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피엔스적 종말론 [영화]

아담 맥케이, <돈 룩 업>(2021)
글 입력 2022.09.0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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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로 위태로웠던 여름을 지났고, 태풍으로 위험했던 가을을 무사하게 맞이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와 시스템의 위기 대응 능력을 자찬하고 안도하면서 또 한 번의 계절을 맞는다. 여러 번의 위기를 어떻게든 견디며 대다수의 인류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인류는 다시금 번성할 테다. 이처럼 인류가 지구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위험한 종이 된 이래 ‘생존’이 상수가 됐으므로, ‘멸종’이나 ‘종말’의 언어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변수가 됐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가 재앙을 유희로 소비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다고 믿는다.

이따금 멸망을 상상할 때 우리는 우리가 접했던 여러 버전의 재앙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야기의 힘은 구체화된 상상을 드러낸다는 것. 책이나 스크린을 통해 현실과 안전하게 격리해놓은 재앙의 이야기는 어떤 상상을 구체화하며 육박해온다. 그리고 재앙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대체로 ‘어떤’ 상상에 집중할지에 대한 옳은 판단을 내린다.

재앙에 대한 아담 맥케이 감독의 좋은 영화, <돈 룩 업>을 본다.
 
 
 

종말론의 힘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제니퍼 로렌스)는 우연히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다. (최초 관측자의 이름이 붙게 될 그 혜성이 케이트에게서 발견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와 혜성 모두 ‘충돌’의 아이콘이 되므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던 그녀의 담당 교수 랜들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떨어지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발견은 종말의 예견으로 급변하고, 그들은 인류의 멸종을 가져오게 될 혜성의 충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실은 발견의 영역이고, 진실은 확인의 영역이다. ‘거대한 행성이 곧 지구로 떨어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므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고통스러운 사실을 진실로 인정받아야 한다. 사실-발견이 진실-인정의 영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험난하다. 게다가 그 사실이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울 리 없는 종말론일 경우 그 난이도는 극악해지는데, 아담 맥케이의 상상력은 바로 이 부분에서 구체화된다.

종말과 구원을 외치는 종교보다 불사와 영생을 외치는 과학의 힘이 센 사회. 신과 자연의 무수한 심판을 이겨내며 생존했다고 믿는 현대의 인류 앞에 종말론은 힘이 없다. 그것이 과학적 관측에 입각했다고 해도, 과학의 교리는 (자연에 대한) 극복이므로, (자연에 굴복한) 종말을 예측하는 그런 과학은 힘을 가질 수 없을 테다. 그들은 인류를, 그리고 진실을 지키기 위해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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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일


순수한(그리고 불쾌한) 과학은 철저히 외면된다. 사회적 수준에서 조롱을 당하고, 국가의 수준에서 탄압을 당한다. 유쾌한 TV쇼에서 가십처럼 가볍게 다뤄지던 케이트와 린들의 사실-발견은 오로지 한 경우를 통해서만 진실이 될 기회를 얻게 되는데, 바로 권력에 의해, 권력을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될 때뿐이다.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립)은 선거 승리를 위해 혜성 충돌에 대응하기로 한다. 물론 인류의 생사를 가를 이 중대한 국가적 결정마저 어김없이 번복되고 마는데, 정치보다 거대한 경제-권력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어떤 불편한 진실에 대응하는 이런 종류의 사회적 메커니즘은 오차가 거의 없다. 이 영화가 말하는 가장 재앙적인 상상은 진실은 대체로 힘이 약하다는 것. 가장 힘이 센 것(정치-경제-권력)의 도움을 통해서야 진실은 진실이 된다는 것.

과학이 정치를 불렀고, 정치는 경제와 협력한다. 혜성이 희귀 광물을 다량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그리고 그것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거라는 사실―은 로켓의 궤도를 바꾼다. 랜들은 흔들린다. 과학적인 인간에서 인간적인 과학자로. 진실을 위해 낮은 자세로 굴복하며 권력에 힘을 보태던 린들 박사는 이제 거의 절규하고 마는데, 아마도 이 영화에서 우리를 가장 전율케 한 장면이었을, 분노에 찬 그의 외침이 진짜 과학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혜성이 존재하는 걸 아는 이유는 우리가 봤기 때문이에요. (…)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해?"
 

진실을 위해서라면 엉성하게 짜놓은 권력의 각본에, 비록 비참할지라도, "100% 힘을 다해 돕겠어요" 다짐하는 일. 이윤만을 좇는 기업 ‘배시’로 대변되는 자본-과학이 진실을 흐린다면 단호히 맞서서 저항하는 일. 우리는 그것이 진짜 과학의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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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룩 업 vs. 룩 업


권력은 진실을 교묘한 방식으로 통제하고, 진실은 권력을 거스르며 흐른다. 혜성의 접근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에도 세상은 공포와, 희망과, 여전한 의심이 공존한다. 우리의 터전으로 맹렬히 돌진하는 혜성과 싸워야할 인류는 우선 거짓과 싸워야만 할 테다. 그리고 시간은, “6개월 10일 2시간 11분 41초”는, 빠르게 몸무게를 줄여간다.

진실이 무뎌져가는 절박한 상황. 이제 과학이 전해줄 수 있는 마지막 외침은 가장 인간적인 수준의 단어다. ‘룩 업(look up).’ 혜성이 다가오고 있는 하늘을 직접 ‘올려다보고’ 판단하라는 것. 그러나 이미 권력의 지시에 의해(don’t look up) 판단이 마비되고 편이 나누어진 인류는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영화는, 그리고 세상은, 정확히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의(그리고 세상의) 종반부에 도달한 우리는, 영화 속 인류처럼, 이미 어떤 결말들을 상상하고 있을 테다. 우리가 앞서 충분히 소비했던 재앙의 서사를 답습하면서 극적으로 혜성이 비껴가는 결말, 어느 결정적 사건을 통해 전 인류가 단합하여 혜성을 막아내는 결말 등. 그러나 이 좋은 영화는 관객의 오만한 낙관을 무너뜨린다. 혜성은 오차 없이 떨어지고, 인류는 절멸한다. 진짜 재앙이 닥친다면 우리는 사피엔스적 오만함에 의해 멸종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돈 룩 업>은 쓴웃음으로 포장해 날린다.

우선 절망을 말했으므로, 이제 가까스로 희망을 찾아보자. 영화 전체의 메시지에서 벗어나 제일 무서웠던 건 혜성 충돌의 공포도, 정치의 비열함도 아닌, 기업가 피터가 “인류의 진화” 운운하던 장면. 축적된 데이터를 이용해 한 인간의 최후까지 예측하던, 마치 신이 된 듯 예언하는 이 장면은 기술과 자본을 통해 지구의 지배종이 된 사피엔스 전체의 오만함을 응축하고 있을 테다.

하지만 어떤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외롭게 홀로 죽게 될 것이라는 데이터의 예언을 깨고, 랜들은 가족들과 함께 평안한 종말을 맞이한 것. 최후의 순간까지 서로의 체온과 기억을 공유하고, 사랑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류의 최후를 그려본다. 만약 재앙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재앙 이후의 서사는 제법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돈 룩 업(위를 보지 마)’에서 ‘룩 업(나아지다)’으로, 가야할 길은 여전히 멀지만.

모진 비바람에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께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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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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