알아가는 단계에서 나는 어느샌가 그것을 무척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로 다른 국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는 미얀마에서 왔지만, 미얀마어와 영어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3개 국어 능통자였다. 가게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한국어를 거의 못 했다던 너는 이제 우리말로 툭툭 농담을 던질 정도로 유창한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나보다 한국어를 더 잘 구사할 때도 많았다. 너의 기막힌 적응력과 천재성에 감탄한 나머지 내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칭찬이 마구 쏟아지고는 했는데, 너는 그럴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아니라고 했다. 너의 원래 성격 탓일지도 모르지만, 웃으면서 내색하지 않으려는 모습마저 한국인의 특성을 완전히 닮아버린 것 같아서 나는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기변환]2.jpg

 


내가 너에게 마음을 열기로 다짐한 날은 네가 나에게 먼저 고민을 털어놓은 당일 밤이었다. 주방과 홀의 오픈 조였던 우리는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비슷한 시간에 퇴근했다. 오픈 시간엔 보통 둘뿐이었으므로 우리는 자주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엔가 너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더니 주방과 홀의 경계에서 조용히 너의 고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진로 걱정부터 학비와 장학금, 비자 문제 등 너를 수시로 끙끙 앓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너는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인생의 분기점이 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그게 너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그건 하소연이라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내게 말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내게서 굳이 답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너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 라고 말을 끝마치는 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너의 미래에 더 도움이 될 만한 길을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며 네가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것뿐이었다.


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내게는 꿈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너처럼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꿈을 이룰 용기가 없어, 라고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해 평소처럼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우연히 퇴근 시간이 맞아떨어져 너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던 날을 기억한다. 알고 보니 우리는 꽤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고, 집 가는 방향마저 같았다. 유난히 손님은 많은데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던 그날, 나는 집까지 가는 동안에도 힘들다고 조금 투정을 부렸다. 너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는 기왕 예정된 일이라면 눈앞의 현실을 불평하는 대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임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힘들다고 외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문득 정곡이 찔렸다고나 할까, 그때의 나는 부끄러움이라기보다 일종의 경외심 비슷한 감정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다.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감정이 메말라가고 있던 탓인지 세상에 별 기대를 걸지 않는 나와 달리 너는 마치 같은 땅을 밟으며 살아가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고,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는 일터에서 짜증을 내거나 불만을 토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름에는 후덥지근한 주방에서 찜통더위를 견뎌야 함에도. 가게에서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아 함에도 말이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그토록 모든 일에 의연해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평생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크기변환]5.jpg



너는 스스로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낮에는 학교, 밤에는 주방을 오가며 하루에 몇 시간도 채 쉬지 못하는 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잠시 믿기지 않았다. 조그만 일에도 툭툭 신경질을 내는 나와 달리 너는 어떻게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거니. 내 친구들은 다들 나보다 더 바쁘게 살아. 새벽 내내 일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친구도 있어, 라고 너는 말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너 스스로가 너무 자신을 몰아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도 되었다. 그래봤자 다들 내 또래일 텐데,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휴식 시간을 박탈당하고 새벽까지 노동해야 하는 현실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 우리는 서로가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었고, 둘 다 꽤 바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절묘하게 시간이 맞는 날을 찾아내어 너와 함께 강가를 걷던 날을 기억한다. 운동을 꽤 즐겨했다던 너와 달리기를 하려고 만났는데 정작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다만 떨고 왔던 날을 기억한다. 너는 미얀마에서의 삶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날 미얀마에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많다는 것을,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지역마다 계절이 정반대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얀마가 한국에서 의외로 가깝다는 사실도.


미얀마에 있는 너의 집에 가려면 제1 공항에서 내려 다시 비행기를 탄 다음 6시간 동안 차를 타고 들어가야 도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는 미얀마에 놀러 오라고 했다. 숙박비는 무료인 거야? 능청스레 물었다. 당연하지, 너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놀러가겠다고 말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네가 사는 나라와 네가 사는 지역과 너와 함께 사는 가족을 떠올렸다. 새벽마다 아버지와 산책하러 간다는 조그만 강아지, 네가 존경한다는 너의 어머니, 요리를 잘한다는 너의 아버지, 너의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미얀마의 산과 바다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너는 미얀마의 상황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관한 얘기였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체포된 사람도 많다고 했다. 거리에 죽고 다친 이들이 널려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미얀마에 갈 수 없다고, 너는 말했다. 지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옆 나라의 사건이 그제야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너는 부모님이 걱정된다고 했고, 나도 진심으로 너의 가족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자주 함께 슬퍼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다른 슬픔을 맞이해야 했다. 내가 일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너는 아쉽다고 했다. 그만두기 몇 주 전부터 자꾸만 아쉽다고 해서 오히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나도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 라고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모로 놓치기 아쉬운 아르바이트였지만, 그럼에도 이 조그만 곳에서 너를 알게 되었음에 감사했다.

 

이 동네가 아니었다면, 이 가게가 아니었다면, 이 시기가 아니었다면 미얀마 출신인 너와 만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아마 평생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사장님과 나는 서로 몹시 아쉬워했다. 자주 놀러 오라고 하셨지만, 자주 놀러 가지 않으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슬펐다. 그러나 너와 나는 정작 마지막 날에 전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게에서의 시간은 이제 과거형이 될 테지만, 너와 나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므로.

 

 

 

20220813150110_wnxmeqky.jpg

 

 

[윤아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